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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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SF라는 말로 더 친숙한 환상소설을 쓴 작가가 어슐러 K. 르 귄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오즈의 마법사, 나니아 연대기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유명한 작가다.

 

작가 검색을 하다 보니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가 꽤 유명하다고 하고, 이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또 로버트 리버만 감독이 '게드전설: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두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꽤나 유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스시'라고 한글로만 써놓으면 참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어스시'를 영어와 함께 표기를 하면 한눈에 들어온다. 'Eerthsea'. 한 마디로 '땅바다'다. 땅과 바다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 아닌가. 결국 환상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제목이 된 배경에서 알 수 있다.

 

대표작인 '어스시' 시리즈를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번에 읽은 이 작품집으로도 르 귄의 작품세계를 아는데는 충분하지 않나 하는 근거없는 자만심을 가져본다. 이 작품집이 환상소설임에 분명한데, 현실을 자꾸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르 귄이 초기에 쓴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르 귄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고, 또 한편 한편을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이 중에 이 책을 산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한 편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때문이다.

 

다른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 우리는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유토피아란 말 그대로 이곳에는 없는, 또는 어디에도 없는 곳 아닌가. 오멜라스는 그런 유토피아에 대해서 아주 짧게 서술한 소설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낸다. 너무도 행복하게. 그런데 이들의 행복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자, 그런 사회가 과연 유토피아인가.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인가?

 

오멜라스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희생에 대해서, 그것도 어린나이의 사람이 - 르 귄의 작품에는 남녀의 구별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겨울의 왕'이라는 작품을 보면 양성인이 나온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에 가장 늦게 발표된 작품이 1974년 작품임에도 이미 다양한 성에 대해서, 어느 특정한 한 성이 지배적인 사회에 대해서 르 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사람의 희생을 막을 수가 없다. 그것이 계약이다.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소설을 보자.

 

  그러나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골방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다.

  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이다. 그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 한 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464-465쪽)

 

자, 이게 유토피아의 이면이다. 감춰진 진실이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 같지만 모두를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멜라스 사람들이 고민하는 지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 무슨 윤리 딜레마 문제같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모든 사회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아닌가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모두'라는 말에 방점을 찍으면 전체주의로 가기 쉽다. '모두'를 '다수'로 대체하고 '다수'를 위해서 '소수'는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가 행복한 사회니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행복이 과연 행복일 수 있을까? 오멜라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많은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몇몇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소설은 이렇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장편으로 이런 소설을 쓴다면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는 갈등들이 나오겠지만, 간략한 서술로 소설은 시작되고 끝난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들 몫이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떠나는 오멜라스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할 것이다. 사회를 바꿔야지 도피했다고. 그것이 과연 도피일까? 한 사람을 구했다?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한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행복을 수량으로 판단할 수가 없으니,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들이 지녀야 할 행복은 동등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지금 우리 사회로 바꾸어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삶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쉬운 길이든 어려운 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을 했기에. 어떤 길이어도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두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이 과연 통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한 생각을 이 작품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혁명 전날'이라는 소설에서 더 생각할 수 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혁명에 가담한 '라이아'라는 인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수 없음을,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잣대로 남들의 행복을 재단해서는 안 됨을, 행복은 자신이 선택한 자유에서 나오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로 와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자, 거대한 과학기술의 시대에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세계는 너무도 멀리 와 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 때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여기에 더해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혹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오로지 내 힘만으로 될까? 누군가의 노동,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단 한 명일지라도 견딜 수 없는 오멜라스 사람들이 있는데, 단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다수의 희생 위에 우리 사회가 지탱이 되고 있다면?

 

오멜라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무엇으로 인해 지속이 되는지를 안다. 그들은 현실을 명확히 인식한다. 그 다음에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담 우리가 할 일도 명확하다. 먼저 우리 사회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체계에 대해서.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작품집에 많은 작품이 나와 있지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이 되는 이유는 바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몫을 남겨놓고, 그 몫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좋은 소설들이 많다. 복제인간과 관련해서는 '아홉 생명'이라는 소설을,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나무 관점에서 쓴 '길의 방향'도 생각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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