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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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참 복잡한 사람이구나, 카잔차키스란 사람은 이란 생각을 했다. 이 작가는 영혼의 구제를 위해 모험을 떠나는 사람과 같다.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행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가 도달한 길이 어디일지는 모르겠다.

 

육신을 벗어던지고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지만 육체없는 영혼이 가능하겠는가? 반대로 영혼없는 육체란 빈껍데기에 불과할텐데... 육체와 영혼의 합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유에 이를텐데, 그 길이 만만치가 않다.

 

소설이지만 사실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실제로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만났기 때문에, 또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이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그가 조르바에 관한 글을 완성했을 때 편지 한 통이 온다. 그 편지 내용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조르바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것, 그것은 조르바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라는 것을.

 

만남에서 헤어짐 속에서 많은 일들을 겪는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소설 속 화자는 성장해 간다. 그는 자유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완전한 자유에, 조르바와 같은 자유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을 조르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받았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생략)' 462-463쪽.

 

이런 조르바의 말을 들으며 화자는 자신을 인정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463-464쪽)

 

이게 우리들 모습 아닌가. 날아가고 싶지만 끈은 놓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끈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날려고 하는. 그러면서 자신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런 존재. 화자는 조르바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한없이 자유로운 조르바란 인간을 만나 자신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이다. 사람이 제공한 행복.

 

그래서 조르바는 화자에게 사람책이 된다. 그는 비록 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펜대를 지닌 인간에게 쓸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또한 삶을 성찰하고 다른 삶으로 옮겨가게 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사람책.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만나 자신이 지닌 펜으로 그의 삶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책이 하는 역할이다.

 

그걸 깨닫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351쪽)

 

자, 이런 사나이에게 조국이란 윤리란 명예란 미래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오로지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살아간다. 자신의 의지로.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일을 할 때는 그 일에만 몰입한다. 다른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게 한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요리를 할 때는 요리에, 춤을 출 때는 춤에, 사랑을 할 때는 사랑에... 몰입한다. 자신을 그것에 일치시킨다. 이리저리 요량을 하지 않는다. 그냥 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살아간다. 현재를. 그러니 거창한 이념이나 윤리 도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펜대를 지닌 인간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재느라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늘 손익을 계산하는.

 

하여 조르바의 삶은 화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비록 그가 조르바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조르바라는 사람책이 준 영향은 상당하다.

 

반대로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조르바를 욕망에만 충실한 인간으로 좁게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욕망만 충족하면 그것이 사람인가? 짐승이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르바가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도덕의식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는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한다. 수도사들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부정적인 생각이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조르바는 이들을 골탕먹이지만 선량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욕망으로 그들이 피해 입을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또한 말로는 여성을 암컷이라고 비하하지만, 그 여성들을 대할 때는 최선을 다한다. 여성들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여성들 또한 목적으로 대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과부의 사건에서 그런 조르바를 알 수 있고, 오르탕스라는 전직 매춘부와 지내는 모습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행위하는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것이 다른 사람의 피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조르바의 자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그는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때문에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또 윤리니 돈이니 하는 것이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 역시 조르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구도의 방황을 한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르바라는 사람책을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 조르바. 다시 읽으며 나는 얼마만한 줄에 매여 있는 연(鳶)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줄을 끊어버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길게는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 이것도 조르바가 보기엔 펜대에 얽매인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같은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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