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연 시집을 읽으면 자꾸 '명사들'이 생각난다. 나이 들어 가면서 이상하게 명사부터 까먹게 되는데.
그 단어가 무엇이었지,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이었지 하는 등, 자꾸 명사가 내 곁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데... 그래서 명사는 내게 또렷한, 너무도 명료한 무엇이어야 하는데...
최하연 시집에는 참 많은 명사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명사들이 이상하게 정렬되어 있지 않다.
마치 내 기억 속에 무언가가 있지만 명료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해 내 애를 태우듯이, 최하연 시들에 나오는 명사는 이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을 자꾸 불러일으킨다.
익숙함을 낯설게 하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무언가를 남긴다. 명료하게 이거다 하고 남기지는 않는데, 자꾸 시를 들춰보게 만든다. 이해하지 못해도 손이 가게 하는 시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봄비'라는 시를 보자. 이 시에 등장하는 명사는 비, 배꼽, 탯줄, 허공, 테러, 송홧가루다.
배꼽과 탯줄, 비와 허공은 연결이 되는데, 또 비와 송홧가루도 연결이 되는데... 다른 것들과는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명사들이 제 자리를 차지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낸다.
명사 자체도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다른 명사들과 관계를 맺으며 또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시는 이렇게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봄비
비의 배꼽은
쑥 들어간,
움푹 패인,
탯줄 끊고 떨어지는 허공,
속에 있다
테러에 가까운
송홧가루가 몽땅
젖는다
최하연,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문학실험실. 2018년. 119쪽.
이런 낯설게 하기의 정점이 바로 '끝난 것은 죽음'이라는 시가 아닐까 싶다. 아파트 화단을 보면서 무덤을 생각하다니... 전혀 낯선 비유인데, 읽다보면 그러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끝난 것은 죽음
아파트의 화단은 무덤이어서
어느 날은 모자가 모종삽을 들고 찾아와
죽은 고양이를 묻고
어느 날은 노부부가 막삽을 들고 찾아와
아들 손주 며느리를 묻는다
그리하여 나무 아래 도둑고양이는
혼자 몰래 삼년상을 치르고
무덤 밑으로 상수도 오수관 소화전이라도 지나갈라치면
어느 쫑, 메리, 삼순이의 집안엔 액이 끼어
가세가 기우는 것
그리하여 한진택배 파란 차가
무덤가게 잠시 설 때마다
상주의 고구마나 나주의 배라도
명부에 잠깐 올렸다가
층층마다 나누어 먹고
봄날의 꽃들은 그토록
한꺼번에 피었다가 지는 것
아파트의 화단은 부의함도
리무진도 없는 것들의 선산이어서
구름이 발로 밟고
잡풀은 해마다 질기게 자라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 화단 앞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기를 들고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메리 쫑 삼순이의 후손은
뒷다리 한 개씩 고이 들고 화단에
저리도 장엄하게 쉬를 하시는 것
최하연,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문학실험실. 2018년. 110-111쪽.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너무도 익숙해서 다르게 보지 못했던 것, 마치 명사가 한 개의 뜻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의미는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인은 아니라고, 잘 보라고, 더 생각하라고 하는 듯이 낯섬을 우리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익술함과의 결별.. 이것은 인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