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보실 분 예매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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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CGV 2매

조조불가. 좌석지정불가. (CGV 홈페이지 아니고 타사이트 예매라 좌석 지정이 안됩니다.)

내일 개봉입니다.

 

내일(29일) 정오까지만 댓글 확인 및 예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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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로 관람 시간과 연락처 남겨주시면, 제가 확인하는대로 예매해서 문자 보내드릴게요.

 

 

* 29일 오전 0시 30분 기준으로, 1매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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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9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9 0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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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9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30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30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울행 기차를 타려고 여행 가방을 꾸리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걸 넣었다가 저걸 뺐다가. 필요한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줄이고 줄여도 캐리어 하나가 꽉 찼다. 여름이라 옷도 가벼울 것이고, 겨우 열흘인 데다가 동생네 집에 가는 것이라 따로 숙박에 필요한 게 필요 없는 데도 이랬다. 사실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계획하고 돌아다니는 게 귀찮아서 웬만해서는 여행이란 단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점점 그 귀차니즘을 떨치게 하는 감정이 생겼다. 이제야 어딜 좀 돌아다닐 시간이 생긴 엄마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가족의 마음이, 같이 어딘가로 갈 계획을 세우고 얼굴 보고 만나는 일을 많아지게 한다. 몸은 귀찮고 힘들지만, 함께하는 시간과 어딘가로 향하는 마음은 귀찮음과는 다른 뭔가가 꽉 채워지게 한다.

 

아마 이 자매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세계여행을 즐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여기서 뭔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 항상 갈증이 나듯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세계여행이라는 꿈, 더 넓은 세계의 여러 곳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바람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스물다섯, 서른 살의 자매는 떠났다. 24개국 52개의 도시를 누비는 모습이 활자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걷고, 보고, 느끼는 그대로 사진과 문장에 담겼다.

 

역시, 하고 싶던 일을 한다는 건 너무너무 행복한 일이다. 여행을 할수록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가고, 그만큼 새로운 리스트가 생겨난다. 세계로 한발씩 나아갈수록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내가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들을 만들고 있었다. (85페이지, 프라하)

 

여행이란 혼자 하는 것도 힘들지만, 마음 맞는 이와 함께하는 건 더욱더 어렵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께 살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더군다나 집 떠나면 마주치게 될 온갖 일들이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할 텐데, 일행에게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일정의 변경에 일행의 눈치도 봐야 한다. 내 맘대로 결정하고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자매의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같이 준비하고 같이 떠나는 것까지는 좋았다. 세계를 누비는 상상에 많이 설레며 여행 준비를 했을 것이다. 첫 챕터로 넣은 '떠나기로 하다'를 읽다 보면 그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떠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읽으면서 같이 두근거렸다. '아, 역시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행복해!' 하면서. ^^ 이 자매의 여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행복은 조금씩 사그라진다. 낯선 곳을 향하는 마음의 불안과 계획대로 되지 않은 순간들의 당황과 일정을 수정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염려 때문에 무슨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자매의 계획대로 계속 나아가며 도착한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런 불안과 걱정쯤은 넣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부딪히면 어떻게든 가능해지는구나 싶은 이상한 긍정 마인드가 생기니까 말이다.

 

 

자매의 여행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세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는 한 번쯤 꾸어보는 꿈이지만, 노트에 한 번쯤 적어보기도 하지만, 거기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머릿속과 적어놓은 노트 밖으로 쉽게 튀어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부러웠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거나 멍석을 깔아주어도 선뜻 그 여행길에 오르기를 주저하게 되겠지만, 스스로 마음먹고 준비하면서 세상에 부딪히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이 혹시 꿈은 아닐까 싶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만큼 이들의 여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질투였을까? '이거 실화냐?' 싶은 느낌말이다. 아마 조금 더 격하게 부러웠다면, 부러움이 아니라 질투라는 감정이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 긴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걸 가능하다고 보여준 자매의 모습도 눈에 담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부딪히면서 다시 감정 추스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여행이 주는 성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려와 양보가 생기는 모습이 괜히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이 경험을 함께하면서 자매는 더 돈독해졌으리라.

 

그리고 대부분 사람이 언젠가 이루고 싶은 바람으로만 넣어둔 계획을 실행했다는 게, 책의 뒷부분에 적어놓은 이들의 여행 경비를 보면서도 부러웠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계획이고 금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액을 넘어서서 시간이라는 제약도 이 여행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로 머물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200일이 넘는 기간이라는 시간과 이들이 사용한 금액은 웬만해서는 쉽게 계획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각자가 모아둔 돈으로 여행길에 나섰겠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이 금액으로 다른 일을 더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자매가 그 기간에 걸은 여러 나라와 도시들이 건네준 많은 경험은 가장 부러운 일이 아닐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오직 머릿속에 저장해둔 사람만이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그 경험, 자기만의 인생에 뭔가 굉장하고 단단한 주춧돌이 다져진 느낌.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 위기를 극복하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교통수단과 티켓 사는 방식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다음 나라로 출발하는 것,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버스 시간을 체크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 이렇게 미리 준비하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단축하고 체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행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르기 마련이라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163페이지, 취리히)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야 알찬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 않고 하루를 몽땅 쉬는 데 쓰거나 특별한 일정 없이 시장 안을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새 그 나라에 스며들듯 느리게 여행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바쁘게만 살아온 나에게는 큰 변화이지만, 난 이 변화가 아주 마음에 든다. (281페이지, 쿠스코)

 

여행지에서의 첫날이 아니라, 처음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부터 들려준다. 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준비와 계획으로 이 여행을 더 완벽하게 해냈는지 알 수 있는 시작이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동유럽, 영국, 미국,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자매가 다닌 곳곳에서 마주친 세상의 모습은 앞으로 이 자매가 살아갈 세상의 많은 일에 엄청난 힘이 될 것 같다. 여행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왜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살아가야 하는지 증명하는 것처럼, 자매가 누빈 세계의 풍광들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는 다른 크기의 두근거림이었다. 어떤 사진들은 마치 그려놓은 것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적이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상상하지 못한 곳이, 아직 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구나 싶어서 슬퍼지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 슬픔을 없애려고 세상의 곳곳을 찾아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 속에 담긴 사진을 보면서 여행의 이유와 필요성을 하나 더 찾았다. 특히 저자의 취미인 카페 투어는 여행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는데, 가는 곳곳마다 카페의 분위기와 커피는 아마 저자의 또 다른 보물 1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행 준비부터 여행을 떠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거의 400여 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방문한 나라와 도시에서 실수하기 쉬운 여행 팁과 조금 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행 루트, 교통과 비용까지 해서 마지막 장에 잘 정리해두었다. 나도 처음 듣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나라로 떠나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특징을 이해하는 내용이 될 것 같다.

 

 

넓은 세상으로 당차게 나아가는,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의 끝에는 자기만의 세상을 하나 만들었을 이야기다. 부러움마저 즐거워지는 여행기다.

 

문득 이 감사함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야만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떠나온 지금은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찬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좋다. (139페이지, 차브타트)

 

세계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자 나를 둘러싼 외부적인 요인은 여전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하는 내부적인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한 변화가 있다. 엄마가 요리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따뜻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으로 변화된 것이다. (4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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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나무를 하던 가난한 나무꾼은 풀숲에서 뛰쳐나온 사슴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얼른 나뭇가지 더미 속에 숨겨주었다. 사냥꾼이 와서 사슴의 행방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무꾼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슴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보답하겠다면서 나무꾼에게 소원을 물었다. 나무꾼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사슴에게 평소 바라던 소원을 말했다. "고운 색시를 얻어 장가를 갔으면 좋겠어!" 그에 사슴은 오늘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왔을 것이니, 나무꾼에게 그중 한 선녀의 옷을 훔치라고 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으니 그 선녀를 색시 삼으라고,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는 절대 선녀 옷을 내어주면 안 된다는 경고도 함께. 나무꾼은 사슴의 말대로 선녀들이 목욕한다는 폭포로 향했고, 거기서 선녀 옷을 한 벌 훔쳤다. 이제 선녀 옷의 주인만 찾으면 나무꾼은 예쁜 색시도 얻고 재밌게 살겠지...

 

...라고 우리가 알던 동화는 잘못됐다. 선녀들의 목욕을 훔쳐보고 옷까지 훔친 나무꾼은 새신랑이 아니라 죄인이 된 거다. 선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잃어버린 날개옷의 주인인 서령선녀는 나무꾼을 붙잡아서 옥반지를 낀 주먹으로 나무꾼의 얼굴을 내리쳤다. 훔친 옷을 돌려달라고 하는데도 나무꾼은 버텼다. "내가 훔쳤다는 증거가 있어?!" 이놈이 강펀치 한 방을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선녀와 나무꾼은 누가 빨리 나무를 베는지 내기를 하기로 한다. 나무꾼은 설마 선녀가 나보다 나무를 잘 베겠나 싶은 마음에 기세등등했지만, 선녀의 나무 베기 솜씨가 장난 아니었다는 건 안 비밀. 선녀는 나무꾼을 이기고 선녀 옷을 되찾음과 동시에, 이 불량한 계획을 꾸민 나무꾼과 사슴을 가만두지 않았다.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두 놈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낱낱이 털어놓게 하고, 나무꾼에게 천 일간 투명 옷을 입을 것으로 벌을 주었다. 보이지 않는 옷이라, 남들 눈에는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는 거야. 깔깔깔~ 그리고 사슴에게는 나무꾼과 작당한 죄로 천 일간 입이 묶인 채로 생활할 것을 명했다. 암만, 이래야지. 이렇게 벌을 주어야 당연한 것을 우리가 그동안 만난 「선녀와 나무꾼」 동화에서는 하늘로 올라간 선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하는 내용이었지, 아마?

 

 

구오 작가의 『선녀는 참지 않았다』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 책이 기존의 동화와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이미 아는 유명한 전래동화 10편을 가져와서,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몰라서도 몰랐지만, 알고서도 말하지 못하고 감당해내야 했던 여자의 모습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본다. 나무꾼에게 선녀 옷을 훔치라고 알려준 사슴은 은혜를 갚은 게 아니라 계략을 꾸민 거고, 선녀 옷을 훔쳐서 아내로 맞은 나무꾼은 착하게 살아서 복을 받은 게 아니라 범죄자일 뿐이다. 비슷한 이야기로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있다. 선화공주에 관한 헛소문을 퍼트려 선화공주가 궁에서 쫓겨나게 한 서동은 허위사실 유포로 처벌받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쫓겨난 선화공주가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할 때 ‘짠’하고 나타나서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가 아내로 삼는다는 원래의 이야기를 확 뒤집었다. 선화공주는 아버지에게 따진다. 왜 자식의 말을 믿지 않고 저잣거리에 떠도는 헛소문을 믿는 것이냐고. 선화공주는 범인 탐색에 나서고, 마를 팔던 서동을 붙잡는다. 그런데 서동의 핑계가 참 어이가 없다. "저는 그저 공주마마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흠모하는 마음에... 흑흑. 그저 실수했을 뿐이옵니다." 뭣이라? 실수? 그 헛소문에 한 사람 인생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실수우우우우? 선화공주는 서동의 이마에 그의 죄를 잊지 못하게 하는 주홍 글씨를 새긴다. 사람들은 그의 만행을 알게 되고 선화공주를 둘러싼 오해는 풀린다. 세 자매의 지혜로 범인을 찾아내고, 신라의 세 자매는 현명하게 나라를 이끄는 존재가 된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전래동화의 그런 전개가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변해야 한다. 누군가에 기대어 인생을 얹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각은 당연히 필요하고, 그 시각에 맞는 동화의 재해석도 이어져야 한다. 아이가 글자를 알고 읽어가기 시작하는 동화 한 편, 두 편. 점점 더 많은 이야기에 빠져 지내게 될 텐데, 처음 잘못 접한 이야기가 그 시작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왕자가 와서 키스해줄 때까지 잠에 빠져 있고, 날개옷 하나 빼앗겼다고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헛소문 하나에 계획에 없던 쫓겨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구오(俱悟)’는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함께 깨닫다’라는 이름 아래 2015년부터 함께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토론 모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작가의 필명쯤으로 생각했는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생각과 쓰기가 함께한 글이라고 하니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10편의 동화는 앞서 언급된 선녀와 나무꾼, 선화공주와 서동, 처용, 우렁각시, 장화홍련전, 혹부리 영감, 콩쥐팥쥐전, 박씨전, 반쪽이, 바리데기다. 각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게 각색되었는데,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흥미롭게 깨트려놓는다.

 

「우렁각시」에서는 씩씩하게 농사일을 하는 처녀 혜석이 주인공이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집안일 해주고 빨래 해주고 맛있는 식사도 챙겨줄 총각을 만나고 싶은 거였다. 그래서 일하면서 습관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나랑 살면서, 맛있는 밥과 반찬을 해줄 그런 총각 어디 없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저기 멀리 바닷속에 이런 청년이 딱 준비되어 있었다. 용왕의 아들인 우렁이 총각은 매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음식을 만드는 게 너무 좋았는데, 아버지인 용왕은 그런 아들을 항상 혼냈어. “지금 사내가 무얼 하는 것이냐!” 이미 익숙해진 규범은 우렁이 총각이 집안일을 하고 음식을 만드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렁이 총각은 저기 땅 위에서 일을 하는 처녀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었던 거다. 자기에게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농사를 짓는 혜석에게 다가간 거지.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알콩달콩 자기 스타일에 맞는 일을 해가면서 행복하게 살았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둘의 생활을 좋게 보지 않았다. 남사스럽다는 둥, 혜석이 요물이라는 둥, 우렁이 총각이 미련하고 둔해서 혜석에게 홀렸다는 둥. 둘은 마을 사람들의 편견을 깨주기 위해 초대를 한다. 우렁이 총각은 맛있게 음식을 하고, 그 음식 속에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게끔 하는 묘약’을 넣는다. 그날 이후로 우렁이 총각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변했다. 여자들은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남자들은 농사 외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며 미래를 생각했다.

 

 

나쁜 혹부리 영감에게는 혹을 하나 더 붙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할 때마다 아프게 만들었고, 장화홍련의 새엄마에게는 세상 모든 새엄마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언젠가부터 새엄마는 계모라고 불리면서, 무조건 아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못된 엄마로 만들었을까? 계모는 모두 나쁘고 못됐다는 고정관념부터 새로 써야 한다. 장화홍련의 새엄마는 오히려 위기에 빠진 장화와 홍련을 구해주는 현명한 여자로 재등장했다. 홍련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을 수령이 되고, 누명을 쓴 장화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장화와 홍련에게 다가가 술수를 부리고 약한 여인으로 대하면서 수작을 걸어보려고 했던 이들을 벌준다. 콩쥐팥쥐의 성별을 여자에서 남자로 바꿔놓는다. 또 박씨전에서는 결말을 바꾸어 허물을 벗고 외모가 달라지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박색이었던 박 씨가 나중에 허물을 벗는다고 하여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될 거로 생각하기 쉬운데, 박 씨의 어질고 현명한 모습이 외모가 달라졌다고 하여 인정받는 게 좀 억울하지 않은가? 외모가 달라도 내면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박 씨는 집안사람들의 구박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장착한 한 명의 인간이었는데, 그 인간다움을 존중받지 못하다가 외모의 변화로 인정받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외모지상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 재해석된 박 씨는 허물을 벗었어도 외모가 달라지지 않았고, 덕은 생김새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전쟁으로 붙잡혀가서 되돌아온 여인들은 사람들이 욕할 때, 그녀들은 그저 ‘환향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여인들과 함께 상처 입고 아픈 기억을 지우는 데 애쓰면서 악몽을 벗어내 새로운 삶을 꾸려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데기는 어느 노부부에게 거두어져 자랐고, 상인으로 성공한 후에는 학당을 세워 갈 곳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불러 모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특히 여자아이들)을 거둬서 무엇 하느냐고 말했지만, 바리데기는 상관하지 않았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그녀가 가슴에 한이 된 일이기도 했을 테지. 처음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왜 버려졌는지 몰랐다. 그저 형편이 좀 어려웠나보다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성에서 신하가 찾아와 바리데기를 붙잡았을 때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딸이라고 필요 없으니 버려놓더니, 이제는 왕과 왕비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그 병을 고칠 사람이 바리데기밖에 없다면서 찾아온 게 화가 났다. 저승의 서천서역국에서 나는 약수를 먹어야만 병이 낫는다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한 바리데기뿐이라나 뭐라나. 딸이라서 버리고, 딸이라서 왕위를 이을 수 없고, 그래서 내쳐지는 운명. 그런데 인제 와서 부모의 병을 고치러 저승의 서천서역국에 다녀오라고? 안 한다. 못 한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공짜로는 못하겠다. 뭔가 내놓아라. 어찌어찌 서천서역국까지 다녀온 바리데기는 스스로 왕이 되고, 성차별 없이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 여인이어서 할 수 없고 거부당하는 세상은 이제 상대하지 않으련다.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까? 원님이 꽃신 한 짝을 들고 콩쥐를 찾아가는 일, 서동이 퍼트린 헛소문에 진상을 밝히지 못했던 일, 나무꾼의 절도에 벌하려고 하지 않은 일, 아내가 좋아하는 농사를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집안일을 할 수도 있는 거, 반쪽이에게 업혀 가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만 했던 것 등등. 아니라고, 잘못된 거로 생각하면서도 꺼내놓지 못한 마음속 말들이 왜 가슴 속에서 머물기만 해야 했을까. 학생들의 손끝에서 재탄생한 이 페미니즘 전래동화는 말 그대로, 살짝 뒤집으니 이야기의 판이 뒤집어졌다. 여럿이 모여 함께 읽고 토의하고 여성적 시각이 담긴 이야기로 재구성하다 보니, 뭔가 더 적극적인 게 되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왔기에 당연하게 여긴 차별과 편견이, 더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의식을 변화하는 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강하게 다가온다. 익숙하게 만나온 전래동화에서 뿌리박힌 가부장적 사회와 그 사회에서 재생산되는 성차별을 없애는데 이 책이 굉장한 힘이 될 것 같다.

 

그냥 재밌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있고 통쾌해서 시원하다.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바라봤던 많은 것이 더는 익숙하지 않도록, 그 모든 것을 더 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전래동화를 떠올릴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면, 왜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흘러가야만 했는지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면, 이야기의 흐름과 다른 생각이 마구 비집고 나온 적이 있었다면, 더 의미 있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불합리하고 차별에 물든 역사가 동화 속에서 더는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기 좋은 글이다. 이렇게 바뀐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아이는 분명,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것과 다른 의식을 심을 것이다. 불합리하고 억울한 여성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도록,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집안일과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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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돌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조차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다. 어떻게 키워야 하나, 잘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엄마가 돌보는 작은 화분 몇 개에서 꽃이 피는 걸 지켜보면서도 내가 돌볼 몫으로 화분을 만든 적은 없다. 애완동물을 곁에 두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이 녀석을 내가 잘 보듬어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내 곁에서 외로워하거나 홀대받다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그랬다. 그러니 내게 애완동물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는 대상이다. 누군가의 강아지 고양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정도.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게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전부였던가 싶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유는 작은 상자 안에 있던 고양이 초비를 거둔다. 버림받은 고양이였지만 미유에게 속하게 된 초비. 오랫동안 유지한 친구와의 우정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남자친구 사이에서 아픔을 겪는다. 그림을 그리는 레이나의 집에 드나들던 고양이 미미는 떠돌면서도 레이나의 곁을 찾아든다. 시니컬한 레이나 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고양이 미미는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중간쯤 행동으로 레이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한다. 1년 동안 집안에서 나가지 않던 아오이에게 고양이 쿠키가 찾아온다. 아오이의 엄마가 분양받은 고양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고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아오이에게 대화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된다. 노부인 시노의 곁에 까칠하고 힘센 고양이 구로가 애완견 존의 자리를 차지한다. 개인 존과 친구 아닌 친구 사이였던 구로는 어느 날 사라진 존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노 부인의 활력소가 된다.

 

화자 '나'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세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드러나는 '나'는 고양이의 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묘했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의 모습, 고양이가 하는 말들, 고양이가 겪는 감정의 변화들까지.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고양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들의 생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화자 '나'는 인간의 시선이다.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네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간은 모두 '그녀', 여자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세상 만만하게 살아가도 좋으련만, 각자의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신뢰가 없는 연애 아닌 연애를 했다가 친구도 애인도 잃은 여자, 자기 재능을 너무 믿고 있다가 뒤늦게 좌절하는 여자, 우정에 실패하고 1년 동안 집안에서 파묻힌 여자, 결혼생활에 지친 시집살이에 이제 혼자가 됐지만 외로운 여자.

 

"누가, 누가 좀."

나는 그녀가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잃었음을 알았다.

"누가 좀 나를 구해줘."

그녀는 언제까지고 울었다.

우리를 실은 이 세상이 끝없는 암흑 속에서 계속 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46페이지)

 

처음 생각할 때는 이 여자들이 고양이를 집안에 들이면서 떠돌이 고양이를 거두는 것이 아닐까 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고양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먹이를 주고 돌봐주는 일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다른 면이 조금씩 보이면서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삶의 여러 가지 것들로 지키고 힘든 인간에게, 고양이는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옆에서 공생하는 대상이었던 거다. 고양이의 언어로 하는 말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된다. 이게 가능할까? 등장인물들과 네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겠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것을. 표정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말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기적(?)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인간이어도 동물이어도 상관없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강하기만 한 인간은 없지만 계속 약하기만 한 인간도 없으니까."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99페이지)

 

네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 다른 것 같지만, 고양이들은 또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주인들의 사연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슬픔이나 상황이 낯설지 않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가 이들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진학 문제, 남녀 문제, 우정 문제, 결혼생활의 문제 등 여자들에게 공통으로 다가오는 고민이 그대로 전해진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어른 사람 마음을 흉내 내면서 읽게 되고, 내가 아직 감당하지 못한 문제 앞에서는 그들의 고충을 짐작하면서 읽게 된다. 사는 내내 우리가 털어내지 못할 삶의 힘겨움을 고양이와 여자의 일상으로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적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으로 장면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흥미로운 소재에 평범한 일상이 어우러져 판타지와 드라마 두 가지 장르를 만나는 기분이다. 특히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의 세상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그냥 길고양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고양이들에게도 나름 관할 구역(?)이 있고 그렇게 정해진 구역에 발을 디디는 것은 남의 구역을 침범하는 게 된다. 바로 전쟁의 시작인 거다. 고양이들의 난투극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본 적이 없어서 다 알 수는 없으나, 인간 세상의 구역 싸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역의 터주대감같이 그 구역의 오래된 노견 존의 지혜가 고양이들끼리의, 고양이와 인간의 교감을 이뤄내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달리고 달리다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세상이란 내 생각과 다르다는 걸.

세상의 크기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무서워.

아오이도 분명 이걸 두려워했던 거야.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141페이지)

 

단순히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면서 교감하고 성장하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괜히 더 착해지고 싶은, 누군가를 더 이해하고 싶은, 내 인생을 조금 더 아껴주고 싶게 하는 이야기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뭔가를 엿본 기분이다. 이제 길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들이 다시 보일 것 같다. 그들의 사연과 사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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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가 그랬던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써보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이 한 마디가 계속 생각나는 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감정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몇 편을 접하면서,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흡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경험한 그대로 사실대로 적어야만 했는지 읽으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건 그녀의 이야기이고, 그녀가 느낀 그대로 적어내려 애쓴 흔적이며, 그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이면서, 그녀가 작가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말이다.

 

1952년의 어느 여름, 그녀의 열두 살 일요일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때렸으며, 심지어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치면서 낫을 들었다. 공포의 순간,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날의 사건은 그대로 끝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탁에 앉는 부모. 흔한 부부싸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렇게 행동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의 일은 열두 살의 아니 에르노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부끄러움』 117페이지)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에서 인간적이지 못한 인간의 행동을 떠올렸다. 흔히 어떤 행동이나 말투를 보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 말이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할 때는 대개 그런 순간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부끄러운 순간은 충격이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곳곳에서 묻어났던 어떤 감정이 생각났다. 부유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에 부딪히면서 느끼는 순간순간들 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며 싸우던 그때. 아마도 그녀 가족이 중산층도 되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계층이라는 자각에서 그녀의 부끄러움은 시작된 것 같다. 싸우다가 자기 아내를 죽이겠다고 낫을 손에 휘두르는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트라우마가 된 건 아니었을까. 특히 그녀가 공립학교가 아닌 기독교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던 순간 그 부끄러움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기독교 사립학교는 그녀와 다른 아이들 사이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했다. 결국, 가난하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부모가 부끄럽고, 그런 부모가 자기 존재의 뿌리라는 게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거다.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소녀스럽고 괜찮은 외출복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 우아하고 예쁘게 자랄 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사람들의 시선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아름다우며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는 대상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버지와 둘이 떠난 여행지에서도 그녀의 부끄러움은 계속됐다.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하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부족함에 시달렸다. 때가 낀 운동화를 신고 계속 다녔고, 넉넉한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 가서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고, 우아하게 식사할 줄 몰랐다. 비슷한 또래의 여행객에게서 매 순간 다른 점을 볼 때마다 그녀는 좌절했다. 자기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배경을 가졌고, 또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갈지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게 그녀에게 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근원이 시작된 그곳에서부터 이어져온 부끄러움이 사라질 곳이 있던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137페이지)

 

열두 살의 그녀가 체험한 1952년은,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리 부유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전쟁 후에 안정적인 나라가 얼마나 되었으려고.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부와 가난은 뚜렷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니, 그녀 가정의 가난이 쉽게 변할 환경도 아니었던 거다.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테니, 그리 아파하거나 차별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번 눈에 들어온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경험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그 체험의 감정을 그녀는 오랜 세월 담아두고 살았다. 부끄러움은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년이 된 그녀의 어느 날, 그녀는 1952년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낸다. 오랜 세월 그녀를 부끄럽게 했던,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그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자기의 기억을 꺼내면서도 객관적인 그녀의 감정은 때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인간이기에 가능하고 허용될 것 같은 그 주관적인 느낌을 그녀는 철저히 배제하며 적었다. 그 순간의 상황이나 현상에 감정을 넣지 않는다. 오랜 전의 기억을 꺼내면서 추억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와서 이 기억을 꺼내놓아야만 했던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져서다. 이런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기어코 이걸 써 내려가지 않으면, 이 순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자기 존재의 불편함을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하며 넘어서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쯤은 찾아올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옥죄며 단단히 묶어놓고, 어떤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살아왔기에 완전하지 못했던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하게 세상으로 보게 했던 기억에, 지금 그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결국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에 몸부림칠 때.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만 같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는 말과 기억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글이 더 충격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다들 비슷하게 경험하는 어떤 감정과 충격들일 텐데, 그 비슷한 경험과 영향에서도 비슷하지 않게 드러내는 방식들. 누구는 해냈고 누구는 해내지 못한 채로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차이를, 그녀는 이렇게 통과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뿌리를 수치스러워했던 기억에서 벗어났다. '나는 기어코 이렇게 쓰고 말았어.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이제 벗어날 수 있어서 홀가분해.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 You win!

 

전작들에서와 다르지 않은 그녀의 쓰기 방식이 가슴에 파고든다. 『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절절함을 목 놓아 우는 것처럼 기록해내더니,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들추며 비루하며 수치스러웠던 솔직한 기억을 폭발시키는 듯하다. 그녀다운 글쓰기 방식이 혹시 언제 변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방식을 끝까지 고수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일기처럼, 기록처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느낌을 얻고 싶어서다. 아무리 솔직해도,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이렇게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부족한 우리들일 테니까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번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는 게, 아직은 그녀의 작품을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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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과 얼마전에 이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었는데 구단씨 님은 벌써 읽고 이렇게 근사한 리뷰를 쓰셨네요. 역시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 좋아요.
:)

구단씨 2019-05-30 14:29   좋아요 0 | URL
<세월>과 <사진의 용도>는 읽는 중이라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은 좋아하는 글이거든요.
이번 <부끄러움> 역시 짧은 문장 읽으면서 숨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더라고요.
이제까지 읽은 그녀의 글 중 가장 있는 그대로, 솔직한 문장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레삭매냐 2019-05-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
이더라구요.

구판으로 도서관에서 한 번 봐야겠네요.

구단씨 2019-05-30 15:5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기존 출간작을 몰랐어요.
번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만나는 데는 구판 신판 구분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