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 기차를 타려고 여행 가방을 꾸리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걸 넣었다가 저걸 뺐다가. 필요한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줄이고 줄여도 캐리어 하나가 꽉 찼다. 여름이라 옷도 가벼울 것이고, 겨우 열흘인 데다가 동생네 집에 가는 것이라 따로 숙박에 필요한 게 필요 없는 데도 이랬다. 사실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계획하고 돌아다니는 게 귀찮아서 웬만해서는 여행이란 단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점점 그 귀차니즘을 떨치게 하는 감정이 생겼다. 이제야 어딜 좀 돌아다닐 시간이 생긴 엄마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가족의 마음이, 같이 어딘가로 갈 계획을 세우고 얼굴 보고 만나는 일을 많아지게 한다. 몸은 귀찮고 힘들지만, 함께하는 시간과 어딘가로 향하는 마음은 귀찮음과는 다른 뭔가가 꽉 채워지게 한다.

 

아마 이 자매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세계여행을 즐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여기서 뭔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 항상 갈증이 나듯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세계여행이라는 꿈, 더 넓은 세계의 여러 곳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바람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스물다섯, 서른 살의 자매는 떠났다. 24개국 52개의 도시를 누비는 모습이 활자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걷고, 보고, 느끼는 그대로 사진과 문장에 담겼다.

 

역시, 하고 싶던 일을 한다는 건 너무너무 행복한 일이다. 여행을 할수록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가고, 그만큼 새로운 리스트가 생겨난다. 세계로 한발씩 나아갈수록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내가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들을 만들고 있었다. (85페이지, 프라하)

 

여행이란 혼자 하는 것도 힘들지만, 마음 맞는 이와 함께하는 건 더욱더 어렵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께 살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더군다나 집 떠나면 마주치게 될 온갖 일들이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할 텐데, 일행에게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일정의 변경에 일행의 눈치도 봐야 한다. 내 맘대로 결정하고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자매의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같이 준비하고 같이 떠나는 것까지는 좋았다. 세계를 누비는 상상에 많이 설레며 여행 준비를 했을 것이다. 첫 챕터로 넣은 '떠나기로 하다'를 읽다 보면 그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떠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읽으면서 같이 두근거렸다. '아, 역시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행복해!' 하면서. ^^ 이 자매의 여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행복은 조금씩 사그라진다. 낯선 곳을 향하는 마음의 불안과 계획대로 되지 않은 순간들의 당황과 일정을 수정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염려 때문에 무슨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자매의 계획대로 계속 나아가며 도착한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런 불안과 걱정쯤은 넣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부딪히면 어떻게든 가능해지는구나 싶은 이상한 긍정 마인드가 생기니까 말이다.

 

 

자매의 여행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세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는 한 번쯤 꾸어보는 꿈이지만, 노트에 한 번쯤 적어보기도 하지만, 거기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머릿속과 적어놓은 노트 밖으로 쉽게 튀어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부러웠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거나 멍석을 깔아주어도 선뜻 그 여행길에 오르기를 주저하게 되겠지만, 스스로 마음먹고 준비하면서 세상에 부딪히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이 혹시 꿈은 아닐까 싶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만큼 이들의 여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질투였을까? '이거 실화냐?' 싶은 느낌말이다. 아마 조금 더 격하게 부러웠다면, 부러움이 아니라 질투라는 감정이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 긴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걸 가능하다고 보여준 자매의 모습도 눈에 담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부딪히면서 다시 감정 추스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여행이 주는 성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려와 양보가 생기는 모습이 괜히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이 경험을 함께하면서 자매는 더 돈독해졌으리라.

 

그리고 대부분 사람이 언젠가 이루고 싶은 바람으로만 넣어둔 계획을 실행했다는 게, 책의 뒷부분에 적어놓은 이들의 여행 경비를 보면서도 부러웠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계획이고 금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액을 넘어서서 시간이라는 제약도 이 여행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로 머물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200일이 넘는 기간이라는 시간과 이들이 사용한 금액은 웬만해서는 쉽게 계획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각자가 모아둔 돈으로 여행길에 나섰겠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이 금액으로 다른 일을 더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자매가 그 기간에 걸은 여러 나라와 도시들이 건네준 많은 경험은 가장 부러운 일이 아닐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오직 머릿속에 저장해둔 사람만이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그 경험, 자기만의 인생에 뭔가 굉장하고 단단한 주춧돌이 다져진 느낌.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 위기를 극복하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교통수단과 티켓 사는 방식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다음 나라로 출발하는 것,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버스 시간을 체크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 이렇게 미리 준비하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단축하고 체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행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르기 마련이라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163페이지, 취리히)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야 알찬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 않고 하루를 몽땅 쉬는 데 쓰거나 특별한 일정 없이 시장 안을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새 그 나라에 스며들듯 느리게 여행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바쁘게만 살아온 나에게는 큰 변화이지만, 난 이 변화가 아주 마음에 든다. (281페이지, 쿠스코)

 

여행지에서의 첫날이 아니라, 처음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부터 들려준다. 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준비와 계획으로 이 여행을 더 완벽하게 해냈는지 알 수 있는 시작이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동유럽, 영국, 미국,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자매가 다닌 곳곳에서 마주친 세상의 모습은 앞으로 이 자매가 살아갈 세상의 많은 일에 엄청난 힘이 될 것 같다. 여행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왜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살아가야 하는지 증명하는 것처럼, 자매가 누빈 세계의 풍광들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는 다른 크기의 두근거림이었다. 어떤 사진들은 마치 그려놓은 것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적이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상상하지 못한 곳이, 아직 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구나 싶어서 슬퍼지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 슬픔을 없애려고 세상의 곳곳을 찾아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 속에 담긴 사진을 보면서 여행의 이유와 필요성을 하나 더 찾았다. 특히 저자의 취미인 카페 투어는 여행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는데, 가는 곳곳마다 카페의 분위기와 커피는 아마 저자의 또 다른 보물 1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행 준비부터 여행을 떠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거의 400여 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방문한 나라와 도시에서 실수하기 쉬운 여행 팁과 조금 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행 루트, 교통과 비용까지 해서 마지막 장에 잘 정리해두었다. 나도 처음 듣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나라로 떠나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특징을 이해하는 내용이 될 것 같다.

 

 

넓은 세상으로 당차게 나아가는,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의 끝에는 자기만의 세상을 하나 만들었을 이야기다. 부러움마저 즐거워지는 여행기다.

 

문득 이 감사함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야만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떠나온 지금은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찬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좋다. (139페이지, 차브타트)

 

세계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자 나를 둘러싼 외부적인 요인은 여전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하는 내부적인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한 변화가 있다. 엄마가 요리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따뜻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으로 변화된 것이다. (4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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