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공제控除의 비망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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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은밀한 사귐의 시간이다.

알듯 모를듯 서로의 마음에 닿지 못해 애달퍼 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확 끌어당김의 쾌락을 맛보기도 하는 밀당의 시간.

책 밖에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세워놓는 매정한 '주름'의 시간도 있다. 인연이 아니면 그만 두면 될 일이건만 구애의 시간은 고통 조차 추억할 사건으로 만든다.   

 

김영민의 <봄날은 간다>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책 밖에서 그의 기척을 탐지하기 위해 온 몸의 촉수를 뻗쳐들고 있어야만 했다.

무수한 산책길에 동행하면서 그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불화'하면서 '이드거니' 스며드는지 눈 똑바로 뜨고 하나 하나 지켜보고 더러 더러 따라해 보기도 했다.  

그가  찔레꽃을 들여다보면 나또한 찔레꽃을 들여다보고, 걷기를 통해 만나는 우연이  불가능한 내 동네를 한탄했다. 그러는 동안 깨닫는다. 산이 아니라고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걷지 않는 내가 문제다. '해넘을녘'의 강가의 는개를 볼 수 없다고 해도 세상 모든 곳에 황혼은 존재한다.  

이렇듯 순간에 집중하려는 나의 노력은, 그러나 휘딱 부는 바람한점에 흔들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의 책 마디마디마다 끼어있는 숱한 이론(혹은 철학)의 역습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구애자를 한방에 훅 보내버릴 만큼 막강한 제 삼자(들)다.  

듣다보다 처음인 우리말도 얄미운 방해꾼이고 일상적 말이 한자말로 떡하니 세워지니 독자는 그 또한 어려운 사람 앞에 선 아이나 촌사람이 된 것 같다. 참 어려운 상대다. 

 

그동안 읽었던 저자의 책들이 이 책과 다를 것 없었다. 그런데도 이 책에 대해 급한 마음이 든 건 이 책이 그 중 가장 개인적인 글들이기 때문이다. 철학가이기 전의 생활인으로서의 그를 엿볼 수 있는 기회. 전주와 밀양에서 산책하며, 가르치며, 만나며 궁글린 그의 생각들이 푸짐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가가기 힘든 것은 그만큼 여기 실린 글들이 짧은 만큼 여백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백은 많고 내면은 거울 같다.  여백은 독자의 자발적인 이해와 고찰, 생각으로 채워져야 하는 공간이다.  

 

간신히 한 발 다가가면 슬쩍 나 앉는데 그게 저만치다. 갈테면 가라지 하고 돌아서고 싶은 마음인데, 사랑은 그럴수록 힘이 더 세진다. 그러니 때로는 꼭 그에게 가고 말리라는 심정으로 여백을 채워가기도 했다.  그렇게 놓아주지 않는 것이 <봄날은 간다>의 매력이고 저자의 힘이다.

미처 알아듣지 못해 민망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이런 멋진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 내 공부에 절망했다.

 

책 한 권이 나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시한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다만 한 권에 대한 독서가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에 '주름'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저자가 사랑하는 찔레꽃이 내 주변에도 피기 시작했다. 나 또한 특별히 아끼는 꽃이다. 그는 꽃에서, 은행나무에서 신을 보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 꽃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시대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면서 사는 것, 알면서 모른체 하기의 진경을 나는 아직도 가늠할 수 없어서 저자의 책 밖에서 서성대는 외로운 혹은 애처로운 구애자다. 스승이 너무 커서 올려다보다가 목이 꺾이게 생긴 늦되다 못해 될 성싶지 않은 제자마냥, 그또한 과분하니 '독애'하는 저자에 대한 독자의 짝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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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 2012-05-1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속에 녹아 있는 수수꽃다리님의 감성을 읽어내고 공감하며 기뻐하는 사람,
때론 문득문득 느껴지는 치열한 좌절에 마음이 아린 사람,
자학하지 못하게 옆에서 응원하고 싶은 사람,
수수꽃다리님에게도 열혈독자가 있다는 걸 잊지마시길......
아! 담백한 생각과 섬세한 표현! 멋지고도 다정한 그것을 느낄 수 있어
열혈독자는 행복합니다

수수꽃다리 2012-05-2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운영님!
콩꽃은 활짝 피지 않고 꼬투리를 낳으며 서서히 시들어가네요. 우리집 베란다에 아이 과제로 심은 강낭콩을 들여다 봅니다. 생산을 위한 꽃은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피는가 봅니다.
열혈독자가 있다는 사실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하고 근심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자운영님의 서재에도 놀러가서 자운영님 글을 볼 수 있다면~~~~부디, 꼬~옥!!!
 
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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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을 다시 읽었다.

 

<월든>을 읽었지만 소로우를 비로소 만난 것이 즐겁다.

누가 누가 읽었더라는, 누구의 서재에 이 책이 있더라는 말에 기대지 않고도 이제 이 책은 나의 책에 꽂아둘 수 있어서 기쁘다.

 

소로우가 전하는 메세지는 간소하게다.

옷도 가구도 집도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사는 것이 간소한 삶의 본질이다.

남에게 맡기지 않고 그가 지은 그의 오두막은 비를 피하는 나무 그늘이거나 인디언의 천막이다.

문앞까지 자연을 끌어다놓고 사는 삶 속에서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 수 있음을 실험하고 성공한다.

 

<공자> <맹자>가 대표하는 동양의 고전, 서양의 <그리스로마신화>, 인도, 인디언의 삶까지 소로우가 닿아있는 지적 깊이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밑줄 그을 데가 많아서 옮겨적다가 말았다는 것.

그만큼 <월든>은 알뜰하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번역을 하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월든>은 네 권의 책이 한 권에 들어있다.

모험기, 자연을 묘사한 에세이, 풍자서, 자서전인데, 그만큼 <월든>은 내면이 풍요롭다. 그 말은 읽지 않고 보기만 하거나 풍문으로 들어서는 결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다.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그가 느끼고 겪은 체험을 묘사한 글은 그의 말대로 '선택된 말'(고전, 좋은 책)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가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의 싸움을 묘사한 글은  한편의 스펙타클한 영화를 본 것 처럼 흥미진진했다. 그의 글은 때로는 유머가 넘치고,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더러는 비유와 풍자로 독자를 골치아프게도 하지만 인간이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소로우처럼 숲 속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다.

내가 사는 곳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월든>을 읽으면서 도시에 사는 우리가 자연에서 멀리 떠나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도시에 살지만 자연에 가까운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채우기 위해 소비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아까운 시간,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단지 채우기 위해 소비되고 낭비되는 것이다.

 

오늘도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남들이 읽는다고 덩달아 사들인 탓이다.

내가 눈을 돌려야하는 것은 세상 밖이 아니다. 그곳은 온통 나에게 자기를 가져달라고하는 곳이다.

소로우가  전하는 말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 속에 여태껏 발견못하던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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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꼭 읽으라며 <월든>을 쥐어주셨는데 이년 전에 받은 걸 아직도 안 읽고 있답니다.
호기심에 첫 페이지를 펼쳤다가 기겁을 하고는 놔두었던 게 기억이 나요.
너무 어렵습니다...

수수꽃다리 2012-05-0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진씨에게 <월든>을 건네신 어머니가 궁금해지는군요^^ 읽은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지의식?!
기겁할만한 첫 페이지가 맞아요.
저도 역시!
언젠가 만날 때가 있겠지요.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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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문명의 시대가 어디에서 갈라지는 지 잘 알지 못한다. 적어도 알래스카 선주민들은 신화의 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할 뿐이다.

 

인간위주의 시대가 문명 시대라면 신화의 시대에는 모든 것의 시대였다. 바람과 돌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던 시대에 인간은 그 모든 것의 일부분이었다. 문명은 오래된 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들어섰다. 힘에 밀린 신화 시대 사람들은 이 책속의 밥 샘의 처지가 되었다. 백인(문명인)의 옷을 입고 가죽 구두를 신고 린치를 당하지만 끝내 그들 세계로 진입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사라지는 것이 신화 시대의 운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알래스카에 살고 있는 신화의 시대를 취재한다. 큰까마귀 신화로 묶인 알래스카 원주민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알래스카 선주민의 먼 조상이 아시아에서 건너간 인류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현존 하는 원로들이 사망하면 끝날 것 같다. 신화의 시대는 입에서입으로 전해지는 시대다. 시간을 이어주던 원로들이 세상을 뜨면 그 시대는 막을 내린다.

자연을 파괴하고 시간을 파헤쳐 욕을 보이는 문명이 야속하지만 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다. 더 좋아지든 더 나빠지든 시대는 가고 오는 것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신화의 시대가 완전히 사라지면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우주의 시대에 진입했다고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지금 우리 보다 우주를 훨씬 강하게 의식하지 않았을까?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깊이 맺어진 신화적 차원에서 말이야.” (169쪽)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구분이었다. 큰까마귀의 신화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겪어온 사람들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들의 토템도 밥 샘의 말처럼 20년 안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사라짐을 바라 보는 것이 현재다. 다만 신화의 시대, 즉 영혼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에 눌려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서글프다.

밥 샘과 저자가 주노 대빙원에서 오로라를 보면서 나눈 대화.

 

 

“어떤 시대가 올까.......”

“그러게 말이야......어떤 시대가 오려나?” (176쪽)

 

 

빙하와 고래, 곰과 어둠, 큰까마귀 전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곳이 알래스카다.

저자의 표현은 영혼의 세계를 경험하거나 지켜본 사람의 깊이가 있다. 함께 실린 사진 속 알래스카의 이끼긴 원시림에 오래 눈길이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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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 2012-04-26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한 기회에 수수꽃다리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쩜 글을 이토록 잘 읽고, 글을 맛있게 잘 쓰시는지 부럽고 샘이 나네요. 앞으로도 수수꽃다리님의 울림이 있는 글들 잔뜩!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수꽃다리 2012-04-26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운영님!
혹시 이 댓글을 보실까요?
제가 이런 감사의 말을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알라딘에서 책을 사고 읽고 짧게라도 메모라도 할 요량으로 적기 시작한 책읽기 였어요.
그동안 많은 독서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턱없이 모자라는 제 글에 심한 좌절을 하였습니다.
그만 나갈까도 생각하던 중이었지요. 그래도 내가 산 날들의 흔적인데 용기를 못내고 미적대고 있었지요. 그랬어요. 그러던 중에 자운영님께서 적어주신 응원의 말씀이 가뭄 끝 단비처럼 달고 맛있어서 잠시 취해있고 싶을 정도입니다.
얼떨떨해서 이게 뭔일인지^^
봄날이 간다고 안달나 있었는데, 자운영님 덕분에 저의 봄날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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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인생 -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우석훈의 액션大로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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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자 나이 마흔은 청바지를 입고 싶으나 비어져나오는 뱃살을 감당 못해 태가 안나는 나이일까. 조국은 전생에 나라를 몇 개나 구했길래 얼굴 되지, 몸매 되지, 게다가 머리에 든 것까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중년은 남자들의 로망일까.

우석훈의 1인분 인생은 마흔에 들어선 남자 우석훈의 이야기다. 그가 키우는 고양이 야옹구에 대한 이야기며 활동가 출신 태권도 유단자 부인에 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이야기다. 우석훈 1인의 인생.

우석훈을 알고 싶다면 퍽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여성이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과 같이 듣고, 전형적인 가정주부에다 남편은 가부장적인 사람과 사는 나한테 사실 이 책이 그닥 소용이 있지는 않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사는 마흔 이후의 남성이란다.

남성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와 어떤 얘기를 나누고 공감할까 궁금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뾰로통하니 고개를 외로 꼬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분통터져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들은 남자 여자 따로 놓고 볼 일이 아니니 말이다. 책을 다 읽을 즈음에 가서야 나는 이게 그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이유를 알았다.

 

김규항의 글들이 시대를 개탄하면서도 그 잘못을 지식인에게 묻는 것에 내가 큰 소외감을 느꼈다면 우석훈의 화는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내가 지식인이 아닌 그냥 아줌마라고 지금 이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에 성을 내는 걸 우습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모이면 “이게 다 MB탓이야” 소리 높여 욕을 한다. 거기에 무슨 지식인이니, 성찰이니 뭐 그런 고민 같은 것은 없다. 상대가 분명하다. 그런데 우석훈도 그런다는 것. 눈높이를 낮춘 건지, 워낙 개인적인 글쓰기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게 편하게 읽힌 이유다.

게다가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의 중심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나같은 아줌마와 같은 피로감을 느끼고 말을 하니 나, 잠깐 위로까지 받은 것 같다.

교육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에 나는 동의한다. 공교육을 강화시켜야 함에도 교육을 이 난장판으로 만든 것에 좋아 죽는 것은 사교육 뿐이라는 지적도 맞지 싶다.

세상 일에서 한 발 물러나는 것 같은 분위기지만 그가 훌륭하게 1인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는 진중권의 책을 화장실에서 읽었다는데, 나 또한 그의 책을 다 읽기 전까지 손에서 뗄 수가 없었기에 화장실 갈 때도 가져갔음을 고백한다. 그 때 내 식탁 위에는 몇 권의 책이 뒹굴었지만 내가 우석훈의 책을 늘 들고 간 것은 메모하면서 읽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남자하고 술 대신 향기 좋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이 책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든 생각이다. 아줌마로 사는 나는 남편 말고 이렇게 수다떨 남자가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쫌 아는 사람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면 그만큼 시원한 속풀이가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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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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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이 아저씨, 순옥이 언니, 매표소 여자, 도우미 아줌마, 그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함이라면 이들은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독자는 이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위로 받는다.

<세상 끝의 신발>에 등장하는 낙천이 아저씨는 소년병 동료를 위해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동료의 딸에게는 겨울 눈밭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새끼줄을 감아준다. 따뜻하고 인정 많은 심성을 가졌다. 낙천이 아저씨 덕에 목숨을 구한 아버지는 그와 친구가 되어 의지가 되고 그의 딸 순옥이 언니는 주인공 화자에게는 친정 언니 역할을 한다.

삶이 공평한가 의문을 갖게 하듯이 마음 착하고 예쁜 순옥이 언니는 결혼해서 힘들게 사는 데 착한 그녀는 결국 버림받고 힘든 생활 끝에 퇴행성 치매를 앓게 된다.

착한 사람 낙천이 아저씨와 착한 언니 순옥이 겪는 불행은 그들이 착한 사람이라서 더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혼자 만의 삶에 갇힌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발레리나의 인터뷰 기사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화자는 자신의 삶이 20년 후에도 똑같이 닫힌 방안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세상 속으로 사람과 소통하면서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어두워진 후에>에 등장하는 매표소 여자는 떠돌이 남자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거리도 두지 않은 채 그를 위해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아갈 차비를 준다. 반신 불구가 된 엄마를 챙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혹은 그녀의 마음에 위로 받은 그 남자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이유없이 살해된 가족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던 그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남자다. 포기 직전의 삶에서 여자를 만나고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역시 이유없이 사람을 돕는 여자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모르는 여인들>의 도우미 아줌마는 채의 부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화도 내지 않고 채의 아내의 요구 보다 더 많은 것을 해 놓는다. 채의 아내는 그 도우미에게 마음을 열고, 도우미 아줌마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해 간다. 두 여자가 주고 받는 메모는 만날 수 없는 그녀들이 주고 받는 속깊은 대화다. 그녀들의 대화와 채의 아내가 병 때문에 사라지는 행위는 채의 이십년 전 애인이었던 나의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떨어뜨린다.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가던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모르는 여인이었던 그녀들이 말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혹은 원래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낙천이 아저씨나 순옥 언니, 매표소 여자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사이에 있어야 하는 인정이다. 나와 너인 것을 그들은 구분하지 않는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것,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인정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발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숨막히다가 결국 기형이 되는 맨발을 돌보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신발 속의 맨발을 돌보지 않아서 발레리나의 맨발은 기형이 되었듯이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착한 부인은 외계인 손 증후군에 걸렸다.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가 안타까운 것은 그녀처럼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한 채 상처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상대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화분이 있는 마당>의 주인공을 보면서 언어 장애와 섭식 장애 즉 말하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르는 여인들>의 채는 이십 년 전 애인이 도망친 이유를 이십 년간 모른 채 살면서 지금 다시 아내가 도망친 이유를 몰라 이십 년 애인을 찾아와 묻는 일이 생긴다. 긴 세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한 사람의 현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만남에도 예의가 있는 것 처럼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다. 갑작스러움은 그 순간 단절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죽음이 되었든 말없는 사라짐이 되었든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과제를 남기는 것이 갑작스러운 단절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의 창, <숨어 있는 눈>의 A, <성문 앞 보리수>의 수미(그녀는 억척스럽게 살았고 소원이던 내 집을 장만하던 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남은 남편은 어떻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해소할까), 갑작스럽게 떠난 경은 갑작스럽게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병으로 죽었거나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닌 자기의 의지로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A의 남편, 경과 수미를 보는 S, 수미의 남편은 오랜 시간을 물음표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화분..>의 주인공은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지경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아내는 생각지도 않은 이혼을 요구한다.

무엇이 이렇듯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하게 했을까. 소통이 되지 않아서 일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했을까?

더러는 단절의 원인을 알았으나 회복하기에 늦은 경우도 있다.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남편은 죽음 직전에야 아내의 외로움을 알아챈다. 아내가 외계인손증후군에 걸릴 만큼 자신과 단절된 슬픔으로 고통 받았음을 늦게야 깨닫는다. 착한 아내였다. 어쩌면 소통이 단절된 사람들에게 작가는 그를 통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들도 이렇게 죽음 직전에 가서야 알 것인가. 아니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서 그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특히 이 작품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자각하는 순간을 그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누워있는 그가 구조되면 그가 그 관계를 회복할 것 같은데, 어둠은 찾아오고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그 남자 처럼 지금 풀숲에 누워 있는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다. 소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할 시간 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폭력이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느닷없는 이별 통보나 일방적인 연락 단절을 선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남겨짐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역할이 있다면 상대도 해야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겠지만 피하는 것 보다는 그 죽음 조차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이 지점 또한 선택의 문제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든가, 함께 죽음을 지켜보든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은 우연한 친절만으로도 해결된다. 사람이 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는 것이 우리 삶이다.

죽은 사람한테 조차 위로 받는 것이 우리들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주인공이 죽은 여인을 통해 위로 받고 치유를 받는 장면은 관계에서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소품 혹은 매개가 신경숙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것, 즉 먹는 것과 말하는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돈, 혹은 멋진 외모, 아니면 든든한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정성들여 차린 밥상과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먹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로울 수 있다.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말을 들어 주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가 잘 보여준다. 어쩌면 말을 들어주는 일이 중요한 만큼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가 ..>에서는 아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다루지만 <모르는 여인들>에서 채는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지만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들어주는 것과 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소통이 되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 져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남편에게만 자신의 맨발을 보여준다는 발레리나는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화자가 순옥과 자신이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수 없다는 것과 발레리나가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거라는 말의 대비를 오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깐 보이고 마는 무대에서 본인이 아닌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로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그 모습 그대로(구부러진 맨발을 보이며)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주인공 화자는 후자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들추어보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내 감정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지 들여다 보는 일이 썩 재미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받아들이는 일, 가령 내가 이런 소설을 읽었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는 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고,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 이런 반응이 가능한 소설이 나한테는 좋은 소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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