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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와 오복이 ㅣ 큰곰자리 37
김중미 지음, 한지선 그림 / 책읽는곰 / 2018년 1월
평점 :
어떤 작가 군의 말(작품)은 문학의 재미(예술의 자율성)에 앞서 주장(정치적 올바름)에 집중을 하게 된다. 내게는 김남중, 진형민, 이병승 그리고 김중미가 그렇다. 이들은 자본이 갈라 치는 계급의 위계가 어른들만의 일이 아님을 인식하고 폭력적 자본의 재배치 가능성을 작품의 의제로 삼으려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김중미가 이번 이야기에서 목격하고 전달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에 의해 배제된 자들의 실재적 상황이다. 행운이네 가족과 오복이네, 기수와 익수는 자국 내 난민과 같은 존재들이다. 거주지는 불안하고 직업은 불안정하며 현실로부터의 탈출 가능성도 당분간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황을 직면하는 우직함이 김중미다움이고 자본이 낳은 거의 모든 폐해가 나열된다는 점에서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함께 살기(연대) 가능성은 힘껏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젝의 말처럼 ‘이런 연대가 유토피아일 수 있으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패배할 것이고, 패배함이 마땅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행위다.
김중미가 믿고 의지하는 인간의 선함과 그 선함을 구체적 행위로 이끌어가는 행운이와 행운이 아버지 같은 존재는 종교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 사회가 기대하는 메시아적 존재일 것이다. 생존 가능 여부가 위태로운 상황까지 내려간 오복이와 기수, 익수가 계몽되는 듯 보이지만 ‘차복이 설화’가 전달하려는 상징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누군가의 ‘복’으로 오늘을 산다는 이 오랜 전통은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다는 것이 사람 人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상에서 일방적인 베품은 없다. 행운이와 오복이의 관계가 그렇고 행운이 아버지와 기수, 익수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나눔과 연대가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기대에 불과하다고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지만 우리는 선택하는 주체들이다. 선택하고 행동하고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시급하고 일단 가 봐야 아는 과정이다.
행운이와 오복이, 익수와 기수, 행운이 아버지가 대신하는 우리 사회의 난민적 존재들이 함께 계획하는 여름휴가가 기대된다면 김중미의 선택은 옳은 것이다. 실현가능성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지향점이 될 가능성이다. 싸워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차복)에 의지하거나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 또한 가능성이다. 그가 말을 바꿔가면서까지 차복이 설화를 두 번씩이나 인용한 이유를 귀 기울여 들어야하지 않겠나.
김중미가 제시하는 이 소박한 연대가 제국이 된 자본에게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계란 던지기라도 어쩔 수 없다. 하지 않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장 평범한 우리는 사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고 있다.
아쉬움은 있다. 어른과 아이들의 삶이 다르지 않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문제가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된다는 인식에 동의한다. 그러나 과잉이 통쾌의 감정을 분산시키는 것을 막지 못 했다는 게 아쉽다. 소박한 연대가 즐겁지만 남은 문제가 너무 많아서 이 잠깐의 행복이 지속 가능한 것인가 불안한 것이다.
낭만에 가까운 동화적 상상에 머문 것은 이 작품의 정체가 동화이기에 피치 못 한 선택인지, 아니면 이 소박한 선함을 계급투쟁의 동력으로 확신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둘 다 여도 무방하지만 전자는 익숙하고 후자는 낯설다. 김중미가 작가의 말을 통해 하는 말은 분명하다. 선함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의 선언을 믿지만 아무래도 과정이 너무 유연한 것이 걸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