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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 예술가의 육필 편지 49편, 노천명 시인에서 백남준 아티스트까지
강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2월
평점 :
편지를 받고 싶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 어느날 문득 "당신 생각이 났어요" 라는 짧은 문구가 적힌 편지라면 한참동안 두근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감동적인 시를 한 편 읽고 "당신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어요" 라며 시 한 편을 적어보내는 편지에는 답시를 보내기 위해 몇 날 밤을 끙끙댈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사람을 오랫동안 생각할 것이다.
아래의 작가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보낸 년도도 다르고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도 제각각 다른 49편의 편지들 속에서 우연히 서로가 연결이 되는 편지를 발견했다. 릴레이처럼 꼬리를 물고 보내는 편지들을 보면서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릴레이 편지가 계속 돌고 돌다면 그 중 한 사람 쯤은 나도 아는 사람이 나올수도 있을테고, 그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나는 그 편지를 오랫동안 혼자만 간직했다가 몇 십 년이나 지난 호호할머니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자랑처럼 친구들에게 보여줘야지 , 라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아동문학가 정채봉이 소설가 정연희에게 보내는 편지>
선생님께서 글을 주실 줄은 실로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늘 원고청탁을 드렸다가 번번히 다음으로 미룸을 받았었으니까요. 선생님의 데뷔작이었던가요? 수녀님이 등장하는 그 단편을 고등학생 시절에 읽고 나도 나중에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하고 앓은 적도 있었지요. 그때 본 선생님의 모습도 굉장히 이뻤어요...(중략) 1987.9
<정연희 선생이 김영태 시인에게>
보내주신 <섬 사이에 섬> 감사합니다. 신문에서 광고를 만났을 때, 혹시나......했었는데. 쉰여섯 중 하나 된 것이 역시 반가웠습니다. 한마디도 언급을 안 하신 일이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김영태 시인이 늘 따로 감춰진 지역처럼 느껴지는 분입니다. 도오하의 나라 같던 그 집 대문 안 풍경도 이따금 떠오르고요. 보일락 말락 하다는 것은 보고 싶게 만드는 일이어서, 내게도 김 시인은 정말 보일락 말락 한 분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습니다. 새해가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지니고 계신 모든 것이 새롭게 비춰지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982. 12
<김영태 시인이 최정희 선생에게>
아무 일도 못하고 한 해를 보냅니다. 저는 복생이를 사랑하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가다 시를 쓰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아란이, 완석이, 채원이, 동일이, 조성각 형, 이경회, 서말지를 만나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차를 마시는 재주와 설렁탕을 먹는 특기밖에, 그것밖에 없습니다. 1965.12
최근에 고등학교 동창과 연락이 닿았다. 30분 거리의 지척에 살면서도 내 소식을 몰랐던 친구는 가게 이름만 전해듣고 114에 문의를 해서 내 연락처를 알았고 가게 전화로 전화가 왔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후 퇴근길에 한 시간 가량 수다를 떨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고등학교때 좋아했던 남자들로 넘어갔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었고 자기 역시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야, 나는 기억도 안 나. 니가 누군가를 좋아했었더랬어?"
"그럼.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해서 오랜간 마음에 담아뒀었지. 난 그 선배 앞에선 두근거려서 말도 제대로 못했었어. 내가 결혼하고 몇 년 전에 선배랑 여럿이 우리 집에 놀러왔었거든? 그때서야 내가 고백을 했다니까는. 이제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어서인지 편하게 말이 나오더라. 더이상 두근거리지도 않고 말야. 고등학교때부터 오랫동안 선배를 좋아했었어요~~이렇게 말야. ㅋㅋㅋ"
"어므나...난 왜 몰랐지? 그 선배는..그러니까..대학교때 찐~한 연애를 했었는데? 나하고 같은 학교였으니까 내가 잘 알지. 같은 동아리 여자애하고 오래 연애를 했었는데 말야, 물론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했지만..어므나...그럼 그 선배가 연애하는 동안 너, 마음고생 좀 했겠다? 와아~ㅋㅋㅋ"
"ㅋㅋㅋㅋ 그러게나 말야. 암튼, 우리 둘이 고등학교 때 누구 좋아하고 이런거 고백한 거, 누구랑 싸우고 삐졌던 거, 화해했던 거, 이런게 죄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편지 뭉치 속에 고스란히 적혀있다니까. 그러니 네 기억에는 없어도 '사실'인거지. 담에 우리 집에 놀러오면 내가 '증거'를 보여주도록 할께."
신기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만, 열여덟, 열아홉 시절의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편지를 누군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나를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그때의 우정을 가끔씩 떠올린다는 말이기도 한 듯해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는 조만간 친구네 집에 들러서 내 기억 속의 '사실'과 실지의 '증거'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다. 물론 내가 갖고 있는 편지도 들고가서 친구에게 보여줄 것이다. 서로 옛이야기를 꽃피우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밤을 지새울 것이다.
시인들은, 작가들은, 특히나 글쓰기가 생의 한 의미인 사람들이다. 그 비율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비율이 최대치가 되기를 저마다 바라지 않겠나 싶다. 시는, 글은, 타인에게 읽혀지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서 하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시를 지을 때,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할 테니까. 그런 그들에게 '편지'는 또 어떤 의미일까. 작품을 만드는 과정의 지난함과 고단함을, 가까운 가족보다도 더 잘 이해해주는 마음의 벗 같은 존재에게 쓰는 편지는 얼마나 절실하고 또 황홀할까. 또 그들에게 받는 편지는 얼마나 위안일까.
이 책은 강인숙 씨가 영인문학관을 건립하면서 다양한 루트로 작가, 시인, 아동문학가, 화가 등 그들의 비밀스러운 '편지'를 모은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들의 생생한 필체까지 엿볼 수 있어서 그들의 작품 못지 않은 기쁨을 읽는 내도록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이 말처럼 말이다.
“편지는 수신인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런 문학이다. 그것은 혼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