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이사 당일 날 결국 노약자인 엄마와 비리비리한 언니, 둘이서 이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이사 당일 아파트 옥상 물탱크 정비 공사를 했고, 하필이면 공사차가 정차해놓고 공사를 하는 장소가 우리가 살던 아파트 바로 밑이었다. 결국 크레인도 무용지물이 되었고 커다랗고 무거운 돌침대부터 시작해서 모든 짐들을 죄다 이고 지고 끌어서 엘리베이트를 타고 내려와야했다. 게다가 짐조차 이삿짐센터를 부르기 애매한 짐이어서 아는 사람들, 친척들이 와서 많이들 도와주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 퇴근을 하면서 자전거를 탔다. 이제 집이 가까워져서 자전거로 오 분이면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다. 바람을 느끼며 상쾌하게 자전거를 타고 물분수대도 지나고 신호등도 지나쳐서 집 근처에 도착하니 멀리서부터 환한 불빛이 나를 반긴다. 이웃분 여럿이서 우리 집 근처에 서성이는 게 보인다. "저 집, 그동안 공사하더니 오늘 이사 들어오나보네. 저기 저게 쇼파고, 저거는 식탁이네. 음..쇼파는 악어가죽처럼 보이는데 말야..그리고 말이지.."    헉..아직 커튼을 달지 못했기에 밖에서 집 안이 죄다 보이고 사람이 뭐하고 있는지까지도 보인다. 나도 지나가는 사람인양 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집 안을 잠시 살펴봤다. 엄마는 풍채로는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마나님으로 보였고,  입은 행색으로는 대궐집에 식모로 보였다. - -; 

자전거를 끌고 새로운 주차장에 갖다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봤다. 곳곳에 돈을 처발라놨다, 는 컴퓨터 사장님 말씀처럼 구석구석이 낯설다. 낯선 집에 잠시 구경 온 사람처럼 엉거주춤 거실에 있다가 내 방에 들어가보고 서재에도 들어가보고 구경을 하고 있으니 때르릉, 전화가 온다. 컴퓨터 사장님이다. 최종정산을 위한 모임을 하자며 부르신다. 

물주 언니와 중개 역할인 컴퓨터 사장님, 공사총감독인 철이 오빠, 나 이렇게 4명이서 컴퓨터 사장님 사무실에 갔다. 서로 흉허물없이 지낸 지 오래된 사이여서 금방 속이야기들이 나왔고 최종정산에 대한 건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결정되었다. 그리고는 서로 잡다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지기 아쉬워 막창 집을 갔다. 근처 막창집은 개업한 지 한 달이 겨우 지난 새끈한 개업집이었고 음식은 맛있었다. 저녁도 배불리 먹고난 상태였지만 심리적으로 허기가 느껴졌기에 나는 구워지는 족족 먹어치웠다. 어쩌다보니 집게가 내 앞에 놓여있었고 나는 신나게 고기를 구워 사람들 앞앞에 놓아주었다. ㅎ 나이 들어 발견하는 나의 대견한 모습.ㅋ 

술이 들어가면서 컴퓨터 사장님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졌고 철이 오빠가 공사하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넉 달간이나 공사를 했지만 심리적으로 한 달도 안 지난 느낌이라며 너무 즐겁게 공사를 했다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오바되는 공사금액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다들 많았을텐데 서로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하하호호 웃으며 공사를 진행했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예쁘게 하는 모습들이 기특해서 막내인 내가 고기를 더 열씨미 구웠다.     

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보니 뭐가 좀 이상하다. 그릇도 안 보이고 화장실에 수건들도 안 보인다. 아직 정리를 덜 했나? 싶었더니 어이쿠야..이삿짐을 부려놓고 집안으로 들이는 그 잠깐의 사이에, 이름모를 누군가가 꿀꺽! 얌냠! 하셨단다. 남 쓰던 그릇이며 수건을 가져가는 사연은 또 얼마나 기구할까, 생각을 해보다가 다들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사 당일 그런 분실은 액땜이라며 오히려 호재, 라고 생각하잔다. 음..좋아좋아. 

그런데 말이지. 해바라기 샤워기라는 게 있네? 뭘 누르는 거야? 이건가? 아무거나 눌러보자.

꺅...머리가..홀딱 젖었다. 난,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 안에서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녔고 거실에는 아빠가 늦은 저녁을 들고 계셨고, 형부는 지네 집인 2층으로 가지 않고 1층 거실에서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집 밖 맞은편에는 다방 불빛이 환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차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누워 있는 공간이 낯선 곳이 아닌, 최근까지 살던, 오래동안 살던, 같은 대지 위에 지어진 집이라는 걸 인식했다.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고 매일 아침 일어나며 듣던 창 밖의 차소리가 기억 저 편에 숨어져 있다가 튀어나온 것이다. 아. 그렇구나. 나는 1Q84의 아오마메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거로구나. 그렇지만 이전과 꼭같지는 않는,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느낌의 그 자리 그 곳에. 

내 몸은, 정신이 미처 놓치고 있던, 대지의 공간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발이, 매일같이 대지를 밟으며 대지의 감각을 발바닥으로 느끼듯이.  내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어도 그 그윽한 눈길, 그 애틋한 마음을 여전히 절절이 느끼듯이. 대지가, 자신이 품고 있는 인간 하나하나를 사랑하듯이.  

나는 왠지 대지에게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몇 달간 그 공간을 잊었건만, 대지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시 돌아온 나를 기뻐게 맞이해주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아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고, 새 가구들에서 나는 새것 냄새가 바람결에 내 코에 묻혔고, 나는 나를 자신의 품 안에 안아주는 대지 위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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