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보여 줘!
레너드 S. 마커스 엮음, 서남희 옮김 / 책읽는곰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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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과 달리 무엇이든 흡수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생각이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니 아이들에게 오로지 '옳은' 것만 가르친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과학적 이해도 중요하지만 상상력도 북돋워 주어야 해요. 무지개를 보면 빛의 스펙트럼을 아이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도 있어요. 그보다는 그런 현상을 경이로워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 안노 미쓰마사, p.63


이 책은 미국의 그림책 평론가이자 연구자인 저자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21인을 10여 년에 걸쳐 인터뷰하여 엮은 것이다. 퀜틴 블레이크, 존 버닝햄, 에릭 칼, 모리스 센닥을 비롯해 그림책 거장들은 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창작 철학과 작업 과정, 삶과 작업의 접점, 그림책과 어린이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이 이들을 예술가로 자라게 했을까? 무엇이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들은 어디에서 필요한 용기를 얻었을까? 모든 예술 형식 중에서 왜 하필 그림책을 자신의 삶과 열정을 바칠 대상으로 택했을까? 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의 글과 그림을 연결시킨다. 초기 스케치, 색채 실험, 가제본, 창작 노트 등 희귀 도판 80여 점이 수록되어 있어 현대 그림책의 역사를 써온 이들의 생생한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에릭 칼의 인터뷰를 인상깊게 읽었다. 그의 그림책마다 환하게 빛나는 레몬색 태양은 언뜻 보면 유치원 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아이 같은 단순함은 사실 능수능란하게 연출된 것이다. 어린이들이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느끼는 책을 만들기 위해 세심하게 다듬은 다른 모든 요소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에릭 칼의 그림책을 보고, 또 보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의 작업실 풍경을 묘사한 것도 그의 작품 세계와 너무 잘 어울려 재미있었다. 바스락거리고 서걱거리는 소리와, 컴퓨터와 스캐너의 윙윙거리고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는 그의 작업실은 꼼꼼하고 활기찬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다 그만두게 된 계기와 어린이책에 콜라주 기법을 쓰는 이유, 그림을 공부할 때의 과정과 작업방식 등 흥미로운 내용이 아주 많았다. 특히나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장난감, 만질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그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림책에 매혹을 느꼈어요. 일반적인 그림책 독자의 나이를 넘어섰을 때도 말이지요. 스콜라스틱 북 클럽판 <괴물들이 사는 나라> 안에 써 놓은 손 글씨로 보아, 나는 좀 컸을 때 그 책을 받은 게 분명해요. 나는 그런 책의 그림들을 꼼꼼히 연구하곤 했어요. 또한 찰스 슐츠의 연재만화 <피너츠>를 읽던 시절에는 그 그림을 베끼곤 했지요. 신문 연재만화의 등장인물들을 빼곡히 베껴 그린 공책도 있답니다.              - 케빈 헹크스, p.161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유명한 모리스 센닥의 인터뷰도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나는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처음 구입하고 읽었기에, 어른이 되어서 처음 이 책을 보았다.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그림책은 지나치게 어둡고, 무겁게 느껴져서 대체 왜 콜더컷상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가 된 그림책인지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인터뷰를 통해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만드는 과정과 작품에 대한 의도, 그의 어린이 문학에 대한 가치관과 작업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다시 한번 이 그림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작품은 어린 시절에 먼저 보았다면 그 감상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그림책 작가들은 이미 작품으로 접해서 익숙한 작가들도 있었고, 처음 접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이들이 그림책 분야에 분야에 발을 들인 이유 또한 제각각이었는데,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과 그림책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비슷했다. 그래서 그림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너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글을 읽기 전에 그림을 먼저 보면서 이야기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감동을 선물하고, 아이들이 마음껏 웃게 만들며,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준다. 그림책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림의 언어로 열리는 세계는 어른 독자들에게도 위로와 힐링의 시간을 안겨준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상상력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우리를 신나고 부푼 마음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보통 40쪽 안팎의 분량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든 펼쳐볼 수 있다는 것도 그림책이 가진 매력이다. 그림책은 누구나 쉽고,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장르이기에, 그것을 만들어 내는 창작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림책을 좋아하거나,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 놀랍고, 신비로운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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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작별
김화진 외 지음 / 책깃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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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이가 싫지만 좋았다. 보기 싫었지만 보고 싶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애를 좋아했지만 좋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연선이와는 늘 단둘이 있고 싶었다. 오후의 볕으로 몸을 덥히며 조금씩 잠들어 갔던 어릴 때처럼. 그러나 연선이와 함께 있으면 방해하는 것투성이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빛, 나를 통과해서 곧장 연선이에게 도착하는 정제되지 않은 눈빛들... 나는 그것들을 목격하는 것이 힘들었다. 왜 힘들었는지, 알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 김화진, '우연한 작별' 중에서, p.24~25


진영은 오늘 죽은 아들 우현을 만나러 간다. 수많은 후기를 남김없이 읽고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심사숙고한 뒤 결정한 곳이었다. 우현은 특성화고 금형과로 가서 손으로 뭔가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싶어 했다. 도제 수업을 나가게 되면 주 2 3일은 일을 배우며 돈도 벌 수 있었는데, 그 돈들은 자연스럽게 생활비의 일부가 되었다. 우현이 사고를 당한 날, 늦게 일어난 우현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날따라 진영도 늦잠을 잤고, 밥을 챙겨줄 시간이 없었다. 결국 배고파하는 아이를 아무것도 챙겨 먹이지 못하고 보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VR 센터에서 언제로 돌아가고 싶느냐고 물었을 때, 진영은 사고날 아침이라고 대답했다. 일어난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밥이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짜 김이 나는, 따뜻한 음식을 한보따리 만들어 VR 센터로 향했다. VR 헤드셋을 쓰자, 8년 전 그날 아침에 진영은 서 있었다. 아들 목소리에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상다리 부러지는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우현이 맛있게 먹고 출근을 하러 나가면 그들의 만남도 끝이었다. 다시 만나기 위해 8년을 기다렸는데, 환하게 웃는 우현의 모습을 보며 인사를 나눈다. 이제 재생된 가상 현실은 끝이 났다. 준비된 다음 서사도 없었다. 그런데, PD가 종료 버튼을 눌렀는데도, 기계가 먹통이 되었는지 꺼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다음 장면에서 진영은 우현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향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일터로 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진영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음 장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반드시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다. 그리고, 진영은 사고의 진상을 알게 되는데... 대체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시간 밖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언니, 있잖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뭘 좋아하느냐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가 않아. 다들 그렇게 말하잖아. 좋아하는 게 뭐냐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근데 진짜 중요한 건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거거든. 근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도록 두질 않는 것 같아.

누가? 

내 물음에 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조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이 세상 전부가?                 - 최진영, '휴일' 중에서, p.109


지금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여섯 명이 참여한 소설 앤솔러지이다. 김화진, 이꽃님, 이희영, 조우리, 최진영, 허진희 작가 모두 전작들을 인상깊게 읽었기에 매우 기대하며 만나보았다. 여섯 편의 이야기는 사랑과 폭력, 노동과 죽음, 기술과 교육 시스템, 사회적 무관심과 편견 등 한국 사회가 오래도록 앓아온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김화진 작가의 <우연한 작별>에선 동갑내기 친구이자 사촌이었던 두 사람이 십대 시절 내내 겪었던 애증과 폭력에 대해서, 조우리 작가의 <에버 어게인>에서는 현장 실습을 나간 고3 학생의 죽음을 통해 청소년 노동의 현재를 보여준다. VR 기술을 통해 죽은 아들의 마지막 아침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밀이 가슴 먹먹했던 이야기였다. 그 외에도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구현된 가상 체험을 통해 전쟁 시뮬레이션을 통과해야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와 팬데믹과 기후 위기 이후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가 일상이 되어 버린 가족의 이야기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와, 한 시절과, 혹은 과거의 자신과 작별 인사를 건네고 다름 걸음을 내딛는다. 이 책 속에 수록된 작품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작별의 문턱을 지나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애틋하지만 단호하게, 다정하면서도 사려깊게 건네는 여섯 번의 작별 인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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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루스 윌슨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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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은 모든 것이 우리 두뇌의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 거기에 독서의 묘미가 있다. 나는 신기하게도 독서의 기억이 난데없이 수면 위로 올라와 임의의 현재 어느 순간과 연결되곤 한다. 제인 오스틴의 엘리자베스, 베넨 일가, 결혼 이야기를 읽다가 마거릿 드래블과 퍼넬러피 모티머리의 시공간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문득 헨리 제임스의 이저벨 아처와 비교하게 되고, 그러다가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인생의 희비고락을 반추하게 되더라. 읽고 있는 책의 논리적 맥락을 찾으려다가 이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 독서이다.            p.104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다. 그런데 1992년 어느 맑은 겨울날, 그녀의 나이 예순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운전대 앞에 앉아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순간, 갑작스러운 통증이 그녀를 덮쳐 온다. 이튿날 병원에서 그녀는 메니에르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난청, 메스꺼움, 어지럼증 같은 증상이 수반되는 병이라고 한다. 그날을 계기로 자신이 놓쳐버린 삶을 되찾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자신만의 정주할 공간, 자신만의 숨쉴 공기가 필요한 것은 모든 여성에게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인 루스 윌슨은 일흔 살에 한적한 시골에 자신만의 집을 마련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사랑해온 제인 오스틴의 전작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독서를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복기하고, 헝클어진 마음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70세에 졸혼 선언, 시골집에 10년 칩거, 6권의 제인 오스틴 작품 다시 읽기, 88세에 박사학위, 90세에 책 출간이라니...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1947년에 <오만과 편견>으로 제인 오스틴 소설에 입문했고, 평생 열렬한 독자로 살아왔던 그녀는 오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오스틴의 모든 작품을 다시 읽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오만과 편견>, <노생거 수도원>,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 <애마>, <설득>에 이르기까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 오스틴 독자들한테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면, 많이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각각의 작품이 비슷한 이유로, 또 다른 방식으로 매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혼자만의 집에서 제인 오스틴을 다시 읽으며, 읽다가 떠오르는 사람들, 사건들 사이를 생각이 마음껏 헤매 다니도록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번에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 부분과 통속 연애극을 재해석하는 오스틴의 비상한 관찰력을 고스란히 느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다시 읽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인 오스틴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에는 빛과 그림자가 씨실과 날실로 직조되어 있다. 이것은 브레인 선생님이 말씀하신 모듈레이션과도 일맥상통한다. 미학적 개념이 현실 세계로 전이되고 기억과 텍스트가 상상의 조화를 이루는구나. 노년의 다시 읽기로 내 상상의 자원에는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기억이 더해졌다. 퀘스트 헤이븐의 암울한 기억, 어지럽던 도덕적 딜레마들, 일부는 잊히고 일부는 질기게 남아 있던 경험의 그림자들을 산산이 흩어뜨린 건 무대 위에서 맛본 행복한 기억의 찬란한 빛이었다. 독서의 마법이 내 영혼의 시름을 치유해주고 있었다.           p.310~311


다시 읽기가 천성이라는 저자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따라가면 자신의 성장 과정이 추적될 정도라고 말한다. 시기가 바뀔 대마다 자신의 독서가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나와 내 주변의 부분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소설을 읽고, 또 시간이 흐른 뒤 그걸 재독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열다섯 살에 <오만과 편견>을 처음 읽고 내 삶은 빛으로 환해졌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 보았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현실의 불합리함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분명 있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 책 속의 주인공들이 내가 사는 세계보다 더 재미있고 활기찬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은 가볍게 읽어 볼만한 독서 에세이라기보다, 제인 오스틴 작품 전권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가이드해주는 안내서이자 책이 가진 힘과 독서의 역할을 전생애를 통해 보여주는 감동적인 회고록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저 책을 좋아하는 90세 할머니가 아니라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문학 교사이자 독서하는 부모이자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평생 책 읽기를 사랑해온 독자로서,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친구이자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내는 과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했다. 독서의 진짜 재미는 '다시 읽기'를 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책을 새로 펼칠 때마다 텍스트의 접힌 모서리 안에서 지난 기억과 경험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독서의 가치를 이토록 로맨틱하고 설레이게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많이 밑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고, 메모하며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책을 한 권 읽을 예정이라면, 단연코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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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뇌 - 최신 신경과학이 밝힌 평생 또렷한 정신으로 사는 방법
데일 브레드슨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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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 걸음 내딛고, 잘 되면 다시 한 걸음을 가면 된다. 인지 기능이 더 건강해지도록 하는 작은 실천 하나하나를 통해 다른 일도 실천할 수 있다. 그 실천이 모이면 다음에 내딛는 한 걸음은 대체로 전보다 조금은 수월해진다. 나는 부모님의 삶을 보면서, 그리고 내 인생을 살면서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계속하다 보면, 노력에 따른 보상을 체감하게 되면 이내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p.113


누구나 노화는 피할 수 없다. 노화는 생물학적인 과정이며 대체로 우리가 각자 태어난 후에 흐른 시간과 상관관계가 있다. 인류가 가까운 미래에 노화를 뛰어넘으리라고 기대할 만한 확실한 근거도 아직은 없다. 게다가 인지 기능 저하와 그로 인한 신경퇴행은 노화와 무관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뇌의 노화와 인지 기능 저하를 피하려면 뭘 하는 게 가장 중요할까? 


50년 넘게 신경퇴행질환을 연구한 세계적 권위자 데일 브레드슨은 “나이가 들어 인지 능력이 떨어진다”는 통념을 최신 연구로 반박하며 알츠하이머병은 발병 전 예방이 가능하고 진행된 후에도 회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지 기능 저하와 치매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밝혀졌고, 그 방법을 따른다면 사실상 모두가 그 문제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차고 넘친다는 저자의 말은 엄청난 발전이나 놀라운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거나, 늦추거나, 되돌릴 방법은 없다'고, '알츠하이머병은 아직 치료법도 없고, 생존자도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인지 기능이 개선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전문가들의 검토 과정을 거쳐서 학술지에 실렸을 정도라고 하니 너무도 놀라웠다. 노화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가 불가역적인 현상이 아니라면, 인지 기능의 쇠퇴를 막고, 치료하고, 심지어 예방까지 가능하다면, 그것은 가히 혁명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인지 기능의 저하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화의 자연스러운 변화 정도일 뿐 질병이라고 할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스스로 잘해내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건강한 뇌로 백 세 또는 그 이상 살아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미 그 목표에 상당히 가까이 왔고, 20년 정도만 그대로 유지하면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지금까지 해온 방식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백 세까지 남은 20년 동안에도 뇌 건강을 우수하게 유지하려면 몇 가지 비교적 큼직한 변화를 계획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p.418~419


이 책은 인지 기능이 가파른 내리막길 초입에 선 사람들, 아직 그 위험한 길을 피할 기회가 있는 수많은 이를 위한 것이다. 평생 또렷하게 생각하고, 아무 문제 없이 배우고 기억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보라. 저자는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다 보면 스스로 '늙은이'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열쇠를 챙긴다는 걸 깜박하고, 동료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멍 때리다 뭘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기도 하고, 외출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어디에 가려고 했는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사소하게 여기고 웃어넘긴다. 잠시 부주의해서, 정신이 딴 데 팔려서, 또는 너무 지쳐서 잠깐 그런 줄 알았다고, 다들 그럴 때가 있지 않냐고, 보통 생각한다. 


물론 두통이 있다고 해서 전부 뇌종양은 아니듯이, 기억력과 집중력, 추론 능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무조건 치매가 진행 중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사소한 일이라며 웃어넘기고 지내는 동안, 정말로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은 뇌 기능의 핵심 요소 여섯 가지와 건강한 장수 노인의 일곱 가지 특징을 살펴보며 건강하게 오래 사는 뇌를 위해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알려준다. 그리고 식생활, 운동, 수면, 뇌 훈련으로 나누어 개인이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건강 문제가 생기기 전에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우리 각자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평생 예리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살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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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하다 앤솔러지 5
김경욱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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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부모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낯선 시간대에 던져져 갱생의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등뒤로 닫힌 시간의 감옥 문이 눈앞에서 열리는 그날까지. 원하면 사랑을 할 수 있고 아이도 기를 수 있다. 그래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유형지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든 어떻게 다복하든 그들이 과거로 수감되는 미래는 어김없이 도래하리니.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 우리는 지나간 미래가 남긴 죄와 기쁨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 김경욱,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 중에서, p.34~35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다섯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앤솔러지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작품은 잘 읽히고, 어떤 작품은 잘 와닿지 않고, 또 어떤 작품은 공감되고, 어떤 작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 읽게 되니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외관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된 표지가 아름다운 이 시리즈는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가 완간되고 한꺼번에 모아 두니 정말 예쁘다. 


'하다 앤솔러지' 그 다섯 번째 책 <안다>에는 김경욱, 심윤경, 전성태, 조경란, 정이현 작가가 참여했다. 김경욱 작가의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에서는 SF 소설을 쓰는 작가가 어머니가 사라진 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고, 심윤경 작가의 <가짜 생일 파티>에서는 21년 차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타인과의 회사 생활이 어려운 중견 간부의 하루를 담았고, 전성태 작가의 <히치하이킹>에서는 우연히 낯선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된 대학생 커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이현 작가의 <다시 한번>은 20년 전 함께 여행을 떠났던 두 친구가, 20년 후 다시 여행을 가게 되는 이야기를, 조경란 작가의 <그녀들>에선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가 된 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내고 있다. 




검은색이라면 가릴 수 있는 얼룩을 흰색은 가리지 못한다. 아주 작은 얼룩도. 누구와의 관계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넘어가는 그 단계 어디쯤의 찰나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생겨나 어떤 것은 우정으로 신뢰로 혹은 안쓰러움으로 각인되곤 했다. 윤 선배가 처음 자식 이야기를 했을 때 영서는 선배에게서 우정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 조경란, '그녀들' 중에서, p.171


이 책의 주제인 '안다'는 HUG의 의미이지만, 책을 읽으며 KNOW의 의미로서 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믿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이는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대부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의한 것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순간이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사실 별 것 아닌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인생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 준 낯선 품이 갑자기 떠오르게 된 어느 소설가, 지금은 멀어진 상대에 대해 한 번 안아 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순간, 어떤 이례적인 사건 따위 없이도 우정의 농도가 서서히 옅어지는 상황, 가벼운 포옹으로 느꼈던 온기와 향기와 기억, 폭소와 당황과 눈물까지 폭넓게 오갔던 감정의 진폭...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품에 안아줄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들은 '안다'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타인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두 팔을 벌려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그렇게 하여 품 안에 있게 한다는 뜻으로서 타인을 얼마나 안아줄 수 있는지에 대해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이번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국 문학의 대가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록있는 작가들이기에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해주어 더 좋았다. 젊은 작가들이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반짝거림도 좋지만,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내는 묵직한 밀도는 꼭 그만큼의 시간을 쌓아와야만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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