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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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 메리앤이 탄성을 올렸어요. "옛날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얼마나 황홀한 느낌에 휩싸였는지 몰라! 산책하면서, 바람에 날려 사방에서 소나기처럼 휘몰아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즐거웠는지! 낙엽, 계절, 공기가 어우러져 내 안에 일으키던 감정들은 또 얼마나 풍부했는지! 이젠 그렇게 바라볼 사람도 없겠네. 귀찮은 일거리로만 여기고 황급히 다 쓸어서 눈에 안 보이는 데로 치워버릴 테지."

"모든 사람이 너처럼 죽은 나뭇잎을 열렬하게 좋아하는 건 아니야." 엘리너가 말했지요.                p.140


사실 대부분 제인 오스틴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남녀가 서로 오해하고, 헤어지고, 갈등하고, 다시 만나는 서사, 즉 로맨스 소설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다. 하지만 그 편견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것이 1811년에 출간된,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 <이성과 감성>이다. 로맨스, 이성과 감성의 대립 구도 외에도 당대의 중요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의식을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게 구현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선형 번역가는 이 작품에 대해 '번역만으로는 옮길 수 없는 중요한 행간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내용은 <디어 제인 오스틴>이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은 매사에 지나치게 신중한 맏딸 엘리너의 절제된 이성과 매사에 지나치게 감정적인 둘째 메리앤의 정직한 감성이 가족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로 인해 오랜 세월 살아온 저택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게 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에 맏딸인 엘리너와 둘째 메리앤의 완전히 상반된 성격의 차이가 사사건건 부딪히며 극에 재미를 더해준다. 두 자매의 성향 차이는 각자의 남성관에도 반영되어 이들의 로맨스 서사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의 감성은 21세기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타인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이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해는 하지만 다소 안타까운 부분도 들 것이다. 두 자매의 행동과 사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필요한 것이기에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야 할텐데, 그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두 자녀의 이야기를 보며 언제쯤 이성과 감성이 '소통'할 수 있게 되느냐에 포인트를 주는 것도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엘리너는 차마 명랑할 수 없었어요. 그 기쁨은 종류가 달라서 다른 감정은 몰라도 명랑함으로 이어지진 않았어요. 메리앤이 구사일생으로 회복해 삶, 건강, 친구들을 되찾고 애지중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살아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섬묘한 위안의 감각으로 가득 차올라 열렬한 감사로 뜨겁게 팽창했어요 ─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기쁨도 드러나지 않았고, 어떤 말이나 미소로도 표현되지 않았답니다. 오직 엘리너의 가슴속에서만, 그 고요하고 강인한 만족감이 머물러 있었어요.                p.477~478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은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정확히 250주년이 되는 2025년 12월 16일을 시작으로, 매년 두 권씩 삼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작가가 생전 완성된 여섯 권의 소설을 출간된 순서에 따라 출간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이 나왔고, 내년에 <맨스필드 파크>, <에마>, 그리고 내후년에 <노생거 애비>와 <설득>이 차례로 출간된다. 그리고 두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에세이도 해마다 함께 출간된다. 제인 오스틴의 생일에 맞춰 초판 발행일자를 맞추는 것부터 번역가의 애정 가득한 에세이를 함께 내는 것까지 정말 사랑스러운 기획이다. 각 소설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건져 올린 번역가의 단상들을 엮은 에세이도 매우 기대가 된다. 


<이성과 감성> 역시 다양한 판본으로 이미 나와 있지만,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이 특별한 것은 바로 '각주'에 있다. 김선형 번역가는 영미권에서 출간된 여러 유력한 오스틴 판본과 연구서, 제인 오스틴 북클럽 등에서 얻은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방대하고 꼼꼼한 주석을 달았다. 고전 문학을 읽을 때, 옮긴이의 주석을 꼼꼼히 다 살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형 역자의 각주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고 싶을 만큼 깊이 있고, 재미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부연 설명을 비롯해 이 두 단락은 오스틴의 작품 중 남자 주인공을 처음 소개하는 묘사 중에서도 가장 길고 친절하다 라던가, 이 대화는 독자가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식이다. 또한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이는 표현에 대한 원문과 해석, 단어의 문맥적 의미 등 깨알같은 팁들로 가득하다. 각주를 잘 따라가다 보면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더욱 잘 이해해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번역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앞으로 이어질 다른 작품들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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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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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청중은 숨 죽이고 연주를 감상했다. 모두 숨이 멎은 듯 했다. 시선은 피아노에 고정한 채 영락없는 바보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백 개의 손으로 연주한 듯하고 당장이라도 피아노가 터져버릴 것 같았던 그 폭발적인 코드 진행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고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그 믿기지 않는 정적 속에 노베첸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들었고 건반 너머로 쑥 내밀어 피아노 현에 가져다 댔다.             p.57~58


연극으로 상연되며 대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모놀로그 희곡으로 쓰였다. 이후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곡들도 많은 작품이다.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로는 2018년에 나왔는데, 지난 달에 영화가 재개봉을 하면서 지금은 영화 포스터 버전으로 책 커버가 바뀌었다.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만, 실제 연극을 위한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과 약간 다르다. 저자는 책의 형태로 이 작품을 볼 때 '실제 공연과 큰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배에서 태어나 일생을 바다를 떠돌며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1인극으로, 음악극으로 상연된 적이 있다. ‘모놀로그’답게 호흡은 짧고 전개는 빠르며 대화는 절제되었지만 독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무대에 선 배우는 선상의 쇼를 이끄는 진행자가 되어 화려한 입담을 펼치고, 이야기의 화자이자 트럼펫 연주자 ‘팀’이 되어 노베첸토의 삶을 서술하고, 노베첸토 자신으로 분하기도 한다. 무대극으로 봐도 정말 매력적인 작품일 것 같아 궁금해졌다. 언젠가 공연을 하게 되면 보러 가고 싶다. 




하지만 끝은 없었지.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야. 세상의 끝/

피아노를 생각해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리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지.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무한하고 그 건반들 속에서 무한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야.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사람은 무한하게 살 수 있지. 만약 자네가/              p.76


호화 유람선에서 버려진 아기가 자라면서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피아니스트가 된다. 어린 시절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했던 첫 연주에 사람들이 모두 숨죽이고 바라보던 장면부터 그의 삶은 결정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아름답다고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연주였다. 그런데 그토록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그는 왜 배에서 내리지 않는 걸까. 천부적인 피아노 실력으로 떼돈을 벌고, 좋은 집도 사고,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움직이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걸까. 왜 계속 바다를 오가며 사는 걸까. 


단 한 번도 육지를 밟은 적 없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노베첸토는 '존재한 적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친다. 육지로 나아가 넓은 세상을 만나는 대신 꼭 2000명만큼의 세상을 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깊이 있게 살아간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건반 위로 옮긴다. '누군가의 눈 속에서, 누군가의 말 속에서, 실제로 그들이 느낀 공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진 흔적과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책처럼 읽어낼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단 91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문장으로 리듬을 만들고, 단어로 피아노 연주를 직조해내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매 페이지마다 음악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다면, 영상이 미처 담지 못한 노베첸토의 다층적인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이 책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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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교유서가 시집 3
리산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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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폐허가 된 성의 뜰에 도착해/굶기를 밥 먹듯 하는 사이비 귀족에게 재워달라고 부탁하는/루이 14세 시대의 유랑 배우들처럼//방문객들이 도착한다 계속해서 도착한다/앉을 곳을 이리저리 찾는다 계단에 앉는다/문 뒤에 앉은 사람들 때문에 현관문은 열기도 어렵다/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정원에 모여 음식을 만든다              - '겨울 샐러드' 중에서, p.33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는 연두색,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는 빨간색,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는 핑크색인데,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그라데이션을 준 내지도 너무 예쁘다. 사실은 이 내지 때문에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를 앞으로 계속 모으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ㅋㅋ 


리산 시인은 아주 오래 전에 문학동네시인선으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는 시집으로 만난 적이 있다. 눈 앞에 장소가 그려지는 듯한 서사성이 강한 시라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만난 시집도 장면들이 그려지는 듯 스토리가 보이는 시들이라 참 좋았다. 이번에는 '교환독서'로 읽게 되었는데, 한 권의 시집을 함께 읽는 시간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시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시를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유와 함축의 의미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집은 교환독서로 읽기에 정말 훌륭한 텍스트가 아닌가 싶다. 시집을 읽고, 생각하고, 메모된 글을 읽고, 시를 다시 읽으면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도 느끼게 되고, 나와 다른 방식의 감상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폐허 위에 눈이 내리고, 환하게 불을 밝히며 지나가는 밤 기차를 타고, 허물어져가는 신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전나무가 길게 늘어선 숲, 꽃들은 눈처럼 향기롭게 떨어집니다, 발밑으로 길어지는 당신의 낭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건, 꿈꾸는 이상적인 울적한 하루가 전부여서, 마른 꽃들은 발밑으로 떨어지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허밍을 하는, 이 낡고 오래된 집에서도, 왜 꿈은 오래 꿈꾸던 꿈일 수가 없는지             -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기' 중에서, p.108


이 시집은 특히 '시인의 말'이 좋았다. '오래된 마음은 가라/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는 뛰어드네/다시/맨 처음으로'라는 짧지만 임팩트 있는 문구였다. 오래 전에 읽었던 리산 시인의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을 다시 펼쳐 보았다. 역시나 시인의 말은 짧았다. '휴일에 만들어진 맥주는 불량이 많다고 한다. 내 시의 대부분은 휴일에 씌어졌다.'였다. 2013년 5월에 나왔던 시집과 2025년 12월에 나온 시집을 함께 두 손에 들고 오고 가며 번갈아 읽었다. 비슷한 듯 다른 느낌, 시간의 밀도 만큼 다르게 읽히는 시들이 참 좋았다. '겨울 샐러드'라는 시도 즐겁게 읽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요리를 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 파티의 한 장면을 그린 시인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따뜻함으로/가득하게 아주 많이 철철 넘치게'라는 대목처럼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상하게 따스한 느낌이 들어 겨울밤에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시였다. 


이번 시집에는 해설 대신 김숨 작가님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같은 소설을 쓰는 김숨 작가님의 글과 소설처럼 읽히는 시를 쓰는 리산 시인의 글이 너무 잘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리산 시인의 산문을 읽어 보고 싶다. 리산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산문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언젠가 시의적절 시리즈에 한번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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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적인 평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부희령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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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관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다. 수백 개의 서가들, 그 속에 꽂혀 있는 수백 수천만 권의 책들, 책마다 넘쳐나는 깨알 같은 거짓말들. 사람들은 거짓말을 사랑한다. 거짓말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말끔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어렵고 거짓말은 지나침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뻔뻔해서, 모든 두꺼움이 그렇듯, 어리석음과 추함과 두려움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p.33


부희령 작가의 글은 번역가로서의 작업물들로 먼저 만났었다. 소설 작품은 <구름해석전문가>라는 소설집이 기억에 남는데, 독특한 제목과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 이미지때문에 홀린 듯 선택했던 책이다. 언제나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독자로서 세계를 부유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낯설기도 하면서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산문집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역시나 제목과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을 하며 읽어 보았다. 


표지에도 보여지는 '파파야'라는 제목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유리창을 닫으며 열대의 우기를 떠올린다. 오래전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는데, 그 시절의 쏟아지던 비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곳의 비는 온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오전 내내 뜨겁게 내리쬐다, 늦은 오후 무렵 비가 장렬하게 퍼붓는 식이었다. 세상이 다 잠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지금은 그곳에 있지 않지만, 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안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 시절 자주 먹던 파파야의 단내가 유령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이 글을 읽으며 잘 익은 파파야의 선홍빛 과육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대 과일 중에서도 파파야는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먹어야 제맛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은 한겨울이니 파파야를 한입 먹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외롭거나 외롭지 않거나,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누구나 언젠가는 보게 될 뒷모습 아닐까. 먼지 쌓인 책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가, 손자들의 끊이지 않는 귀여움에 지쳐갈 즈음, 무거운 카트를 끌고 신호등 앞에서 황급히 걸음을 멈춰야 할 때, 수많은 누군가는 성공이나 실패라는 이름을 벗어버린 반백의 시간과 문득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 결국 모두가 겪는 순간이라 생각하면, 이유는 모르지만 조금 위로가 되지 않나요.              p.167


이 책의 글들은 쓰기, 마음, 여행, 가족, 세상, 읽기라는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행 카테고리의 글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인도의 아쉬람을 시작으로 슬로베니아, 베네치아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글들이었다. 여행으로 다녀온 것도 있고, 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레지던스 공모에 선정되어 석 달 남짓 머무른 나라도 있었다. 베네치아 여행기의 마지막 글에서 '슬로베니아를 떠나고 나면 베네치아도 류블랴나도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라는 문장을 읽으며, 그래서 여행일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항상 그런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살아서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눈에, 마음에 꼭꼭 담아 가야지. 세상에는 너무 많은 장소가 있고,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기회는 몇번 안되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평범'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평범해지고 싶다와 평범하지 않고 싶다 사이에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몽상이 되어 가는 것은 나이를 먹고 점점 더 현실과 타협하게 되면서부터 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평범은 '세상의 완충지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산문은 가장 '사적인' 형태의 글이지만, 그래서 더 공감되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살아온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다정한 작가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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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앤 리즌 3호 : 블랙코미디 라임 앤 리즌 3
오산하.이철용.황벼리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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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대 위에는 작은 핀 조명이 내려온다.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조명이 마치 온몸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 위에 흰빛을 이고 다닌다. 마이크 앞에 선다. 오늘의 관객은 세 명.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의 어리둥절함을 모른 체하고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연다. 당신의 지옥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 오산하, '네버 네버 스마일 라이프' 중에서, p.61


라임 앤 리즌 시리즈 그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소설, 시, 에세이, 희곡, 논픽션, 비평, 만화 등 매호 달리 선별되는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하나의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색안경이자 문화적 충분조건으로 ‘장르Genre’를 설정하고,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담고자 한다는 것이 기획의도이다. 1호 디스토피아, 2호 오컬트에 이어 3호는 블랙코미디이다. 


'디스토피아' 편에서는 소설가 예소연의 픽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후변화 연구자인 정수종 교수의 논픽션, 그리고 만화가 약국의 작품을 담았다. '오컬트' 편에서는 사진가 임효진의 포토, 소설가 최추영의 픽션, 비평가 윤아랑의 글을 수록했다. 이번 '블랙코미디' 편에서는 오산하 시인과 이철용 극작가, 황벼리 만화가가 각기 다른 장르와 형식으로 ‘웃음’을 해석하는데 에세이, 희곡, 만화라는 분야로 3인 3색의 블랙코미디를 선보인다. 코미디의 원칙 중 하나는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비현실성을 삽입할 것'인데 블랙 코미디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오히려 그 불편함을 노리고 파고 들어 풍자하는 것이 블랙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긴 상황이 나오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상황 혹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유머와 풍자를 자아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핵심이다. 




유다: 내 생각인데 말야. 부조리극의 인물들이 자신이 부조리극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부조리극이 아니야.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건 이미 그 부조리를 객관화했다는 의미고, 객관화된 부조리는 더 이상 순수한 부조리가 아니게 되니까.

사탄: 애초에 얘길 꺼냈을 때부터 망한 거네요.

유다: 그렇지. 다 너 때문이다.              - 이철용, '로 파티' 중에서, p.117


오산하 시인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를 인상깊게 읽었던 적이 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분방하고도 완전히 새로운 종말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시인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 잇따르고, 재난 문자가 빗발치고, 도처에 부조리가 만연하던 그 때 계엄령을 마주한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한 블랙코미디는 없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상 속 미세한 균열들을 포착해낸다. '에세이'의 형식이기 때문에 처음 ‘블랙코미디’에 대해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어떤 블랙코미디를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상 등 작품을 쓰게 된 배경도 수록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철용 극작가는 사탄과 유다가 철학적 논쟁을 이어가는 부조리극을 보여준다. 거대한 구덩이가 무대 중앙에 있고, 그 구덩이의 좌측과 우측, 그리고 중앙에 등받이가 긴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다. 막이 오르면 좌측에는 유다가 앉아 성경을 읽고 있고, 사탄은 창에 꿰뚫린 채 중앙 의자에 앉아 있다. 미사일처럼 쏘아진 창이 사탄을 꿰뚫고 사탄을 몸째로 의자에 박아둔 충격적인 이미지로 시작되는 오프닝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서, 연극으로서 부조리극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황벼리 만화가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속삭이는 귀'에 대한 서늘한 풍자를 그려냈다. 사람을 죽이는 '말'에 대한 풍자가 놀라울 정도로 현실의 그것과 닮아 있는 작품이었다. 세 작품 모두 웃고 싶지만 쉽게 웃을 수 없는, 우스꽝스럽지만 어딘가 슬픈, 그럼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일상 속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방식이 특별해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다채로운 방식'이 궁금하다면, 라임앤리즌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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