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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되살아난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연구소 건물을 본 순간 마키하타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그것은 피로 얼룩진 살해 현장이나 시신이 묻혀 있던 자리에 서 있을 때 느끼는 섬뜩한 감각과 비슷했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그 감각을 분명 '불길함'이라고 표현했으리라. 평소 영혼이나 영적인 기운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 마키하타였지만 오랜 세월 경험을 쌓으며 몸에 밴 육감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p.22
국도변에 있는 마을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늪지에 유기된 시신이 발견된다. 단순히 머리와 사지가 잘린 정도가 아니라, 살점과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코트와 셔츠의 잔해마저 없었다면 도저히 사람의 시신이라고 유추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1월이라 부패한 시신에서 나는 악취는 덜했지만, 늪에서 피어오르는 썩은 진흙 냄새와 어우러져 또 다른 끔찍한 악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현장에 수많은 검은 깃털이 함께 흩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끔찍한 광경에 기묘한 색채를 더해주었다. 과거의 늪지를 중심으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고, 그래서 주변이 까마귀들의 서식지였던 것이다.
조각조각 해체되어 보란 듯이 방치된 시신, 자신의 범행을 마치 예술작품인 양 연출해 최대한 많은 사람의 눈에 띄게 한 것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살인은 아니었다. 경찰은 코트 주머니에 있던 소지품을 토대로 그 시신이 근처 제약회사에 다니던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기류 다카시라는 그 인물은 독일의 스턴버그 제약회사가 일본에 만든 자사 연구소에서 다녔던 것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 연구소는 두 달 전에 문을 닫은 상태였고, 연구소가 폐쇄된 뒤로는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사방을 성벽 같은 담으로 둘러싸고 철저하게 보안을 지켰던 그곳은 자물쇠로 잠긴 상태였다. 선량하고 성실했던 연구원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된 것일까. 이야기는 제약회사에서 개발하던 신종 마약을 중심으로 폐쇄된 연구소의 비밀을 파헤치는 구성으로 전개된다. 사건 현장과 연구소를 맴도는 불길한 까마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류 다카시는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착한 사람이 맞았던 건지, 그가 스스로를 마녀의 후예라고 했던 말의 뜻은 뭔지 이야기는 불길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조성하며 끝까지 휘몰아치듯 달려간다.

우직한 사람을 비웃기란 쉽다. 그러나 우직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과 와타세가 구조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그 어려운 길 위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한시라도 빨리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p.238
이 작품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초기작이다. 그의 데뷔작인 <안녕, 드뷔시>보다 더 이른 시점에 스인 작품이라고 하니, 그가 미스터리 작가로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된 초석이 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은 국내에 꽤나 많이 출간되어 있는데, 최근작들 몇몇 빼고는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와타세 경부 시리즈,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비웃는 숙녀 시리즈,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등 시리즈 작품들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미스터리를 쓰는 법>이라는 글쓰기 책도 있었다. 법의학 교실, 법정 미스터리, 사회파 미스터리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미스터리 장르를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는데, 미스터리가 아닌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도 있어 매번 놀라웠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탄탄한 구성과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빠른 전개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작가이다. 48세의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해서, 그 후 7년간 이야기를 28편이나 써내는 왕성한 집필 속도를 보자면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제는 히가시노 게이고만큼이나 믿고 보는 작가가 된 것 같다. 게다가 본격 미스터리, 서스펜스물, 법정 미스터리, 경찰 소설, 안락의자 탐정 소설에 이어 코미디물까지 그야말로 장르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쓰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그 동안 나카아먀 시치리의 작품들을 읽어 왔다면 이번 작품에서 와타세 경부와 고테가와의 등장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을 것 같다. <테미스의 검>을 비롯한 와타세 경부 시리즈를 통해서, 그리고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를 비롯해서 <속죄의 소나타>, <히포크라테스 선서> 등 다양한 작품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내내 감탄했다. 대체 나카야마 시치리는 첫 작품부터 이렇게 몰입도 높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걸까. 거장의 초기작이 가진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작품이니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