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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평점 :
신중하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는 것을 뜻한다. 유사한 말로 무겁다, 삼가다, 조심스럽다 정도가 있겠고, 반대말로 가볍다, 경망하다, 경솔하다 정도가 있다. 반대말의 부정적 어감을 보면 알겠지만, 신중하다는 것은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승우의 소설집에서는 이것이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 '신중함'으로 인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답답하게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가 신중하기만 하고 치밀하지 못한 것은 무른 천성 때문이라고 그의 아내는 판단했다. 그의 아내는 치밀하지 못한 신중함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유약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신중하기만 하고 치밀하지 못한 것보다는 신중하지 않더라도 치밀한 편이 낫다고 투덜거리곤 했는데,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라고 Y는 생각했다. 치밀하지는 못해도 신중할 수는 있지만 신중하지 않으면서 치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Y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은 신중한 성격 때문이었다. 즉 무른 천성 탓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아내가 보일 반응과 그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르는, 견뎌야 할 불편한 사태를 성가셔했다.
<신중한 사람>에서 Y는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며 정년을 대비해서 단월에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의 압력에 못 이겨 해외파견근무를 나가게 된다. 오랫동안 꿈꾸고 준비해왔던 전원생활에의 미련도 그 신중함 덕에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의 해외 지사 근무를 끝내고 기러기아빠 신세로 혼자 귀국을 하는데, 지금은 딸의 유학자금 때문에 조기 퇴직은 생각할 수 없는 실정이다. 아내 역시 딸과 함께 해외에 남겠다고 해 결국 홀로 귀국하게 됐는데, 그가 돌아와보니 자신의 전원주택에 웬 낯선 사람이 살고 있는 거였다. 그는 해외파견근무를 나가면서 마을의 이웃에게 매달 약간의 돈을 부쳐주며 관리를 부탁했는데, 그는 온데간데 없고 낯선 사람이 버젓이 계약을 새로 해서 그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집을 남의 집처럼 기웃거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자신이 원래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자신의 집 다락방에 들어가 사는 대가로 숙박비를 내는 이상한 계약을 맺게 된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상황이냐 싶겠지만, Y는 그 신중함 때문에 그저 벌어진 상황에 적응하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고,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때때로 비겁해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너무도 가볍게 행동하고 말을 내뱉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신중해서 자신이 피해를 입더라도 스스로를 합리화해서 그저 상황에 순응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리모컨이 필요해>의 나 또한 신중한 사람이다. 시간 강사인 나는 숙박도 문제고, 강사료도 변변치 않지만, 선배의 부담스러운 호의를 거절하지 못해 지방에 글쓰기 강의를 하러 내려온다. 강의가 끝나면 선배를 따라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는 술자리를 따라다니지만, 사실은 그저 숙소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낡은 여관에 묵고 있는 그는 새벽마다 자동으로 켜지는 텔레비전 때문에 리모콘이 필요한데, 원래 리모콘이 없다는 여관 주인에게 반박하지 못한다. 이미 이불 속으로 들어가버린 남자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질문을 묵살하는 여관 주인에게 항의하지 못하는 그 역시, 뭔가 억울하더라도 현재 벌어진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고객들은 모두 심약한 사람들이야. 누구보다 약하고 억눌린 게 많고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칼을 모을 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칼을 수집해야 할 정도로 약한 거지. 칼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칼을 소지하는 거야..... 다마스커스의 사장이 한 말이다. 칼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가지지 않고도 잘 살지만, 칼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칼이라도 지녀야 겨우 살 수 있다고, 실제로 그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도 애초에 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칼>에서 칼을 배달하는 일을 하는 나 역시 결국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게 된다. 일을 할 때도 칼을 지니고,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칼을 지닌다. 그 역시 칼을 가지고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라고 불리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것을 누구나 한 가지씩 품고 산다. 수집하는 그것이 칼이든, 우표이든, 동전이든 간에 말이다. <이미, 어디>의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니까 그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무슨 말장난 같은 표현이냐고? 이번 소설집의 매 단편마다 이렇게 말장난 같은 문장들이 길게 늘여져 설명되어 있는 대목들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그런 표현들이 인물들의 심리 상태와 행동을 보여주는 적확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지나치게 신중한 인물들의 특징만큼 작가의 문장 또한 신중함에 신중함을 더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생각만 많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신.중.하.고도 소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각각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한 편의 연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리석게 보일 만큼 신중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결국, 소통이 불가능한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각자의 불안은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것은 신중함 속에 숨겨진 어떤 부조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