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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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쇼노스케는 서책을 베끼는 일을 한다. 인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서책은 지은이가 직접 쓴 단 한 권이었으므로, 그것을 널리 읽히게 하기 위해선 필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필사본으로 책을 읽어야 했던 이런 시대가 어쩐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책들은 모두 활자가 인쇄되어 나오므로, 저자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책은 없는데 필사본은 글을 쓴 사람의 맨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날 테니 말이다. 나의 초, 중등 시절에는 책 대여점이 한참 인기였는데, 학생이라 용돈이 빠듯했던 나 역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전부 사볼 수 없었으므로 주로 대여점에서 빌려서 보았다. 보통 책을 한 권 빌리면 하루 만에 다 읽고는, 나머지 대여 기간 동안 나는 노트에다 필사를 하곤 했다. 왜냐하면 책을 반납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책을 읽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빌려 볼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음을 움직였던 문구들을 모조리 외울 수도 없었기에, 노트에 부지런히 옮겨 적었던 그 시절에 나를 떠올려보니 쇼노스케가 하는 일이 눈 앞에 그대로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자가 웃고 있습니다".

"글자가 웃나요?"

"웃기도 하고, 화도 내고, 새침한 표정도 짓죠."

글씨에서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사라시나 일기 표주>도 국문학자가 만든 사본을 읽을 때와 와카 씨의 사본을 읽을 때 조금 다르게 이해될 겁니다. 물론 글 뜻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씨체가 다르면 감정이 전달되는 방식도 달라지니까요."

똑같은 사람이 장소에 따라, 또 상대방에 따라 약간은 다른 얼굴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와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책은 살아 있다는 말씀이네요."

사람들이 성격과 체질이 각기 다른 것처럼, 그들이 쓰는 글씨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필적이 다른 것은 본래 저마다 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게 마련이오. 글씨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지. 보는 것, 보이는 것이 다르면 그것을 베껴 쓰고 그리는 것도 다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소"

글자를 쓸 때는 마음을 담아 써야 한다고, 마음을 담으면 못 써도 예쁘게 보인다고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별 의미 없이 하는 수많은 일 들 중에 글씨를 쓰는 것조차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처음 친구를 사귈 때나,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때 글씨체에 따라 그들의 성격과 얼굴까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었는데, 그게 아마도 글씨에 마음이 어느 정도 깃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을 연주하는 피리를 뜻하는 한자를 쓰다니 무사의 자식답지 않게 연약한 이름이라고 어머니는 무척 싫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억지로 지어주신 겁니다.

이 아이가 생황의 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간으로 자라도록.

 쇼노스케에게 이렇게 멋진 뜻을 담은 이름을 지어주신 그의 아버지 소자에몬은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할복 자살을 하고 만다. 검소하게만 살았던 그는 뇌물 혐의에 대해서 전혀 금시초문이었지만, 그를 고발한 이에 따르면 확고한 문서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문서의 필적은 당사자인 소자에몬이 보기에도 자신의 것으로 보였으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하겠다. 그 와중에 부인인 사토에가 아들의 관직을 위해 뒤에서 로비를 한 일까지 불거져, 그녀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소자에몬은 죄를 뒤집어 쓰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각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세 번째 혼인을 한 사토에는 애초에 남편에게 애정이라고는 없었던 데다, 그녀는 두 아들 중에 아비와 정 반대인 첫째 가쓰노스케에게만 기대를 걸고, 남편과 닮아 얌전한 쇼노스케에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바랐던 쇼노스케는 에도로 와서 필사 일을 하면서, 문서를 위조했던 이를 찾는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의 삶도 평범한 가족이 그리 많지 않다. 큰 아들과 의절하고 작은아들에게 대를 잇게 한다는 유언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짜 유언장을 만들고, 수십 년 키워준 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가서 키워준 부모의 돈을 가로채려 하고, 심약하고 기골이 없는 아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비의 뒤를 이어 평범하게 살 바에야 천륜을 꺾어서라도 자신의 앞길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자식이 있는 가 하면, 맨날 싸움만 하는 모녀 사이도 있고 말이다. 현실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가족의 여러 형태들이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을 통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왜 후루하시 가에 태어난 거지? 내가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건만, 어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천륜이라 함은 부모, 자녀간이나 형제간에 맺어진 관계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로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륜이기에,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못하듯 자식도 부모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티비 연속극에서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 사고 뉴스 기사 속에서도, 우리는 천륜을 끊겠다는 이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곤 한다.

쇼노스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와카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미소 띤 눈이 쇼노스케의 가슴을 환히 비쳐주었다.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불끈불끈 치솟았다.

오늘은 자주 불끈거리는 쇼노스케이지만, 결코 발칙한 '불끈불끈'이 아니다. 학생들 때와 마찬가지다. 친밀한 분위기를 공유하는 즐거움이 자아내는 기쁜 설렘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하더라도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소중한 걸 잃은 건 아니라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지만, 가족이 만능은 아니라는 것, 피를 나누었다는 속박으로 오히려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의 다양한 인물들의 가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쇼노스케가 수취증서를 쓴 필사의 달인을 찾는 미스터리와 그가 와카라는 독특한 처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알콩 달콩 로맨스, 그리고 쇼노스케가 필사 일을 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드라마까지. 이 작품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는 단편 처럼 읽기에도 손색이 없고, 연작으로 읽으면 그 재미가 더욱 배가 되는 재미있는 장편 소설이다. 특히나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사람을 그려내는 그 시선을 참 좋아하는데,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각각의 처해진 상황과 입장이 그려져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놈, 착한 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쓰다 보니 리뷰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이 책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고 해두자. 감동적인 드라마도, 퍼즐을 풀어가는 재미도, 귀여운 연애 이야기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숨겨진 진실도, 모두 한데 뒤섞여 큰일을 낸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니 말이다. 작품의 원제인 벚꽃박죽 처럼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사이기도 하니 그저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한번 따라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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