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다이아나
유즈키 아사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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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멀리 벤쿠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를 낳았단다.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 속의 아기 얼굴에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 나의 짝꿍이었던 친구이자, 내 인생에서 손꼽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꼭 들어가는 베스트 프렌드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그 시기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어쩐지 내가 아이에서 조금은 어른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버렸고, 중학교에 반을 배정받아 가고 보니 여러 초등학교에서 온 모르는 애들 투성이라 어딘지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 같다. 낯가림이 심해서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편도 아니었기에, 나는 평소처럼 소설 책을 꺼내 들고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준 친구가 바로 이 친구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가까워지면 털털해지는 나와 달리, 밝고 리더십있고,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강했던 그 친구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그녀는 결국 반장을 맡았었다. 중학교 3년 중에 겨우 일년 같은 반이었고, 고등학교도 다른 곳으로 배정되었고, 대학도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그 친구와의 우정은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친구를 비롯해서 나와 가깝게 지낸 이들은 모두 나와 성격이나 외모가 정반대인 친구들이 많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다른 면을 친구에게서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끌리거나, 동경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빨간 머리 앤>아니? 앤의 친구 이름이 다이아나야."

. 다이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빨간 머리 앤>은 거의 베스트 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좋아하는 책이다. 줄줄 외울 정도로 볓 번이나 읽었다. 앤이라는 수다쟁이에 공상을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딸리 물과 퍼프소매, 하트모양 캔디 등 귀엽고 맛난 것들로 가득한 책이다. 다이아나는 앤이 자랑하는 예쁜 친구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로 등장한다. 읽으면서 내내 둘의 관계가 너무 부러웠다. 이렇게 남과 책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나 역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 책 <서점의 다이아나>를 읽는 내내 가슴이 쿵닥쿵닥거리며,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였다. 앤과 다이아나 처럼, 혹은 다이아나와 아야코처럼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그런 단짝 친구가 있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너무도 매혹적이다.

우리의 주인공 다이아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어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오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바로 너무도 싫어하는 자신의 이름 때문이다. 외국인도 아닌데 '다이아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거기다 한자로 쓰면 뜻이 '큰 구멍'이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왔다. 아빠는 다이아나가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카바레 클럽에 다니는 엄마인 티아라가 자신처럼 다이아나의 머리도 노랗게 물들여 놓아 가만히 있어도 튀는 소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 앞에 '다이아나는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예쁜 소녀가 나타난다. 눈매가 곱고,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운,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가 분명하게 다른 그 소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을 언급하며 다이아나라는 이름이 정말 부럽다고 말한다.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것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누구라도 친구가 되고 싶어할 그런 미소를 가진 소녀가 말이다.

가나자키 아야코의 집에 놀러갔던 4월 중순의 일요일을 다이아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 날을 경계로 인생이 바뀌었다. 자신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선명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야코의 집에는 다이아나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이랬으면 좋겠다고 꿈꾸던 풍경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요리 연구가인 너그러운 엄마와 출판사 편집자인 차분한 아빠를 가진 아야코가 부러웠다. 엄마 앞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응석을 부리고 조잘대는 아야코의 모습이 정말 부러웠고, 자신도 그렇게 너그러운 엄마의 품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지켜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살고 있는 이 집의 반짝거리는 마력에 푹 빠져 있다. 조그만 방은 마치 소꿉놀이하는 인형의 집 같다.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병이 조르륵 놓여 있고 온 벽에는 공주늠 드레스 같은 옷이 걸려 있다.....냉장고, 전기 밭솥에 이르기까지 반짝거리는 스티커와 비즈로 장식되어 있어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진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복잡한 가정에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자란 여자아이일 거라고 상상한다. 헐렁한 티셔츠에 더러운 실내화차림이지만, 사실은 소공녀 세라처럼 좋은 집안의 자녀일 것 같다고. 그리고 다이아나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가슴이 설렌다. 열다섯 살,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짓고, 아빠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어쩌면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 있을까.

아야코와 다이아나는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 상대를 부러워한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순식간에 만들어준 인스턴트 음식의 강렬한 맛에 감동하고, 다이아나는 아야코의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젤리의 맛에 황홀감을 느낀다. 수수하면서 멋진 아야코를 동경하는 다이아나와 반짝반짝 화려한 다이아나를 부러워하는 아야코는 그렇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이유는 둘다 책을 너무 좋아했고, 그 책을 매개체로 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외모와 완전히 상반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 만으로 친구가 되는 건 이렇게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른이 되고 나면 마음을 터놓는 친구를 만들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니 말이다. 아야코와 다이아나는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고, 결국 그녀들이 다시 말을 하게 되는 건 그로부터 무려 10년 뒤가 된다. 쉽게 가까워지는 것만큼의 순수함이 반대로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의 단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십여 년의 시간을 각기 다르게 겪어가는 두 소녀의 이야기와 비밀이 많은 호스티스 티아라, 다이아나가 찾아내는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아야코의 두 부모들을 통해서 가족에 관해,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순수했던 소녀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거. 소설처럼 삶도 모든 게 멋지게 돌아가지는 않다는 걸 배워간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어떤 상황이라도 책을 펼치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안심이 되는 당신이라면, 분명 이 책은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설레이는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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