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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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집밥 열풍이 뜨거워졌다. 흰 쌀밥과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이 나오는 한식당들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끼니는 챙기고 살자는 취지의 먹방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모아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고, 어떤 방식의 조리방법이 쓰이는지 알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이렇게 건강한 생활방식을 추구하려는 킨포크 라이프를 지향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점점 삭막해지는 도시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시달리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기획안은 풀리지 않고, 연인은 속을 썩이고, 그렇게 종일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극대화가 된다. 그러고 퇴근해봐야 어두운 집에서 나를 반기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대충 차려서 배를 채우고 거실에 앉아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노라면 다음날 다가올 출근에 대한 압박으로 답답해지고 말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아닐까. 이상하게 내 입맛에 꼭 맞는, 맵지도, 그렇게 짜지도, 지나치게 달지도 않으면서 조미료 하나 안 들어가도 감칠맛이 돌고, 두 그릇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것만 같은 포만감을 주는 그럼 엄마 표 밥상 말이다. 그러니 집밥 열풍과 쿡방의 인기의 도착점은 바로 엄마의 집밥이다. 우리는 밥 힘으로 살아가니까.

재료는 시금치야. 싱싱하고 예쁜 시금치 한 단. 약간의 올리브유(없으면 포도씨유나 현미유,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유 같은 것은 권하지 않아. 이왕이면 몸에 좋은 기름은 한 병쯤 마련해두자. 앞으로도 기름은 계속 쓰일 거거든), 파르메산 치즈 가루, 이렇게.

 

이 책은 소설가 공지영이 매우 간단한 요리법을 상황에 맞춰 딸에게 소개하면서, 엄마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과 조언이 가득한 매우 따뜻한 책이다. 물론 레시피 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간단한 요리법들 투성이지만, 재미있는 건 이 책을 읽다 보면 요리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라도 "맛있겠다, 나도 한번 만들어볼까'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부담 없이 시도해 보고 싶을 만큼 어렵지 않은 요리들이지만, 함께 실린 일러스트를 보면 꽤 그럴 듯해서 이 책은 레시피 북으로서도 괜찮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 날,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옷차림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그냥 다 그만두고 막 망가져 버리고 싶은 날, 그런 날 그녀는 <시금치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보라고 말한다. 방법은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초간단. 시금치를 깨끗이 씻어 한입에 먹기 좋을 만큼 손으로 뜯고, 올리브유를 그 위에 살살 뿌린 뒤, 마지막으로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성질대로' 뿌린다. ! 요리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지만, 그 맛만은 여느 레스토랑에서 나온 시저 샐러드 못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날에는 화이트 와인을 함께 마시는 것도 좋다. 샐러드를 다 먹고 나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라벤더 오일을 로션에 섞어 얼굴과 몸에 바르고,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오늘의 일기를 써보는 거다. 세상에 지치고 상처 입으며 돌아온 딸에게 이렇게 멋진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그녀가, 정말 대단한 엄마처럼 느껴진다.

우선 유기농 브로콜리를 사자. (유기농 제품 비싸. 그러나 유기농 제품을 먹도록 하자. 비싸면 조금만 먹기로 하고. 같은 돈이면 좋은 것을 조금만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다음 찌거나 삶아. 유기농일 경우 잘 씻어 냄비에 물 한 숟가락만 넣고 찌면 특유의 영양이 유지되고 색깔이 잘 살아나서 좋아. 만일 유기농이 아니라면 소금을 한 꼬집(엄지, 검지, 장지를 모아 살짝 꼬집듯 집어낸 양)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 삶자

공지영 작가는 인간의 세포가 6개월마다 모두 바뀌기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에 쌓였던 먼지와 싸구려 기름기, 합성 조미료에 지친 우리의 세포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자며 유기농 재료들을 권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중하니까. 한 끼를 먹어도 가치 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남에게도 딱 그만큼의 존중을 받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책에 실린 레시피 중에 탐나는 것은 비프커틀릿이었다. 돈까스보다 훨씬 맛있고, 고급스러운, 그리고 혼자 먹기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메뉴여서 어쩐지 먹고 나면 든든한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커틀릿이라고 해서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선 조금 두꺼운 불고깃 감이나 구이용 고기를 준비해서, 후추를 치고, 밀가루, 달걀, 빵가루 순으로 입히는데, 작가만의 비장의 무기는 바로 빵가루에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섞는 거라고. (사실 이건 어떤 쿡방 프로그램에서 모 쉐프님이 이미 알려준 비법 아닌 비법이지만) 구울 때는 버터나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튀기는 것이 아니라 전 부치든 지져내면 된다. 생각만 해도 먹음직스러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앞으로 수많은 실패와 시련들을 겪어 나가야 할 자식에게 멋진 요리법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엄마가 어디 있을까 싶을 만큼 공감이 되고, 마음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언젠가 내게도 딸이 생긴다면 꼭 권해주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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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타이 - 침샘 폭발하는 태국 먹부림 가이드
쿠나 글.그림 / 북폴리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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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을 가려고 일정을 짤 때,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것이 바로 맛 집 리스트이다. 홍콩에 가면 이건 꼭 먹어봐야 하고, 괌에 가서는 여기를 들러야 하고, 오사카에서 이 집은 제일 유명하고 등등... 여행에서 현지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뜻일 것이다. 여행의 여러 가지 목적 중에 '힐링' 혹은 '휴식'의 비중이 가장 크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 아직 태국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동생이 다녀와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혼났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후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땐 나도 모르게 태국은 배제하고 나라를 선택했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나니 태국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그만큼 이 책은 완벽한 여행 가이드이자, 맛 집 가이드이기도 하다.

2011년 초여름 쿠나는 하던 일도 잘 안 풀리고 매일매일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원래 없었던 멀미도 생기고 스트레스로 인해 고3들이 자주 걸린다는 포진에 걸려서 일년 동안이나 고생한데다 손마디가 이상해져서 주먹이 꽉 쥐어지지 않는 이상 증세도 겪었어요.

그래서 이곳을 완전히 벗어난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주변의 권유로 태국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혼자서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지만 두려움보다는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상에 지쳐 나가 떨어질 때 즈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한국을 떠나고 싶다!가 아닐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여행이다. 반복되는 일상,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다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만 하더라도 스트레스의 절반은 날려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자인 쿠나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녀는 무작정 떠난 태국에서 아름다운 자연에서 여유도 부려보고, 맛있는 음식들도 머고,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도 보내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열심히 살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대체 태국이 어떤 곳이기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힘을 주었다는 걸까 궁금해진다. 네이버와 다음에 연재되었던 분량을 수정하고 가이드로서 정보도 보강하여 엮은 이 책은 태국의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발견한 쿠나의 맛 집 탐방기이기도 하다. 태국은 과일의 종류도 많고 가격도 저렴한데, 길거리 노점상에서 조금씩 구입해서 먹는 것이 현명하다 알려주고,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천국과도 같은 장소가 바로 편의점이라는 것도 알려준다. 태국은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라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힘든 경우가 많은데, 가이드북에는 똠양꿍, 그린커리 등 향신료 강한 음식만 나와 있기 때문에 쿠나는 끈적 국수라는 걸 소개시켜준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특별한 방법과 태국에선 국수에 설탕을 넣어 먹는다는 특이사항, 길거리 음식 베스트 3 리스트도 있다. 특히 향신료 없이 시원한 국물 맛을 볼 수 있다는 수끼는 먹어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음식 일러스트인데, 분명 만화 그림인데 사진보다 더 세밀하고 먹음직스럽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나가 자세히 그린 음식에 이어 실제 해당 음식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이 사진보다 일러스트의 음식이 더 맛있어 보였다.

 

 

음식 외에도 태국의 교통수단인 뚝뚝, 택시, 수상버스를 이용하는 방법과 집에서 똠양꿍 만드는 레시피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는 <태국 음식과 친해지는 법>은 태국에 처음 가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 리스트가 아닌가 싶다. 단계별로 먹기에 편한 음식을 소개해주는 리스트인데, 우선 첫번째 레벨 1은 누구나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볶음밥, 닭튀김, 팟타이, 무팟뽕커리, 쪽이 있고, 두번째 레벨 2에 가면 끈적국수, 태국의 쌀국수인 꾸어이띠야우, 그리고 팟카파오무쌈, 쏨땀이 있고, 세번째 레벨 3는 너무 유명한 음식들이지만 향신료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똠양꿍, 그린커리, 태국식 파스타가 되겠다.

이 책 덕분에 아무래도 내년 여행지는 태국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용한 정보들이 가득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웹툰 형식으로 음식이 소개되어 있으니, 읽기도 쉽고, 눈에 쏙 들어오기도 해서, 지루한 내용들만 늘어져 있는 가이드북보다 훨씬 더 현지에서 잘 쓰일 것 같기도 했다. 혹시라도 태국에 간다면 무조건 들고 가야 할 필수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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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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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에 은퇴한 형사 호지스는 여느 때처럼 무기력하게 저질 티비 토크쇼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평일 오후마다 아버지가 순찰경관 시절에 들고 다녔던 총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몇 번씩 들어서 유심히 쳐다본다. 그리고 가끔 장전된 총을 입 안에 넣고 겨누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넣어보기도 한다. 아마도 별다른 일 없이 몇 개월이 더 지난다면, 대부분의 퇴직 경찰들이 권총과 배지가 없으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하는 것처럼 호지스의 삶도 그렇게 끝났을 지도 모른다. 부인과는 한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이혼했고, 다 큰 딸은 멀리 떨어져 살고, 그에겐 아무도 없었다. 물론 가끔 정원 손질이며 컴퓨터를 고쳐주곤 하는 흑인 청년 제롬이 있고, 전화하면 그를 반길 옛 동료들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지금 현재 혼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발신인 주소가 없는 편지가 도착한다. 친애하는 호지스 형사에게. 라는 제목으로.

...지금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체포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겠지. 나는 사실 언론에서

a)조커

b)피에로

아니면

c) 메르세데스 살인마

로 불렸던 인물이야.

나는 맨 마지막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들지만!

당신은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내 입장이 아니라 당신 입장에서) 실패했지.

그 편지는 그가 퇴직 전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 중 하나였던, 메르세데스 살인마가 보낸 것이었다. 그 사건은 작년 시티 센터 채용박람회 참석자들 사이로 차를 몰고 돌진해서 여덟 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남겼었다. 범인이 호지스에게 연락을 하게 된 이유는, 도시 역사상 가장 엄청난 흉악범을 잡지도 못했는데 경찰에서 파티까지 열어주며 명예롭게 은퇴한 것이 그의 신경을 긁었던 것이다. 그는 늙고 뒤룩뒤룩 살이 찐 퇴직 형사가 자신의 편지를 받고 자책과 무기력함에 자살하기를 바랬지만, 호지스는 오히려 그의 편지 덕분에 당분간 살아야 할 이유를 얻게 된다.

8주 일하고 4 5000달러라니. 호지스는 감탄한다. 결국 필립 말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문을 열면 싸구려 사무용 건물 3층 복도가 나오는, 추레한 방 두 개짜리 사무실을 상상해 본다. 이름이 롤라 아니면 벨마, 뭐 이런 섹시한 접수 담당자도 두는 거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입이 거친 금발이어야 한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트렌치코트를 입고 갈색 페도라를 한쪽 눈썹까지 눌러쓸 것이다.

웃기는 상상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구미가 당긴다.

극중 호지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몇 번 언급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다. 늙고 지친 퇴직 형사가 미제 사건에 도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스타일은 정통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지는 않다.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호지스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 바로 다음 장면에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독자에게 범인을 오픈 하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두고 보겠다는 거다. 게다가 범인의 일상, 어린 시절, 가족관계, 심리 상태 등등이 거의 호지스 만큼의 비중으로 전개되어 동등하게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특히나 언더 데비스 블루 엄브렐라라는 채팅 사이트를 통해 두 사람이 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패를 보여주고, 미끼를 놓고, 걸려들고 하는 심리 싸움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스티븐 킹 특유의 유머 감각도 여전하다. <내가 알츠하이머 특급열차를 타고 치매의 왕국으로 달리는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겠군> 이라든지, <호지스가 함박웃음을 짓자 주름살이 펴지면서 미남에 가까워진다> 또는, <그녀는 좋아할 만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반짝이는 재치 한 조각, 은근한 분위기 한 자락 없다>, <호지스는 거짓말을 아주 그럴 듯하게 할 수 있는 경찰 특유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당신이 좋아요, 홀리."> 등등... 구성은 탄탄하고, 문장은 허투루 흘려 버릴 부분이 단 하나도 없다. 플롯은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캐릭터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는 전화를 끄고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두드린다. 그 우라질 사이코를 누가 잡든 상관없다고 자신을 달래지만 사실은 상관이 있다. 무엇보다 그가 그 perk(perk라는 단어가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박히다니 우스운 일이다.)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분명 공개될 테니 그러면 그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뭔가 하면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사라지면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 내내 텔레비전을 보며 아버지의 총을 만지작거렸던 날들로.

사실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작가라 새로운 장르에서도 마치 그 동안 자신이 놀아온 무대인 양 종횡무진 달려간다. 애초에 스티븐 킹의 필력을 장르의 틀로 규격화시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40년 동안 발표한 작품들이 주종목인 공포 소설을 비롯하여 판타지와 SF에까지 영역이 확장되어 있었긴 해도, 탐정 추리소설 장르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호러의 제왕이라 불리던 그가 첫 번째 하드보일드 작품으로 올해 에드거 상을 받았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그는 무림의 고수, 올림픽 메달리스트, 소설계의 장인인데 말이다.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작가라 새로운 장르에서도 마치 그 동안 자신이 놀아온 무대인 양 종횡무진 달려간다. 숨가쁘게 휘몰아치는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600페이지까지의 호흡도 어느새 금방 끝나 버리고 만다.

이 작품은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 중이고, 최근 후속작인 <파인더스 키퍼스>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스티븐 킹은 탐정 호지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총3부작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다음 시리즈도 국내에 빨리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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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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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을 이미 두 작품이나 읽었다. 로맹가리의 <유럽의 교육>과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 세상에서>이다. 전자는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독일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빨치산들의 이야기인데 열네 살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야네크는 음악을 듣고 감동할 줄 아는 소년이었다. 후자는 1941년 리투아니아를 배경으로 스탈린 지배하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가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열다섯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리나는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마음을 빼앗기는 소녀였다.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944년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탄광 도시를 배경으로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열여섯 장님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원에서 여동생과 함께 사는 열여덟 소년 베르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침략국인 독일의 탄광촌에 있는 고아원, 그리고 피해국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박물관을 주요 배경으로 전쟁의 막바지인 1944, 그리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1934년의 시간이 교차되어 그려지고 있다. 재미있는 건 두 주인공 마리로르와 베르너는 1권에서는 아예 서로를 모르고, 2권도 중반이 지나서야 겨우 만나게 된다는 것. 그들의 인연은 단 한번 짧게 만나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명백히 보여주는데, 바로 스토리보다 문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시작할 때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작품을 이미 만나보았다고 썼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자, 어쩌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묘사는 마치 그림처럼 선명하고, 대사는 간결하면서도 적확하고, 다양한 비유들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모두 빛이 난다. 시적인 비유로 가득한 문장들은 그저 그 자체로 너무도 아....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된 마리로르. 그녀는 아버지를 색깔로 기억한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모든 것엔 색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팔색, 빨간 딸기색, 짙은 황갈색, 야성의 초록색 등등, 1000가지 짙은 색을 뿜어낸다. 그리고 기름과 쇠 냄새, 자물쇠 날름쇠가 미끄러져 열리는 느낌, 걸을 때 짤랑이는 열쇠고리 소리가 난다. 아버지는 부서장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올리브의 초록색이며, 온실의 플뢰리 양에게 말할 땐 점차 채도가 높아져 가는 오렌지색이고, 요리를 하려 할 땐 선명한 빨간색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대에 앉을 때는 사파이어 빛을 발하고, 일을 하면서 들릴락 말락 콧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피우는 담배 끝에서 프리즘의 파란 불빛이 번쩍인다.

나는 그 어떤 작품에서도 이런 문장들을 본 적이 없다. , 눈을 감고 이 문장들을 떠올려보자. 올리브의 초록색, 채도가 높아져 가는 오렌지색, 선명한 빨간색, 사파이어 빛, 프리즘의 파란 불빛.... 눈앞에서 물감으로 채색을 하듯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다. 베르너가 쓰레기장에서 고장난 라디오를 가져와 고쳐서 여동생 유타와 새벽까지 몰래 방송을 듣는 장면은 이렇다. 낯설고 생경한 언어들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러시아어인지, 헝가리어인지를 듣다가 영국의 뉴스 방송을 듣다가 프랑스어로 빛에 관해 이야기하는 채널을 찾아낸다. 주파수에서 칙칙, 팍팍 소리가 나는 와중에 마치 벨벳 같다고 생각한 프랑스 남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시간이 느려진다. 다락방이 사라진다. 유타가 사라진다. 베르너가 제일 알고 싶은 것을 정확히 집어 내서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 준 사람이 이제껏 있었던가?

"눈을 떠요" 그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그리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쓸쓸한 노래를 연주한다. 베르너에겐 그 노래가 어두운 강을 떠도는 황금 배처럼, 졸페라인을 아름답게 바꾸어 주는 화음의 흐름으로 들린다. 집들이 안개로 바뀌고, 탄갱 속이 채워지며, 공장의 높은 굴뚝들이 떨어지고, 태고의 바다가 거리마다 스며들며, 공기가 가능성을 담고 흐른다.

심야 라디오의 매력을 이렇게 매혹적으로 그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멋진 장면이다. 나도 새벽에 심야 방송을 찾아 듣던 감수성 풍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전국의 무수한 청취자들을 향해 말을 하고 있는 걸 텐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나 혼자만을 위한 방송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목소리가 친구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자신이 외롭다는 말이다. 베르너와 유타가 듣던 낯선 언어의 방송 또한 그들에게는 마치 친구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방송을 들으면서, 그 목소리에 빠져서 자신이 현재 있는 공간마저 지워버린다고 표현된 대목은 이 작품에서 라디오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르너가 듣던 피아노 소리와 유타가 듣던 피아노 소리는 똑같이 체감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라디오는, 음악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들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기억되는 장치이니 말이다.

탄광촌에 있던 소년들은 독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15세가 되면 탄광에서 일해야 한다. 베르너는 탄광에서 아버지를 잃었기에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그는 라디오 조립에 재능을 보여 사람들의 고장 난 라디오를 고쳐주다 나치의 눈에 띄어, 탄광촌에 가는 대신 청년 정치 교육원에 입학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선생의 총애를 받기도 하지만, 비인간적인 교육 방식과 잔인함은 유일한 친구인 프레데리크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그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진다.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베르너와 조류 연구가가 되고 싶다던 프레데리크. 우리가 되고 싶은 대로 될 수 없다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베르너에게 프레데리크가 말한다. "네 문제는, 베르너, 넌 아직도 너만의 인생이 있다고 믿는 거야." 그런 시대였다. 개인이 뭘 원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이념의 시대. 그런데 그 속에서 한 소년이 부여잡고 있는 희망이라니. 오랑주에 피난 온 누군가가 이브리쉬르센에서 짐과 함께 남겨 두고 떠난 세 자녀를 찾고 있다. 오르세 역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내를 찾고 있는 남편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안전하게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하고자 한다. 기차에 태운 여섯 딸의 행방을 찾고 있는 어머니도 있었다. 그렇게 다들 엉뚱한 데서 사람들을 잃어버렸던 그런 시대였다는 말이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참 용감해요."

그녀가 양동이를 내린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베르너가 말한다.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마리로르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박물관에는 전설의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라는 게 있다. 전쟁이 본격화되고 피난길에 오를 때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세 개의 진품 혹은 모조품 중에 하나를 소장하게 된다. 그들은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러다 잠시 파리로 가려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마리로르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전설의 다이아몬드를 찾으려는 나치의 협력자 룸펠이 끈질기게 추적해오고, 마리로느는 라디오를 통해 자신이 즐겨 읽던 책 해저 2만 리를 읽어주며 자신을 도와 달라는 비밀 메세지를 함께 송출한다. 교육원에 있다 선생이 그의 나이를 조작하는 바람에 전쟁 현장에 투입되어 곳곳을 떠돌던 베르너가 우연히 그 라디오를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같은 도시에 머물게 된다.

사실 스토리 자체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오로지 문장의 힘으로 모든 걸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전쟁이라는 걸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고, 아마 죽기 전에 그 비슷한 경험 조차 해볼 일이 없을 나 같은 독자들이라면 전쟁을 둘러싼 이들의 삶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소녀의 삶도, 고아원에서부터 나치의 비인간적인 교육장과 전쟁 현장까지 여러 상황을 참아내야 했던 소년의 삶도, 전쟁이 만들어낸 누군가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빛을 본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고, 자기 자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비극적인 상황들과 끔찍한 일들이 태연히 자행되는 배경 속에서도 이들의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빛나 보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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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아이 고 - 내 남편의 아내가 되어줄래요
콜린 오클리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는 그 사람의 장점 때문이고, 살아가면서 그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단점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부족한 면을 아는 건 함께 살아가는 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이런 사람을 나 아닌 누가 참아줄까','이런 사람이지만 나니까 이해하고 포용하는 거지'의 단계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단계까지 이르게 되려면 결혼을 하거나 함께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들처럼, 삶이 그들을 갈라놓을지라도 서로 못 견디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해야만 한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말이다.

지난 4년 동안 바로 이 순간을 피하려고 해온 모든 일을 나열해본다. 요가를 했다. 나는 요가를 싫어한다. 인류가 아는 모든 채소를 굽고, 데치고, 삶고, 볶았다. 나는 채소를 싫어한다. 숨쉬기 운동. 대략 1,467컵의 스무디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략 1,467컵의 스무디를 마셨다. 블루베리를 먹었다. 석류를 먹었다. 녹차를 마셨다. 적포도주를 마셨다. 피시 오일을 먹었다. 코엔자임 Q10을 먹었다. 흑사병을 피하듯 간접 흡연을 피했다.

그랬는데도 이렇게 되었다.

현재 대학원에서 상담 전공 석사과정을 하고 있는 데이지는 4년 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아 수술과 화학치료, 방사선 치료를 거치고 6개월마다 혈액 검사를 해오며 깨끗하다는 결과를 받아서 암이 치료되었다고 믿었다. 1년 전 마지막 혈액 검사를 받고는 암 치료 3주년 파티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발인 것 같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암이 온몸으로 전이됐다고, 간에도, 폐에도, 뼈에도 심지어 뇌 뒤쪽에도 오렌지 크기의 종양이 있다고 말이다. 종양 위치가 좋아 쉽게 제거를 할 수는 있지만, 치료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단지 상황을 연기시킬 수 있다고. 4기의 생존율은 20프로, 그러니 대략 4개월에서 6개월이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이라고.

대체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두 번이나 암에 걸리다니!

그건 번개를 두 번 맞는 것과 비슷한 확률이 아닐까?

죽음이란 나이 든 노인이나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아프리카의 아이들, 자전거를 타고 재수 없는 시각, 재수 없는 교차로를 지나다 차에 치이는 아빠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지려 하고, 날씬하고 건강하고 아픈 데도 없는 스물일곱 살 여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마치 레스토랑에 갔는데 웨이터가 엉뚱한 요리를 가져온 것 같다. 죽는다고? 아니, 분명 뭔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그건 주문하지 않았다.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4개월이나 6개월이나 1년이라면 그 기간 동안 무얼 해야 할까? 만약 특별히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다면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여행을 가보거나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거나,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배우자가 있거나, 자식이 있거나, 아니면 모시던 부모님이 계실 경우에는 내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그들에게 쓰고 싶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내가 떠나면 그들은 홀로 남겨져 나의 빈자리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비디오 사용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너무도 사소해 보이는 이런 행동이 사실 자신이 없을 때 남겨진 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 죽음의 잔인함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가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외출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가기 전에 남편에게 이것 저것 일러둘 게 너무나 많다. 냉장고에는 뭐가 있고, 이건 어떻게 데워 먹으면 되고, 아이 이유식은 언제 주고, 모유 유축 해놓은 건 어떻게 하면 되고.... 등등등... 단 몇 시간 자리를 비워도 이런데, 평생 남편과 아이 곁을 떠나게 되었다면 어떨까. 내가 없는 빈자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냉장고에도, 안방에도 필요한 일들 목록을 좍 뽑아서 붙여놓고, 그래도 부족해 며칠을 일러두고, 설명해두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질 않을 것이다. 그가 혼자 남으면 집이 어떻게 될까. 또 아이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게 될 것 같다. 떠나야 하는 나보다, 남겨져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더 불행해 질 까봐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 작품의 설정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으니 말이다.

"잭의 아내를 찾고 있어."

케일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나는 케일리가 제대로 들었는지 궁금하다. 다시 말해줘야 하는 걸까. 대신, 준비도 제대로 못한 설명을 시작한다. "나중에...... 내가......" 내겐 그처럼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이 꼬인다. 이렇게 정리한다. "잭이 잘 지내게 해주고 싶어."

데이지는 자신이 없으면 혼자 남겨질 남편 잭을 생각해 본다.

내가 죽으면 누가 그 양말을 치워줄까?

내가 죽으면 누가 잭의 어깻죽지 바로 아래를 긁어줄까?

내가 죽고 나면 누가 창문 틈을 막아주고..... 장을 보러 가고, 침대 정리를 하고, 잭이 매번 식사로 망할 시리얼을 먹지 않도록 해줄까?

그녀는 생각만으로 공포에 질려 벌떡 일어나 앉는다. 자신은 죽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잭은 어떻게 되는 걸까? 데이지는 잭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뜻한 사람.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더러운 양말을 치워줄,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잭의 아내를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남편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을 현재의 아내가 찾는다. 어찌 보면 현재의 아내만큼 남편에 대해 샅샅이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건 그럴듯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가 뭘 싫어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니까 말이다. 그에 맞추어 그가 좋아할 만한 여자, 그의 단점도 수용해줄 수 있을 만한 여자를 찾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렇게 딱 맞는 여자를 찾았을 때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내가 찾아낸 여자가, 내가 없는 미래를 함께 할 거라는 사실에 대해 수용하는 것은 머릿속으로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이 작품이 진짜 재미있어 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부터이다. 데이지가 잭의 아내로 찾겠다고 선언한 전반부가 아니라, 잭의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을 찾고 난 다음 말이다. 내가 죽더라도 당신 만은 행복해야 해.가 사랑의 극강 멘트 같지만 현실성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없어도 당신 나만 사랑해야 해. 나를 절대 잊으면 안돼.라고 말하지는 못할 망정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나 나는 잊어버리고 행복해야 해.라고 한다는 건 정말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판타지 아닌가.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의 판타지나 죽을 병에 걸린 아내에 대한 흔해빠진 신파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드라마를 그려내고 있다.

잭이 나를, 진짜 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예쁜 나를, 강하고 능력 있는 나를, 그가 사랑에 빠졌던 나를.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데이지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우리는 데이지가 암이 재발했을 때 가졌을 심정부터, 잭의 아내를 찾게 된 계기, 그리고 이후에 벌어지는 질투와 절망과 안타까움 등등의 복잡한 심경 변화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단 한번 화자가 바뀐다. 데이지가 아닌 잭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마지막 이야기는 짧은 만큼 임팩트가 강한 울림을 남겨준다. 자신이 퉁퉁 부은 채 볼썽사나운 꼴로 누워 있는 것을 보이기 싫어서 수술을 할 때 잭이 오지 않기를 바랬던 소녀 같았던 데이지 만큼이나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의 예쁜 마음이 잔잔하게 마음에 파도 친다. 어쩌면 평생에 단 한번, 우리는 이런 사랑에 빠진다. 나보다 상대가 더 중요한, 나만큼이나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랑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올 여름 가장 완벽한 사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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