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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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내 집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여자가 내 아내인가. 저 아이들은? 아내는 미소 짓는 얼굴로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는데, 살진 턱과 화장으로 간신히 감춘 기미와, 화장으로도 감추지 못한 눈가의 잔주름이 주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우울했다......

내가, 내 아내가 아니야. 저건, 내 아이들이 아니야. 마치 낯선 집에 잘못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견고한 구조라고 여겼던 것들은 깨어지고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이미 깨져 있던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동생들과 병든 부모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점심과 저녁, 2개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하루 열 몇 시간씩 일했던 남자. 결혼 후에도 수당이 있든 없든 밤늦게까지 일했고, 상사에겐 무조건 복종했으며, 경우에 따라선 몸종처럼 봉사하길 자청했던 남자. 일이 그의 취미였고 사랑이었으며, 아내와 아이들이 일밖에 모른다고 불평해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 나간다.

그 동안 나는 뭐하고 살아온 거야.

나는 도대체 여태껏 뭘 해왔던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들었고, 급기야 '난 실패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러 시도 때도 없이 멍해지고, 밥맛도 없어지고, 이제까지의 삶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억울해지기도 한 것이다. 전에 없던 건망증, 마음 속의 분노 들은 어떤 울분으로 이어져 결국 아내와의 말다툼 끝에 평생 처음으로 아내의 뺨을 때리게 만들고 만다.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살던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남자의 삶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금이 가버리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자금 담당 이사로 근무 중인 50대 중반의 남자는 그리고 시인이자 화가인 천예린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예전에 만났더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자신의 생에 대한 후회와 자각을 하게 된 그 시점에 만났기에, 뻔한 일상에 사로잡힌 평범한 아줌마인 자신의 부인과 너무도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너무도 뻔한,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공산품 같았던, 황폐하고 부식된 삶을 그제야 깨닫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무런 긴장과 감흥이 없는 무난한 부부 관계는 도발적이고, 퇴폐적이면서도 진취적이고, 자신보다 무려 네 살이나 위였지만 어느 순간에는 30대 초반처럼 보이기도 하는 매력적인 여자 천예린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만다.

 

그것은 사멸한 줄 알았던 내 옛 꿈의 작은 단서였다. 네 회화적 직관이 놀랍구나, 라고 하던 선생님의 말소리도 선연했다. 천예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완전히 잊었던 삽화들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서 도주한 남자 김진영은 천예린과 단어 그대로 '미친' 사랑을 한다. 생애 한 번쯤은 이렇게나 난폭하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바닥까지 가보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부도덕한 남편이자 무책임한 아빠가 된 그 남자의 사랑의 여정은 그렇고 그런 수순대로 이어진다. 섹스는 했으나 사랑은 하지 않았던 천예린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쫓아서 케냐로, 모로코로, 카사블랑카로, 스코틀랜드로, 그리고 시베리아로 무작정 여정을 시작한다.

이 작품이 그저 부도덕한 러브 스토리나, 막장 불륜 스토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행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 죽음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천예린은, 그녀의 성격대로 앉아서 죽음에게 유린당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김진영도 물론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벌거벗고 함께 시시덕거리며 밥 먹고 똥 싸고 살 때조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떠날 때까지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다. 작품 속의 화자는 대부분 김진영 자신이지만, 부분 부분 남겨진 그의 아들의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지가 회사 공금을 챙겨서 여자를 쫓아 떠나가고, 온 나라에 IMF 한파가 몰아닥치고, 아파트가 압류되고, 어머니가 쓰러져 뇌 수술을 받고, 아버지 대신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의 아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불편한 여정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지만, 남겨진 가족들의 모습에서 현실적인 그림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 자신에겐 목숨마저 걸 정도로 절박한 사랑이, 남겨진 가족에겐 어떤 상처가 되는지 말이다.

제목만큼이나 이력이 독특한 책이다. 이 작품은 1999 '침묵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2600여 매나 되는 긴 분량이었기에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박범신 작가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이 많았거나 참을성 없이 비명을 질러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잘 보이지 않는 뒷줄 책장에 처박아두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려고 애썼지만, 무려 7년이 지나서 그 책을 다시 꺼내 든다. 어차피 떠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게 낫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긴 소설을 1500여 매 이하로 아프게 깎아냈고, '주름'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 다시 출간한다. 그리고 다시 9년여 시간이 지나, 다시 300여 매쯤 깎아내고 결정적인 장면의 서술을 일부 바꾸어 다시 출간된 것이 바로 이번에 출간된 버전이다. 이후에 다시 7~8년이 지난 뒤에 또 깎아내는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시간의 주름을 켜켜이 쌓아가는 대단한 감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단 한 줄로 삶의 유한성이 주는 주름의 실체를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작가로서 성숙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거라는 박범신 작가의 겸손함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기존에 출간되었던 다소 긴 버전의 이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지금 출간된 버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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