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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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다른 여자들은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 그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에 자신이 만족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과 친구가 된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 여자들은 항상 떠난다고, 여름에 혹은 여름이 끝나자마자 영원히 떠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친밀한 관계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유일한 이유로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목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낫겠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도, 다른 여자아이들과의 우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여겨질 때조차도 친구를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p.39


미티는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에 위치한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어머니의 친구 베델과 10년째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산 지 십년이 되었고, 베델의 나이가 벌써 일흔아홉이라 미티는 외출했다 돌아올 때마다 베델이 무사한지 확인한다. 여러 해 전부터 집들이 속속 매각된 후 공유 숙박시설이나 여름 별장으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미티와 베델은 동네에 남은 마지막 거주민이었다. 미티는 끊임없이 들고 나는 세입자들의 삶을 구경하곤 했다. 미티의 옆집은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벽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난 오년 간 비어 있다가 최근에 한 커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기하학적 구조의 대저택에는 이국적인 가구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미티는 새 이웃이 궁금해진다. 


테크 산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남자친구 서배스천을 따라 이곳에 온 레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정작 레나는 자신의 몸을 위해 노력한 적이 없기에 그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지만 말이다. 빼어난 미모와 다정한 남자친구, 풍족한 생활. 조금의 걱정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레나의 고민은 자신이 서배스천을 만나기 이전의 삶이나 그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왜 자신의 삶에 온전한 기억이란 남자친구와 관계된 일뿐인지 레나는 늘 궁금하다. 그러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레나는 허름한 이웃집에 사는 마티와 베델에게 호감을 느낀다. 자신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여성 간의 유대를 보며 묘한 동경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질 수도 있었을 다른 삶을 떠올릴 때 레나는 천장 곳곳에 부착한 고리에 담쟁이 식물 화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아파트를 상상한다. 오래 방치된 촛불에서 촛농이 흘러내려 커피테이블을 어지럽히고, 침대는 엉망이며, 담요는 몸이 빠져나간 형상 그대로 헝클어져 있다. 샤워기에선 물이 계속 쏟아져 거실 창문이 수증기로 희뿌얘졌고, 책이 넘쳐나는 책장은 레나만의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다. 레나는 자신의 집이 베델의 집처럼 모든 것이 과도하게 넘쳐나기를, 허술하고 풍족하기를 바란다. 코르셋의 끈처럼 바짝 당겨져 정교한 효율성이 지배하는 현재의 삶과 반대되는 삶.                  p.322~323


온갖 오래된 물건들로 가득찬 허름한 집에 사는 미티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그녀는 살아갈 목표도 재산도 없지만, 슬픔과 걱정은 많고, 밖게 나가기를 두려워한다. 타인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인형의 집'에 사는 레나는 아름다운 외모와 부유한 남자친구로 인해 화려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롭고 공허하다. 부족할 거 없어 보이는 그녀는 왜 아침마다 자신이 죽어 있다고 느끼면서 눈을 뜨는 걸까? 왜 하고많은 것 중에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일까? 자신의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와 자신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한 여자가 만나 조금씩 친밀해지며 우정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을 둘러싼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속도감을 더해간다. 


이 작품은 두 권의 시집을 연이어 베스트셀러에 올린 올리비아 개트우드의 첫 소설이다. 굉장히 흡입력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시인이라 그런지 확실히 언어를 다루는 방식이 놀라웠는데,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했다. 스릴러적인 요소가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고, 여성들 간에 이루어지는 동질감과 시기, 질투, 욕망에 관한 대담한 탐구가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미티는 타인이 자기를 묘사하는 최악의 방식을 상상하며 두려워했고, 레나는 어딘가 결함이 발견되면 자신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미티는 스스로를 베델의 집에 가두었고, 레나는 남자친구에게 모든 것을 통제받으며 산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서 보면 비슷했다. 그래서 서로를 한 눈에 알아본 걸지도 모르겠다. 섬세한 심리 묘사들이 너무나 뛰어나서 누구라도 이 작품을 읽으며 미티와 레나에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나 시적인 문장과 사색적인 통찰로 가득한 심리 스릴러라니...  그런데 이 소설이 데뷔작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웨스 앤더슨 제작사와 마고 로비 프로덕션의 참여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미티와 레나라는 캐릭터를 어떤 배우가 맡을지, 스크린에서 펼쳐질 모습도 배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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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완전 범죄
호조 기에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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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었던 추리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이런 작가를 발굴해서 번역 소개해주는 출판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조합뿐만 아니라 반전과 수수께끼, 미스터리적인 구성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 복선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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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2025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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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Die Liebe verwirrt nicht alles, sondern vermischt es.” 도이치는 눈앞에 있는 괴테의 명언을 독일어로 직역해 시험 삼아 소리 내어 읽어봤다. 그러자 갑자기 그 문장이 괴테스럽지 않게 느껴져서 놀랐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괴테가 한 말이라면, 18, 19세기 독일어를 언젠가 누군가가 영어로 번역했고 또 그것을 현대의 일본인이 독일어로 바꾼 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번에는 일본어로 옮겨봤다. 그러자 조금은 괴테스러워졌다.             p.44


도이치는 결혼 25주년 기념일에 딸과 아내와 함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축하를 하기로 한다. 도이치는 레드 와인을, 딸은 소다 칵테일, 운전을 맡은 아내는 논알코올 식전주를 선택했다. 딸이 마련한 축하 자리라 더 기분좋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시간이었다. 도이치는 일본의 괴테 연구 일인자로 불리는 학자다. 꾸준히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등 실적을 쌓아 정교수가 되었고, 일본독일문학회의 회장도 맡고 있다. 삶에서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영문학을 전공하는 딸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식후에는 세 사람이 각자 고른 디저트를 먹으며 곁들여 홍차도 마셨는데, 얼그레이 티백 봉투 꼬리표 부분에 명언이 인쇄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딸이 고른 건 <실낙원>의 문구, 아내가 고른 건 <플라톤>의 문구였는데, 자신이 고른 건 우연찮게도 <괴테>의 문구였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그런데 분명 괴테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평생 괴테를 연구해온 자신조차 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는 거다. 괴테 연구자답게 그는 문구의 원문을 찾아 문맥 속에서 정확히 뜻하는 바를 알아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낯선 문장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주장해 온 이론을 완벽하게 요약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명언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한 도이치의 탐색은 어느새 인용과 진실, 언어와 믿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적 모험으로 변해간다. 우선 144권에 달하는 방대한 바이마르판 전집을 바탕으로 괴테가 쓴 약 9만 3천 개의 단어 전체를 색인화하는 프로젝트인 '괴테 사전'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해봤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괴테 전집을 다시 찾아 읽고, 만나는 학계 사람들마다 붙들고 물어 보아도 여전히 정확한 출처를 찾기란 어려웠다. 과연 이 문구는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말은 거짓인가, 아니면 새로운 진실인가? 그야말로 하나의 문장이 삶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이치의 명언 찾기 여정은 마침내 가족들까지 함께 독일로 데려다 놓고, 그곳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찾아 헤매던 답에 도달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이치, 괴테의 그 말 말이지, 자네는 그걸 찾을 수 있을게야. 그 말이 진짜라면."

도이치는 미나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수록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라는 건 무슨 뜻일까? '진짜 괴테의 말'인가? 아니면...... 도이치는 일단 독일어판 괴테 전집을 펼치고 명언을 찾아봤다. 그러자 전에 없던 의문이 떠올랐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건 '진짜'인가? 사랑은 모든 것을 각각의 모습 그대로 이을 수 있나?                  p.157


이 작품은 스즈키 유이의 첫 장편소설이다. 일본의 신인작가에게 수상하는 아쿠타가와상을 작년에 수상했는데, 굉장히 어린 나이인 23세이어서 더 화제가 되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 연간 1,000권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라고 한다. 고전문학을 폭넓게 탐독해 온 이력을 바탕으로 30일 만에 쓴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실제로 저자의 부모님 결혼기념일 식사 중 홍차 티백에 적힌 명언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고 한다. 01년생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 21세기 새로운 고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니 너무 궁금했다.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할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통찰과 지식이 담긴 소설이다'는 심사평을 받았는데,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살짝 의심도 들었고 말이다. 


작가가 짧은 기간에 쓴 작품인 만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읽었다. 일반적인 소설처럼 스토리 위주로 진행되는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집중해서 읽을 정도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문학적 장치와 인용으로 가득한 부분 또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이 학자이기 때문에 수많은 학술적이거나, 문학적인 인용들로 가득하다. 괴테부터 몽테르, 볼테르, 뉴턴, 니체, 보르헤스, 말라르메까지 그들이 했었던 말들 혹은 했다고 오해되는 말들까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인문학 지식들을 수많은 명언들로 풀어내는데, 그 과정이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중심 서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로 가져가면서 주인공이 명언의 진위를 찾아 가는 과정을 그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풀어냈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왜 일본 언론은 그를 움베르토 에코, 칼비노, 보르헤스에 견주며 “일본 문학의 샛별”이라고 평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만큼 고전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토대로 쓰인 작품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2000년대생으로는 최초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문학계를 뒤흔든 젊은 작가의 놀라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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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제인의 모험
호프 자런 지음, 허진 옮김 / 김영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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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삶은 산 사람의 몫이다. 나는 살아 있었고, 수전과 조애나도 살아 있었다. 그 사실에 대해 나는 끝없이 감사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세상 전체가 멈춰야 할 것만 같다. 내 세상이 멈췄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계속 흐르고 사실은 나도 그렇다. 커피를 끓이고, 빈 깡통을 선반에 다시 올려두고, 텃밭을 쪼아대는 까마귀를 보고 쫓아낸다. 허리를 굽혀 호박이 얼마나 자랐나 들여다보고, 사고 싶었던 소 한 마리를 떠올리며 잠깐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p.202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의 서사를 위해 그외 다른 인물들의 서사는 축소되거나 생략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길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물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고 드라마가 있다는 것을. 누구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잠깐 등장했던, 주인공 헉이 좋아했던 메리 제인이라는 소녀가 이야기의 전면에 나섰다. 누구나 책에 담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고전의 재해석이다.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메리 제인은 겨우 28쪽에만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소설 속에서 헉은 메리를 두고 '그녀는 내가 지금껏 본 어떤 여자보다 용감했다. 정말 용기로 가득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호프 자런은 이 책을 너무 좋아해서 여러 번 다시 꺼내 읽곤 했는데, 읽을 때마다 메리 제인이라는 인물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고 한다. 쉽게 속아 넘어가는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 사이에 간극이 너무 컸고, 순종적인 태도와 헉같이 대담한 소년이 그런 그녀에게 푹 빠진다는 설정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여자애,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라는 속삭임이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때부터 박물관과 도서관, 유람선과 카누를 따라 진짜 '빨강 머리 아이'를 찾아 나서는 10년에 걸친 긴 여정이 시작된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 <제인 에어> 속 캐릭터를 주역으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써낸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으며, 고전이 끝내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들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메리 제인의 모험>을 쓰게 된 계기가 된다. 그렇게 해서 '메리 제인'의 진짜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피터 폰드 아저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살아온 이야기 말이다. 자라고, 몸집이 커지고, 나이가 들고. 그러자 내가 집을 떠난 이후로 만난 모든 사람, 내 삶에 겨우 하루이틀 들어왔던 사람들까지도 전부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애를 써도 당신에게 말해줄 수 없는 이야기. 책 한 권을 채울 정도의 이야기. 이 깨달음이 오래 남았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내 삶은 달라졌다.            p.446


엄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열네 살 메리 제인은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를 통해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실크 원피스 세벌이랑 찰스 디킨스 책을 짐으로 챙기고, 난생 처음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멀리 가서도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감해진 기분도 들었지만,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아 무섭기도 했다. 그렇게 배를 타고 긴 여정을 시작하며, 메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집을 떠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 아무리 애써도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들을 직접 경험하는 어린 소녀의 드라마틱한 여정은 우리를 19세기 중반으로 데려간다. 세상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하는 선한 마음과 옳은 일을 하려는 의지,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 마인드가 페이지마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랩걸>이라는 아름다운 과학책을 썼던 호프 자런의 첫 번째 소설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주인공 헉이 좋아했던 메리 제인이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준다. 최근에 읽었던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에서는 역시 같은 원작에서 흑인 노예 '짐'의 시선으로 새로운 서사를 보여줬었는데,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이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너무 궁금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중반, 미국 중심부를 관통하며 흐르는 미시시피강의 상류이다.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행을 떠나는 열네 살 소녀의 성장기는 과학자다운 역사 연구와 현장 답사로 더욱 생생하게 펼쳐진다. 고전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항상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과학자’로서, ‘여성’으로서, ‘여성과학자’로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걸어온 호프 자런이기에 소설로서도 그 의지를 제대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 대부분은 실제 19세기의 장소와 사건,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미시시피강의 상류를 따라 메리와 함께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행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다. 자,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터질 듯한 희망으로 가득한, 이 눈부신 모험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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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나의 표현력을 위한 필사 노트 - 뭉툭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어주는 표현력 되찾기 하루 한 장 필사 노트
유선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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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필사 열풍을 이끌었던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의 후속작이 나왔다. 전작이 '어휘'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표현'에 중점을 둔 문장들로 꾸렸다. 책 자체도 예쁘고, 필사하기에 좋게 쫙쫙 잘 펴지는 양장본인데다, 구성이 매우 뛰어난 책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좋은 문구들만 모아서 베껴 쓰는 개념이 아니라, 필사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단계별로 제시되어 더 좋다. 표현과 친해지는 첫 번째 단계를 시작으로 표현력을 기르는 비결인 짜임새와 비유에 대해 배워보고, 마지막으로 표현력이 주는 힘을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을 필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따금 빤히 아는 낱말인데 소리 내어 말하거나 손으로 쓸 때 새삼 낯설게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는데 막상 말이나 글로 사용하려니 어색하다면 듣고 보기는 했어도 입이나 손과 같이 몸을 써 사용한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이 책과 함께 문장을 눈으로 읽고, 그 문장으로 입으로 소리 내 다시 읽어 보자. 종이에 옮겨 쓸 때는, 쓰고 있는 글자를 동시에 나지막이 소리 내면서 필사하면 더 좋다. 어감을 익히는 데 말소리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프리드리히 니체 <나의 행복, 윌리엄 셰익스피어 <폭풍우>, 이제니 <사과와 감>,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김현 <말들의 풍경>,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은희경 <아내의 상자>, 헨리크 입센 <유령>, 정세랑 <덧니가 보고 싶어>, 대실 해밋 <몰타의 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쳐> 등 저자가 고심해서 고른 문장들은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만들어졌다.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고, 천천히 필사를 하며 마음에도 담는 시간이었다. 



유선경 작가는 30년 넘게 매일 글을 쓰고 있으며, 1993년부터 라디오 방송에서 글을 썼고, 일주일에 5권 이상 책을 읽는 다독가이기도 하다. 또한 중학생 때 처음 필사하기를 시작했고, 열아홉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노트에 옮겨 써서 그 분량만 10포인트로 1,500매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노하우와 데이터를 담은 것이기에 여타의 필사책들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단순히 좋은 문장을 옮겨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표현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책의 왼편엔 저자가 직접 고른 문장들이 있고, 오른편엔 필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그 아래에 저자가 쓴 메모가 있다. 메모에는 해당 표현에 대한 추가 설명과 작품에 대한 배경, 필사를 더 와닿게 하는 방법 등 표현력을 기를 수 있는 저자의 상냥한 가이드가 담겨 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창작이 되려면 사유가 필요하다고 조목조목 짚어주고, 필사하기 전에 꼭 소리 내어 읽으라고 당부하며 글의 짜임새와 운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질을 '호모 엑스핑고(Homo expingo, 표현하는 인간)’라고 명명했다. 인류가 이토록 번성한 비결은 고립이 아닌 협력에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한 도구는 이심전심이 아니라 언어라는 표현이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타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알리고 싶어 한다. 이해해야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력과 표현력을 늘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책 읽기와 필사이다. 저자는 각 장 사이사이 '호모 엑스핑고로서 표현하기'라는 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두었다. 필사 노트를 차례로 따라가는 동안, 스스로의 글을 써볼 수 있도록 다양한 미션을 준다. 직유나 은유 등의 비유법을 써서 이루고 싶은 소망 등을 표현해보기, 당신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잇다'의 순간을 떠올리고 그 존재를 표현해보기 등등 뭉툭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음어주는 표현력을 배우고 실천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읽기가 경험이라면 필사는 체험이다. 이 책에 수록된 동서고금의 작가들이 내놓은 문장들을 매일 필사해보며 표현력을 길러 보자. 저자가 제안하는 필사 방법은 이렇다. 먼저 문장을 눈으로 읽고, 그 다음 입으로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보고, 그 다음에 옮겨 쓴다. 쓰고 있는 글자를 동시에 나지막이 소리 내면서 필사하면 더 좋다. 차근차근 이 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필사하기 딱 좋은 계절, 읽고 쓰는 시간을 통해 어휘력 너머, 표현의 깊이를 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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