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비극 - 그리스 극장의 위대한 이야기와 인물들
다니엘레 아리스타르코 지음, 사라 노트 그림, 김희정 옮김 / 북스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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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찾던 범인이었다. 수사관과 범인이 동일 인물이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한 하인은 왕좌에 오른 나를 보고서 두려운 마음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왕을 살해했다고 거짓말했다. 그런데 국왕 살해는 내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가 아니었다. 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모든 일은 내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벌어졌다.              - 소포클레스, '오디이푸스왕' 중에서, p.82


사랑하는 두 사람 앞에 죽음의 신이 나타나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상태를 설득해서 대신 죽게 만들 수 있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두 사람 중에 사랑하는 감정이 죽음에의 두려움보다 앞서 선뜻 내가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그런 마음을 받아들여 나 대신 죽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에우리피데스의 초기 비극인 <알케스티스>의 내용이다. 주인공인 아드메토스 대신 아내인 알케스티스가 남편 대신 죽겠다고 자처했고, 남편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살아 남는다. 알케스티스는 죽어서 저승으로 떠나지만, 헤라클레스가 그녀를 찾아내 다시 이승으로 데려온다. 죽음에서 되살아나 소생한 알케스티스는 다시 돌아온 삶이 행복할지 실망스러울 지 알 수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만으로 가슴 벅찬 기쁨을 느낀다. 




기원전 5세기에 찬란히 꽃피었던 그리스 비극은 2,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공연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로 유명한 사람은 아이스킬로,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그들의 작품은 33편에 불과하다.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고뇌와 성찰,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탐구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 책에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의 작품 8편과 사티로스극(익살극) 1편, 그리고 고대 희극 작가 중 유일하게 완전한 작품이 전해지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전을 간추려 수록했고, 주인공들을 삽화로 그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그리스 비극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번 비극은 사랑하는 남편 아드메토스의 심장을 계속 뛰게 하기 위해 자신의 심장 소리를 포기한 젊은 여인 알케스티스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은 신비롭고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어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그 감정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서 아무도 진실을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줄 수 있을까?                - 에우리피데스, '알케스티스' 중에서,  p.149~151


세상의 끝, 마지막 경계 아래에 심연으로 떨어지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있다. 허공을 향해 솟아 있는 바위 꼭대기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쇠사슬에 묶여 있다. 제우스의 뜻에 굴복할 생각도, 잘못을 빌거나 충성을 맹세할 마음도 없었던 프로메테우스는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까? 오이디푸스 왕은 나라에 전염병이 퍼지고, 사람들이 죽어 이승의 집이 비어 가고 저승은 흐느낌과 비탄으로 가득 차니 그것이 어떤 범죄에 대한 형벌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신이 무슨 이유에서 징벌을 내리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찾아내려던 범인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바로 자신이었으니,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그리스 최고 극작가들이 선사하는 그리스 비극 작품들은 전쟁과 죽음, 사랑과 배신, 살인과 희생 등 인간사의 온갖 감정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기에 피 맺힌 복수극과 진짜 영웅들의 이야기 등 자극적이고도 웅장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해 페이지가 쓱쓱 넘어간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프로메테우스, 헤르메스, 제우스, 오이디푸스, 헤라클레스, 안티고네 등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그리스 비극을 실제로 읽거나 본적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원전 자체는 워낙 분량이 방대해 선뜻 읽어 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책은 분량 자체는 압축했지만 원작의 대사와 표현을 고스란히 살려서 특유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좋았다. 게다가 그리스 비극은 여전히 각종 문학 및 영상 작품의 원전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책 한 권으로 그 원형을 만나볼 수 있으니 너무 실용적이고 좋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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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쌤의 과학 풍딱지 1 : 전기 - 의문의 친구, 일렉풍 - 초등 과학사냥 학습만화
양선모 그림, 강주현 글, 장풍(장성규) 기획 / 메가스터디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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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스터디, 엠베스트의 대표 과학 강사 장풍 선생님의 첫 학습 만화가 나왔다. 20년간 교육 현장에서 중등 과학과 고등 과학을 가르쳐 온 노하우를 정말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아이들이 놀이처럼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장풍쌤이 수업을 할 때 날리는 시그니처, '풍딱지'로 과학에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고 모험을 떠나는 이 시리즈의 첫 번째 테마는 '전기'이다. 




자, 시리즈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장풍쌤의 풍마니(장풍 마니아)들이다. 딱지 대장이지만 과학 무식자인 정상, 호기심 넘치는 과학 탐험가 나연, 음식 앞에서 용감해지는 별, 이렇게 세 명의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들을 주축으로 정상의 동생인 1학년 하이, 나연의 이모이자 책방을 운영하는 단비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어느 날 정상이는 바닥에 떨어진 오각형의 딱지를 발견하고, 딱지 대장답게 바닥에 멋지게 내려친다. 소리 마저 굉장했는데, 그 후로 '풍'이라고 하는 의문의 생명체가 나타나면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풍은 게임기 배터리를 먹어 화면이 안 나오게 만들고, 온 동네에 정전이 되게 만들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과연 풍의 정체는 무엇일까. 




풍이를 따라간 하이를 찾기 위해 정상이와 친구들은 장풍쌤과 함께 뒤를 쫓기 시작한다. 풍이 전기를 흡수하고 점점 몸집이 커지면서, 풍이 지나간 주변이 모두 정전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풍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세계의 민간 설화나 전설에 대해 연구해온 단비 덕분인데, 풍에 관련된 전설을 책에서 읽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그 정체가 풍별에서 온 일렉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상이가 딱지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일렉풍을 풍별과 연결하는 스퀴스였고, 다시 일렉풍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도 그 스퀴스로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일렉풍을 어떻게 풍별로 보내느냐인데, 급기야 마을에 화재가 일어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 과연 이들은 무사히 풍을 있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초, 중등 교과 연계된 스토리를 따라 가면서 자연스럽게 기초 과학의 원리와 개념을 배울 수 있는 학습 동화로서 <장풍쌤의 과학 풍딱지>가 유일무이하게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다. 바로 다른 학습만화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장풍쌤만의 생생한 강의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QR 코드만 찍으면 학습 만화 속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장풍쌤의 강의를 만날 수 있다. 책을 읽기 전 선행 강의를 비롯해, 5개의 장마다 각각 강의를 제공하고 있어 주요 개념들을 익힐 수 있다. 메가스터디 과학 강사 장풍쌤의 명성을 책만 구입하면 무료로 만나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이다. 


그 외에도 교과서에 등장하는 추가적인 과학 정보나 실생활에서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을 정리한 ‘너만바 과학 노트’, 본문 속 과학 내용을 다시 한 번 복습할 수 있는 ‘속전속결 QUIZ’ 등 다양한 코너에서 어린이들이 과학을 더 재미있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특별 부록으로 '스폐셜 딱지'를 제공하고 있어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딱지와 1권에 등장한 풍 캐릭터의 성격과 능력치가 새겨진 풍딱지까지 만날 수 있으니, 친구들과 다양한 놀이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생활과 아주 밀접하고 친근한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풍쌤의 초등과학 학습만화!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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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시즈닝의 예술
제임스 스트로브리지 지음, 정연주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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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하게 잘 구운 스테이크에 흩뿌린 햇빛에 반짝이는 흰색 소금 플레이크. 버터 향을 풍기는 으깬 감자에 가미한 실크처럼 고운 훈제 해염. 손끝에서 우아하게 떨어져 그릴에 구운 아스파라거스에 올라앉은 무작위한 형태의 완벽한 가니시. 한 꼬집 넣을 때마다 식재료의 맛은 달라지고 우리가 먹는 방식도 변화한다. 나는 소금이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p.7


최근에 지인에게 선물을 받았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너무 예쁜 소금 세트였는데, 함초, 블루베리, 복분자 천일염이 각각 보라, 핑크, 베이지 컬러로 맛보기도 전에 눈이 즐거웠다. 요즘에는 소금도 이렇게 예쁘게 나오는구나 싶었다가 생각해보니, 언젠가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가 소금이 종류별로 플레이팅 되어 나왔던 게 기억이 났다. 좋은 고기의 맛도 중요하지만, 어떤 소금을 찍느냐에 따라서 그 풍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소금은 요리를 완성할 수도, 망칠 수도 있다. 그 어떤 다른 재료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풍미를 변화시키거나 맛을 향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셰프이자 TV 진행자, 포토그래퍼인 제임스 스트로브릿지가 소금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이 '내 모든 소금 마법 주문 모음집'이라고 말한다. 제대로 된 손만 만나면 소금은 요리의 연금술이 되어준다고 말이다. 수년간 소금을 깊이 탐구해 온 셰프로서 소금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소금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나에게 있어서 레몬 소금절임이란 마치 병에 담긴 햇살과 같다. 복합적인 풍미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해산물 요리에서 바비큐 치킨, 맛있는 타불리와 멋진 리소토에 이르기까지 내 요리를 많이 향상시켜 준다. 내 레몬 소금절임 레시피는 훈제 해염과 장미 꽃잎, 카디멈을 가미해서 정원 안개 속을 떠도는 자욱한 바비큐 연기와 향기로운 향신료, 활짝 핀 꽃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여름의 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p.92


모든 소금은 해수를 이용해서 바로 생산하거나 수백만 년간 엄청난 지각 압력으로 지하에서 압축 및 건조된, 오랫동안 잊힌 바다에서 형성된 암염 퇴적물에서 만들어 낸다. 소금은 생산하는 방식에 따라 천일염, 자염, 암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암염'이라는 것이 히말라야 핑크 소금처럼 지하에서 덩어리로 채취한 다음 분쇄해서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판매하는 것이다. 


이 책은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방법부터 시작해 소금의 역사와 다양한 맛과 풍미, 다양한 종류와 소금 간을 하는 방법과 계량법 등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려준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내 소금 공예 기술'이라는 세 번째 파트였다. 건식 염지, 습식 염지, 젖산 발효, 소금판, 소금 크러스트 구이, 가향 소금, 훈제 소금, 베이킹 등 소금을 재해석해 새로운 소금을 만들고, 다양한 조리 방법을 통해 요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레시피까지 담겨 있다.


소고기 육포 만드는 법에 갓 갈아낸 커피를 섞는다거나, 브런치를 완성시키는 달걀 노른자 염지하는 법, 요리에 복합적인 풍미를 더해주는 레몬 소금절임 만드는 법, 너무 간단하지만 훌륭한 당근 피클인 골든 크라우트, 레드 와인과 잘 어울리는 토마토 마늘 샐러드 등 새로운 레시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자인 제임스 스트로브릿지는 자칭 소금광이다. 콘월 남동부의 해안 근처에 살기로 결정한 것 또한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이라는 가장 중요한 식재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깨끗한 바닷물을 퍼다 몇 시간이고 끓여 직접 소금을 만들어 보고, 집 주변 소금 장인이 어디 사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할 정도로 소금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나트륨 수치가 낮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소금이 점점 식단에서 제외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정제하지 않은 형태의 천일염이 함유한 미네랄은 맛과 풍미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정제된 식탁용 소금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소금에 대한 오해를 풀고, 더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위해 소금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자, 소금이 주방에서 펼치는 마법의 세계를 경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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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말들 - 우리의 고통이 언어가 될 때
조소연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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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재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흔적과 유해를 낱낱이 그러모아 그 형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당신의 형상과 지형도가 불완전한 미완성에 그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생의 광휘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당신의 인생에는 오로지 비극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얘기하고자 했다... 나는 당신이 가진 그 빛과 어둠, 모두를 보고자 한다. 당신의 빛을 집어삼킨 그 어둠의 실체를 밝음의 세계 위에 꺼내놓고 싶다.          p.50


2018년 5월 7일, 어머니가 자살했다. 어머니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와 헤어진 후 가족들에게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딸에게 온갖 독설과 폭언을, 아들에게는 애인과 있었던 일을 암시하는 성적 표현이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 약 한 달간은 더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나서, 옥상에서 뛰어 내렸다.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어머니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 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죽음의 이유를 밝혀내는 스토리가 곧 이어질 것만 같은 서두이지만, 이것은 누군가에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한 여성이 살았던 67년의 생애가 가능한 한 빠르게 지상에서 치워버려야 할 부끄러운 죽음으로 치워졌고, 그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가족들은 이후로도 몇 년간 제대로 애도할 수조차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고인의 딸이자 같은 여성으로서 ‘어머니에 대해 말해야 한다’라는 사명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사는 동안 무엇을 갈망했을까, 무엇을 꿈꾸었을까, 밤에는 어디로 영혼이 떠돌았을까. 어머니의 모든 열정, 정념, 수치, 슬픔, 분노, 혐오, 기쁨, 환희 들.... 당신이 살다 간 흔적, 당신이 세상을 사랑한 흔적, 당신이 나를 사랑한 흔적.... 그렇게 저자는 그 흔적을 따라 걷기로 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무모하고 담대하게 만들었을까. 지상에서 사라진 한 인간의 생애에 어둠의 장막을 거둬내어 진실의 빛을 비추는 일은 '쓰기'를 통해서 시작된다. 





일상이 비루하고 남루할지언정 그것을 살아낸 내 일상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일. 그 일상의 비천한 조각들이 모여 현재를 통과한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아침의 나는 오후와 저녁의 나를 통과해 밤의 내가 된다. 밤새 거친 땅을 떠돌던 영혼은 다른 존재로 태어나 아침의 빛을 맞이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은 파동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그리고 이 세계와 에너지를 교환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 세계와 우주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p.190



경제적으로 파산한 노후를 맞이해 학원 건물을 청소하게 된 노년기 여성으로, 외로운 열정의 대상이었던 아들과 급격히 멀어진 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육십 대에 접어들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결혼'이 자신의 불행의 시작점이라 늘 말해왔던 어머니는 자연과 가까워지며, 그곳에서 남자를 만났다. 멀리서 함께 걷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만, 딸로서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어머니에게도 삶의 기쁨이나 몰입이 될 만한 어떤 사건이 생겼다는 데 대한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체 어머니와의 대화 중에 다른 남자에 대해 언급했을 때 어머니는 불같이 화내면서 집안의 수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자신의 외도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겪게 될 수모와 낙인이 공포였던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욕망을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어느 새 이 책에 쓰인 글들은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넘어서 여성들을 위한 이야기로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모성과 욕망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가 어떻게 애도와 자기 해방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보여주었다. 슬픔과 막막함에서 시작해 기어코 다시 삶을 써 내려가는 글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말들'이 트라우마와 상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죽음을 애도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내가 부재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흔적과 유해를 낱낱이 그러모아 그 형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산산조각이 나 버린 삶의 파편들을 글쓰기를 통해 이리저리 맞춰보고, 이어 붙이면서 어머니의 삶을 복원하고,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 책은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쓰인 에세이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과 사유는 웬만한 인문학서 못지 않게 묵직하고 깊이가 있어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었다. 타인의 삶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자살과 광기, 그리고 욕망에 대해서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 책을 통해 글쓰기가 가진 힘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금기가 된 죽음이 어떻게 언어화될 수 있는지, 부서진 마음이 어떻게 글쓰기로 치유될 수 있는지.. 이 먹먹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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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바닥 -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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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김, 정확하고 치밀한 사무 관리, 전문적인 법률 지식, 교섭 능력. 채권 회수는 일반적으로 은행원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평균 이상으로 요구되는 가혹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그런 지저분한 일을 사카모토는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담담히 해냄으로써 스스로와 균형을 맞춰왔다. 거친 교섭이 이어지면 마지막 날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으레 말이 없어졌다. 쾌활한 사람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온후하고 다정한 사람이 감정 없는 톱니바퀴로 변모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p.57


은행에서 근무하는 이기는 대출 고객을 방문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다 동료인 사카모토를 만난다. 두 사람은 입사 동기로 이기는 일반 융자 담당, 사카모토는 회수 담당이었다. 사카모토는 이기에게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너 나한테 빚진 거다?"라는 묘한 소리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나고, 몇 시간 뒤 시체로 발견된다. 게다가 고객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는데... 이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3천만 엔이라는 거액의 돈을 횡령했다니.. 자신이 알던 사카모토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인은 알레르기로 인한 쇼크사로 요요기 공원 옆에 있는 차 안에서 쓰러져 있는 채 발견되었다. 벌에 쏘인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아마도 벌 알레르기였던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던 사카모토는 컴퓨터에 스케줄 프로그램에 꼼꼼히 하루 단위로 일정이 기록했다. 스케줄의 면담 기록 중 여러 장의 메모가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스케줄이 있었으며, 담당했던 회사의 계좌 잔고 추이를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차 사카모토의 죽음이 알레르기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타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살해당할 동기가 될 만한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이거라면 그 동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기는 동료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이미 한차례 좌천되어 온 지점이었지만, 이러다가는 은행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진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다. 





"죽었다니 무슨 소리야."

그 눈을 직시했다. 깊은 눈동자다. 뭐가 있지? 분노, 당혹, 두려움, 긍지 그리고 혼란......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그 직감에 나는 동요했다.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을 사고가 경로에서 벗어난다. 이 사건에서 그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니시나의 시선이 쏘아보는 가운데 맹렬한 기세로 머리를 회전시켰다. 가설을 다시 세운다. 손에서 빠져나간 진실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친다.                p.365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비롯해서,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직장인들의 통쾌한 반란과 도전을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로 그려냈었던 이케이도 준의 데뷔작이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다 퇴사한 뒤 이 소설로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케이도 준의 출발점에 놓여 있는 작품이자, 은행 미스터리의 탄생을 선언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본격적인 기업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살인사건을 풀어 나가는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도 선사하고 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케이도 준은 자신이 근무했던 은행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도산과 그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모티프로 했음을 밝히면서 “쓰고 싶어서 썼다기보다는 기필코 써야만 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뉴스에 숱하게 보도되는 사건의 그 이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존에 만났던 그의 작품들이 기본적인 구도는 영세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맞서 싸우는 식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색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은행과 기업이 얽힌 음모, 은행 안의 복잡한 파벌 싸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도 불사하는 비열한 상사... 등 현실감 넘치는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케이도 준의 여느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가독성이 뛰어나다.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진짜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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