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ANGST
김인숙 지음 / 북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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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동네에서는 다 죽어.

그리고 다시 한마디 더.

그런데 너는 살았지.

그러면서 난데없이 모유리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이마로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이 엄마 속에 달라붙었다. 그 부드럽던 손...... 그건, 그 와중에도 '엄마의 손'이었다. 미운 엄마, 엄마 같지도 않은 엄마, 못돼 처먹은 엄마...... 개 같은 엄마...... 쌍년 같은 엄마...... 그러나 엄마.               p.106


세상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들이 수두룩하게, 또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더 수두룩하게 벌어진다. 매일같이 세상 어디에선가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 작품 속 비극도 그렇다. 어느 해 여름, 쓰레기집에서 살던 쓰레기 노인이 사망했다. 도시 괴담 방송을 하는 유튜버가 집을 촬영하다가 무너진 폐가구와 쓰레기에 깔린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구급대와 경찰, 그리고 특수청소업체가 곧 현장에 출동했다. 사람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로 인해 어디든 건드리는 순간 송두리째 무너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곳은 멀쩡하기만 하다면 대저택이라 불릴 만한 집이었다. 지어진 지 100년 가까이 된 집이었는데, 서구풍으로 공을 들인 석조 저택이라 요즘 집들보다 더 튼튼하게 보였다. 문제는 외벽이고 내벽이고 보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쓰레기가 집을 아예 먹어버린 꼴이었다는 거다. 게다가 하필 날씨는 폭염이었다. 별별 날것과 벌레들이 날아 다녔고, 악취와 냄새도 지독했다. 시신을 구조하기 위해서라도 쓰레기들을 일부 치워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직 덜 죽은 사람이 한 명 발견된다. 마치 살아 있는 유골과도 같은 상태의 사람과 진짜 유골까지 나타난다. 단순 사고로 처리되었을 노인의 죽음은 그렇게 사건으로 전환된다. 도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자신도 깨닫지 못해서 자신에게조차 비밀이 된 말들. 그 뜨겁고 달콤하고, 그래서 심지어 쩔쩔매는 것 같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절절 끓는 철판 위에 볶이는 듯 안달 나 있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함부로였던 마음과 말들. 비밀은 결코 폐기 처리 되지 않는다. 쓰레기가 될망정 어딘가에 쟁여진다. 부패하고 냄새를 풍기고 벌레가 꼬일망정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뒤지고, 찾아낸다.              p.235~236


'공포'를 기반으로 한 장편소설의 새로운 전개를 선보이는 앙스트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은 박민정 작가의 <호수와 암실>이었고, 두 번째로 김인숙 작가의 <자작나무 숲>이 나왔다. 이후에 출간될 라인업에 손보미, 김혜진, 조예은 작가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기대하고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2022년에 발표되었던 동명의 단편 소설을 확장하여 다시 쓴 장편소설이다. 단편에서 1인칭 시선으로 '그 집'과 할머니와 자신의 엄마를 응시했던 화자 '나'가 장편에서 '그 집'의 유일한 상속녀 '모유리'가 되고 이야기는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김인숙 작가는 '단편을 장편화하는 것이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호더 할머니와 사라진 아들, 나와 미혼모 엄마로 이름이 없던 인물들이 하나씩 이름을 가지면서 좀 더 분명하고 다채로운 서사를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 김인숙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해가며 여러 번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예리한 묘사들과 섬세한 문장들, 그리고 생의 이면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이 꽤 오랜만에 읽는 것인데, 여전히 마음을 휘젓는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며 읽었다.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해 그것들을 쌓아놓고, 주워온 것도 쌓아놓고, 그러다 보니 커다란 집이 쓰레기로 가득해졌고, 결국 그 속에서 죽어버린 노인의 서사에는 과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누가 노인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인지... 노인의 죽음은 사고인지, 누군가의 의도인지... 쓰레기 더미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이 서서히 파헤쳐지면서 드러나는 진실이란 굉장한 무게로 다가온다. 쓰레기가 가득 덮고 있던 그것들, 그 아래 묻힌 것들을 다 꺼낸다면... 얼마나 많은 슬픔과 비밀이 드러날 것인가. 노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을 지켰는지, 그 거대한 서사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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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생각한다 -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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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적절할까? ... 동물을 도덕적으로 존중하기 위한 기준은 대체 무엇이어야 할까? 고통을 느끼는 능력일까, 삶의 의지나 지능일까? 똑똑한 동물의 생명권이 지능이 낮은 동물의 생명권보다 더 크고 귀할까? 인간과 다른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고도 중차대한 과제다.                  p.18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사실 이것은 스스로를 다른 모든 생물종보다 우월한 종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수십만 종의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명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동물을 마치 물건처럼 생산 수단화하고, 생존 기계나 고기 공급원으로 사육한다.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닭, 소들이 비좁은 우리와 케이지에서 평생을 보낸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숨긴다. 왜냐하면 보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런데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고 지배하며 고통을 가할 권리는 대체 누가 준 것일까. 왜 우리는 반려동물은 귀여워하면서 식탁 위의 고기나 실험실의 동물들에게는 냉담한 것일까. 이렇게 모순된 태도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이 책은 동물의 권리와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토대에서부터 초기 문화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지 동물 사육 시설과 도축장, 실험실들을 살쳐 보고 우리가 현재 직면한 난제들을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검토한다. 오늘날 인간의 모든 학문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진화 생물학이든 고인류학이든 동물 생명이 어떤 점에서 인간 생명과 다른지 확실히 말하지 못한다. 동뭉 행동학자들은 동물의 인지 능력을 측정한 뒤 인간과 비교하면서 거의 모든 점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 유인원의 지능을 윌와 단순 비교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분자 유전학은 우리에게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침팬지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원숭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과학에서건 많은 사람의 통념적 생각에서건 별로 의심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선을 바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같은 대형 유인원들은 얼마나 인간적일까? 저자는 이를 분자 유전학으로 살펴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과학과 철학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깨닫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동물원의 사육 조건은 여전히 많은 점에서 비판받는다. 물론 동물원장들도 섬세한 관람객들만큼 그런 조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더 이상 맞지 않고, 많은 비용을 들여야만 서서히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동물원의 비난받을 환경이 아니라 어떤 사육 조건이든 상관없이 동물을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내놓는 것이 원칙적으로 합당한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p.474~475


거의 모든 문화학자가 공통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더 높은 힘에 대한 믿음과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만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저자는 제인 구달과 대화를 나누면서 침팬지에게도 낭만적인 사랑, 종교적 감정, 신앙 같은 것이 존재할 지에 대해 질문을 던직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구달이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놀라웠다. 그들의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적으로 무언가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보였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감정조차 분명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과 오성, 사고력과 판단력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절대적 척도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동물을 몸의 노예로 설명하는 철학적 전통은 길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과 동물의 확정적 차이에 의구심을 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동물도 처음부터 도축되고, 사냥감이 되고, 쫓기고, 독살되고, 귀여움을 받고, 훈련을 받고, 공포를 주거나 경탄의 대상이 되려고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눈과 분류 체계 안에서만 동물에 대해 정의 내린다. 우리 행성의 생물은 주로 인간의 필요에 따라 기능적으로 분류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 사랑>은 선별된 특정 종에게만 맞추어진 협소한 감정일 뿐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동물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멸종시키고 먹어 치우고 독살한다. 그렇다면 가슴의 도덕에는 어떤 감정과 동물에 대한 어떤 정서적 이해가 깔려 있을까? 모든 대목들이 공감되고, 이해되고, 감탄스러웠던 책이다. 동물권, 동물 윤리에 대해 다루는 책들을 꽤 읽어 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폭넓게 사유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생물과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적으로 살펴보고, 인간과 동물의 윤리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며,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고민한다. 거의 6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지만, 어렵지 않게 너무너무 잘 읽히는 책이었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책이 국내에 꽤 많이 출간되어 있는 편인데, 이번에 처음 만났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정말 글 잘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마자, 저자의 책들을 몇 권 주문했다. 철학을 다루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많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앞으로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무조건 믿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과학책, 철학책, 인문학책을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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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장소
나희덕 지음 / 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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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 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케 세라 세라'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다. 마음이 무겁거나 우울할 때 그곳에 앉아 도리스 데이의 그 노래를 혼자 읊조리다보면, 마음 한끝에서 밝은 기운이 생겨나곤 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잘될 거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라고,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놀랍지 않은가,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런 위로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p.14


나희덕 시인은 산책과 여행이 삶을 견디게 하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가며 풍경을 받아들이고, 그러다 마음의 장소를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른다고. 이 책은 바로 그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2017년에 나왔던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를 전체적으로 손보고 글을 보태어 나온 개정판이다. 글과 사진의 배치도 달라졌고, 표지도 아름다워져서 새책처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희덕 시인의 시집만 만나온 터라, 이번 산문집을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시인은 한 해 동안 런던에서 즐겨 걸었던 템스 강변에 있는 벤치 등판에는 누군가를 기리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고,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에 시인은 위로를 받는다. 보통 그 벤치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기리기 위한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시인이 즐겨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케 세라 세라'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은 기분에 자신이 죽은 뒤에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달라고 자식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인상깊은 장소였다. 또 영국 바스에 있는 생긴 지 삼백 년도 더 된 빵집에서 빵에 깃든 역사와 기억을 맛보았던 경험과 어제의 친구와 오늘의 친구가 만나 내일의 친구가 되었던 순간에 나누어 가진 스페인의 수제품가게에서 골라온 반지의 추억, 아일랜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책을 읽던 노인을 통해 떠올린 소설에 대한 이야기 등 시인이 만난 장소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디 딱 적당한 온도로 마음을 데워 주었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마음의 장소라는 게 있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듯 몸과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곳.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남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다. 그곳과의 인연은 꽤 긴 편이다. 십여 년 전 지인의 안내로 월출산 아래 멋진 동백숲이 있는 집터를 가보게 되었다. 그 후로 낮은 돌담과 작은 오두막이 있는 그곳에 이따금 혼자 찾아가 앉아 있곤 했다. 집터를 구입할 사정은 안 되지만, 마음으로는 그곳에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p.190


영국과 미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 해외 여러 도시들부터 한국의 회산 백련지, 전주 한옥마을, 전남 백운동 별서정원 등 곳곳의 글과 사진으로 만나면서 함께 그곳들을 걷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야말로 방구석에서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자주 들르던 자선가게에 있던 장애로 심하게 일그러진 손가락을 가진 남자, 사람이 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된 집 정원에 있던 낡은 초록색 소파,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데려온 백 년이 넘은 괴종시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는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주는 다리, 세계에서 가장 큰 분화구를 지닌 포아스화산이 잘 보이는 공터에 둘러앉아 했던 시 낭독회 등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은 시인의 시선들이 우리를 그 각자의 순간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시적 언어로 재해석된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색깔과 사연을 가지고 있어 짧은 이야기 속에도 그들만의 드라마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 뻗어 닿는 곳에 놓아두고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마다 한번씩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사람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찾아가는 자신만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이 걸으며 만난 그리운 장소들을 통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장소'를 떠올리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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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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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이들은 달력에 빨갛게 표시된 날을 조바심 내며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실제 닥치면 기대했던 것보다 즐거움음 훨씬 못 미치기 마련이니까. 애타는 기대감이 내심 실망감으로 바뀌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자체보다 기대감 자체가 진정한 보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이런 실망의 순환을 수없이 경험해야 한다. 숨죽인 기다림이 보상의 전주곡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환상은 무너지고 마법은 깨진다.              p.57


열한 살 다윈은 학교에서 친구에게 멍청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정학 수준의 학칙 위반이라는 소릴 듣는다. 피어슨은 아들을 데리러 학교로 가서 교감에게 퇴학 처분도 각오해야 하니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는다. 이 모든 소동은 정신평등주의 운동때문이다. ‘정의로운 시대’의 가면을 쓴 가짜 공평은 모든 교육 기관의 시험을 없애고, 차별적인 표현을 쓸 수 없으며, 숙제를 하지 않아도, 수업 시간에 잡담을 해도 야단을 칠 수 없게 만든다. 분열과 편견을 조장하는 환경을 만든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금지되고, 지능 같은 개념도,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도 판단할 수 없고, 만들어지는 모든 콘텐츠가 검열되는 세상이 되었다. 대학의 영문과 교수인 피어슨은 무시험 입학제를 비롯해서 정신평등운동에 광적인 학생들로 인해 일이 점점 힘들어 지고 있었다. 


피어슨과 에머리는 십대 때부터 단짝 친구로 40년 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에머리는 지역 방송국 진행자로 피어슨의 집에 식사를 하러 오면서 남자친구를 데려온다. 에머리는 아름다운 외모 만큼이나 연애를 자주 했는데, 이번 남자친구인 로저는 극작가였다. 그들은 식사 중에 인지 불평등이 금지된 현재 세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날카롭게 대립을 하게 된다. 공적인 자리에서 자칫 실수했다가 경력을 구렁텅이에 빠드릴까봐 조심 중이라는 에머리, 자꾸 선을 넘나들며 현재 세태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피어슨의 남편 웨이드, 그러다 로저와 피어슨이 대립하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피어슨에게 로저가 '얼간이'라는 말을 했다고 혐오 발언은 삼가해달라고 한 것이다. 정신평등주의에 대해 대놓고 반감을 가지고 있는 피어슨과 사회적 위치때문에 조심하는 에머리, 그리고 이 운동이 대체 해로울 게 뭐가 있느냐며 그것에 동의하는 로저... 급기야 그 상황은 에머리와 로저가 문을 닫고 나가버리기에 이르는데... 피어슨은 오랜 친구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 국민이 명백한 거짓말을 통째로 수용하는 현실로 인해 필연적으로 다른 거짓말이 통용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는 진실로 향하는 통로를 끊어버렸고, 그로 인해 진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즉, 우리의 대표자는 어떤 말을 해도 되고 어떤 주장을 옹호해도 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은 아름답다. 이 주장 하나만 있으면 사실이 된다. 실제로 참인 것이 아니라 참이기를 바라는 것을 옹호할 때, 우리는 모든 선진 경제가 번영을 일구게 해준 과학적 방법론과 결별한다.                 p.345


<케빈에 대하여>에서 모성의 금기를 부쉈던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이번 작품에서 평등이라는 사회적 금기와 현대의 성역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여호와의 증인 광신도였던 부모로 인해 신앙이라는 이름의 복종에서 탈출하고 저항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녀의 딸 루시는 평등의 이상이 종교적 광신 수준의 열풍을 일으키는 사유의 결핍 속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다. 십대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절친과의 사상 대립, 소통이 단절된 모녀 관계 등을 통해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개인의 기질이 사회와 충돌할 때 겪게 되는 고통과 우정의 붕괴를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평등하게 똑똑하다면, 그 사회는 이상적인 걸까? 평등의 기준은 누가 정할 수 있을까? 평등은 언제나 선한 걸까? 


가장 친밀했던 존재가 가장 정확한 적이 된다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너무도 친밀한 사이였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슴 아픈 아이러니다. 에머리의 가족이 열여섯 피어슨의 삶을 구해줬기에, 그 고마움을 수십 년 동안의 우정이 쌓여 오는 동안 내내 간직하고 있었던 피어슨이기에 두 사람의 우정이 무너지는 상황은 엄청난 타격이 된다. 또한 엄마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딸이 사회복지국이 피어슨을 고발하게 되는데... 적개심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딸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사회가 집단적으로 거짓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친구 사이와 모녀 관계라는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통해 풀어내고 있어 더 파격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서사가 만들어 졌다. 여전히 가장 섬뜩하고 불편한 영역을 정면으로 거침없이 파고드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신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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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즈
무라야마 유카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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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종이책이 자신을 구해주었던가. 책을 읽다가 주인공과 동화해서 분노로 부들거린 적도 있다. 눈물로 페이지가 얼룩진 날도, 다 읽은 책을 끌어안고 잠든 밤도 있다. 전자책으로는 그럴 수 없다. 은은하게 단내가 나는 낡은 종이 냄새를 맡을 수 없고, 꺼끌꺼끌한 촉감이나 두툼한 무게에 용기를 얻지도 못한다. 그때그때 자신이 품에 그러안았던 것은, 페이지 안에서 펼쳐지는 끝없는 이야기 세계인 동시에 '책'이라는 실체 있는 보물이었다.              p.90~91


아모 카인은 끊이지 않고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면서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된 작품도 다수인 인기 작가이다. 초판 5만 부, 출간도 하기 전에 증쇄 3만 부를 찍을 정도로 단단한 팬층이 있고, 전국 서점 직원이 뽑는 서점 대상에는 매년 후보로 오를 만큼 단골인데, 이상하게도 프로 작가가 심사하는 유명 문학상은 매번 코앞에서 미끄러졌다. 나오키상에도 두 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받지 못했다. 판매 부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인데, 대체 왜 상을 받지 못하는 걸까. 아모 카인은 자기 작품의 어디가 문제인지, 문학상을 받기에 뭐가 부족한 지 알 수 없어 더 억울하고 분했다. 그리고 그만큼 간절하게 나오키 상을 받고 싶었다. 프로 작가에게 주어지는 문학상은 스무 개가 넘었고, 제각각 심사 과정이 다르다. 그 중에서도 나오키상의 심사 과정은 아주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다른 상과 비교해도 대중의 주목도나 인지도의 차원이 다르다. 


한편 아모 카인은 내년에 출간되는 장편소설의 초교 교정지를 받아 보고 화가 난다. 교정 담당자가 요소요소 적어놓은 연필 흔적에 짜증이 치솟고 심란해졌다. 지적이 하나하나 초점을 벗어났던 것이다. 담당자는 큰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것만 소상하게 찔러대고 있었다. 멍청한 소리들을 읽다 보니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왔다. 교열이라는 업무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 상성이 최악이면 교정지를 살피는 내내 성질이 가라앉지 않았는데, 이번 교정이 딱 그랬다. 이런 교정지를 보낸 담당 편집자에게도 분노가 치솟아서, 원고를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다시 담당자에게 돌려 보냈다. 결국 글을 연재했던 출판사가 아니라 다른 출판사와 책을 내기로 한다. 이번 편집자는 자신의 글을 믿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선생님 편이 되겠다고 말할 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사이가 가까워지는데... 과연 두 사람이 만들어낸 신작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까. 아모 카인은 이번 신작으로 염원하던 나오키 상을 수상할 수 있을까.




"인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저요, 이번 <테세우스>가 정말 좋아요. 지금까지 작품과 확연하게 달라요. 이것도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수준이 다른 깊이가 있어서, 지금까지 가지 못한 곳에 도달한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그 두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진정한 악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 왜 이토록 잘 풀리지 않을까, 왜 다들 이런 상처를 받아야 할까, 하지만 인생이란, 산다는 건 분명 그런 거다...... 싶어요. 왠지 저 자신을 투영하는 마음으로 읽게 돼요.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깊어져요. 대단한 작품이에요."               p.350~351


나오키상과 아쿠타가와상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상반기와 하반기 연 2회 진행되고, 그 결과는 국내 출판계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늘 화제가 되곤 했다. 작년 7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선정 위원회는 두 상 모두 '해당 작품 없음'을 발표했다.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아쿠타가와상은 14년 만에 수상작을 배출하지 못했다. 두 문학상이 동시에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한 것은 무려 27년 만이다. 일본 출판계의 축제라 불리는 두 상의 선정 불발 후, 전국 서점 직원들이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 할 때!”라며 수상작을 대신해 꺼내 든 책이 바로 이 작품 <프라이즈>이다. 무라야마 유카는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사랑받는 일본의 3대 여성 작가이자 제12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화제가 되어, 올해 서점 대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은 출판사 편집자와 작가의 교정 과정부터 문학계 안팎의 리얼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본 최고 문학상을 차지하기 위해 혼신을 바치고, 최선을 다하는 편집자의 열정과 작가의 욕망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독자 입장에서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작가는 목숨을 걸고 쓰고, 편집자는 몸을 갈아 넣어 만든다. 온 마음을 다 쏟아붓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세계가 얼마나 치열하고 진지한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출판계라는 특수한 업계의 현실을 엿본다는 설레임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에 대한 공감이 어우러져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나오키상을 비롯해 일본의 문학상들은 우리 나라에 번역 소개되는 작품들에도 꽤나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푹 빠져서 읽을 만한 작품이다. 자, 하이퍼 리얼리즘 출판 서스펜스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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