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근심
마리아나 레키 지음, 장혜경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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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뒤로 기댄다. 비스듬하게 기댄다. 너무 피곤하다. 나는 부스스 일어난 파란 코듀로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속으로 질문한다. 얼마나 많은 얽힘과 풀림이, 얼마나 많은 꿈이, 얼마나 많은 이와 침묵과 바지가 여기에 누웠을까? 그러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잠이 든다. 나의 삼촌 울리히와 내가. 삼촌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는 것들이 얼마나 하잖은가요. 우리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대한가요." 지금 저 구절은 확실히 릴케이다.            p.49


인생에 관한 한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당장 내일 우리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 알지 못한다. 두통은 사실 뇌종양일 수도 있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해고될 수도 있으며, 길을 가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예약한 비행기가 취소될 수 있고, 아이가 학교에서 다칠 수도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불확실한 우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불안과 우울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 문제가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불안의 한가운데에서, 하지 않아도 될 온갖 근심으로 둘러싸인 이들을 위한 책이 나왔다. 


독일의 심리학 잡지에 연재된 서른아홉 편의 글을 엮은 것으로 두려움, 걱정, 불안, 상실, 상처, 고독 등의 주제로 쓰인 초단편 형식의 연작 소설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법한 인물들의 소소한 일상 속 다양한 내면이 그려져 있는데, 한 걸음 비켜서서 바라보는 작가의 다정한 시선이 위로가 되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 결핍이나 상처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와 분노, 상실 등 크고 작은 '근심'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극중 인물들은 잠을 이루지 못해 불면으로 힘들어 하고, 광장 공포증으로 나서지 못하며, 사랑의 상처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그 중에서 평소에는 조용하고 매우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광장 공포증으로 힘들어 하는 폴 씨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와 대중교통을, 금방 밖으로 뛰쳐나올 수 없는 온갖 건물들을 무서워했다. 공포증을 털어내고자 행동치료사를 세 번이나 바꾸어가며 치료를 받았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약도 먹어 봤지만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 상황들이 상상이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각자 자신만의 분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책 속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비제 여사에게는 진정제가 아니라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것도 시급하게 필요하다. 그녀와 함께 미치광이 교수들이 연구하는 그녀의 내면 지하 보일러실로 내려가줄 사람이 필요하다. 오이대왕에게 재갈을 물릴 사람(나라면 나중에는 그와 친구가 되도록 도와주겠지만, 일단은 나도 안전을 위해 재갈을 택할 것이다), 비제 여사를 생각의 덤불에서 꺼내줄 사람, 믿음이 가지 않는 자동이체를 해지할 사람, 선택지에서 불행의 역청으 긁어낼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p.194


우리는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랑해서 불안하고, 부모라서 불안하고,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관계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하다.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각종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 사고들부터 전세계적인 팬데믹과 테러, 재해, 그리고 일상에서 겪는 가족 문제, 회사에서의 고민, 연인 관계,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걱정까지 우리의 삶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매번 걸러내야 할 정보와 쉴 새 없이 많은 자극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면, 불안과 근심, 걱정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삶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니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마음을 졸이고 흔들리며, 작은 일에도 금방 마음의 중심을 잃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마리아나 레키의 글을 읽으면서 일상의 '온갖 근심'들으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 보면 내 이웃이, 내 친구가, 내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근심들이었던 거다. 그리고 비록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각종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마리아나 레키의 글은 결코 무겁거나 비관적이지 않고, 기발한 유모와 따뜻함으로 하찮고도 위대한 우리의 근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분량이 짧기 때문에 가볍게 한 편씩 읽기 좋아서, 내 현실의 문제가 고단할 때, 스트레스가 극단에 치달은 것 같을 때 페이지를 넘겨서 한 편씩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읽다 보면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게 되면 툭툭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고,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되어 조금 덜 외로워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타인에게는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근심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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