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코미디 - 유병재 농담집
유병재 지음 / 비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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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근심, 게으름, 시기, 질투, 나태, 친일파, 자격지심, 악성댓글, 독재자, 뻔뻔함, 교만, 식탐, 성욕, 의심, 위선, 이기심, 군부세력, 불평등, 폭력, 성범죄자, 혐오, 피해의식, 적폐, 질투, 차별, 꼰대, 자기혐오를 내 통장에 넣어두고 싶다. 거기는 뭐 넣기만 하면 씨팔 다 없어지던데.

 

 

워낙 티비 쇼프로그램은 잘 보질 않아서 연예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가끔 뼈있는 발언을 마치 농담처럼 툭툭 던져 화제가 되곤 하는 유병재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가 책을 출간했다. 이름하여 <블랙코미디> 라는 농담집이다. 이 책에는 지난 3년 동안 저축하듯 모은 에세이, 우화, 아이디어 노트, 미공개 글 138편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두를 "개나 소나 책을 쓴다. 이 땅의 백만 저자들에겐 면목없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 같은 놈까지 책을 냈으니 말이다"라는 말로 열고 있다. 사실 연예인이 책을 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반응을 한다. 좀 뜨니 책도 내는 구나. 이제 개나 소나 책을 쓴다고 나서네. 라고 말이다. 정말 아무나 글이 아닌 이름으로 책을 낼 수도 있는 시대이지만, 이 책은 그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독설, 위트를 빙자한 그의 쓴소리들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마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일상 속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그의 짧은 글들은, 길지 않아서 오히려 더 와 닿고, 뜨끔하고, 공감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운명이 말했다. 작작 맡기라고." 단 두 문장으로 이렇게 가슴을 콕 찌를 수 있는 작가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말에 가시가 돋아서 기분이 안 좋은 줄 알고 걱정했어. 성격이 안 좋은 거였구나." 이런 문구들은 너무 웃기면서도, 괜히 내 얘기 같아서, 혹은 내가 아는 그 누구의 얘기 같아서 뜨끔했다. "대한민국에서 아들딸로 살기 힘든 이유: 딸 같아서 성희롱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함" 이라는 문구를 보는데, 요즘 한참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몇몇 뉴스들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렇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어찌 보면 마치 자학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자기반성'이라는 테마와 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바라보며 눈치보지 않고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할말 다 하는 '세상' 그 자체를 읽어내는 테마가 공존하고 있다.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이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 짧은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건강한 코미디란 바로 이런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내용 자체와 수위는 그리 건전하다고만은 볼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핫.

 

 

내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존재인지는,

대부분 담배꽁초 바닥에 버리고, 알바한테 반말하고, 엄마한테 짜증부리고,

이런 기억에도 남지 않을 미세먼지 같은 작은 순간들이 모여 결정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영화나 만화, 혹은 소설을 보면 주인공에게 항상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 드라마틱한 갈등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순간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인생에서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란 아예 없거나, 모르고 지나가거나 그러지 않을까. 인생은 영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일상에서 매일 짓는 표정, 자주 내뱉는 말투, 누군가에게 짜증내는 상황, 나도 모르게 하는 습관들이 모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된다는 말은 그래서 참 서글프다. 애초에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말 미세먼지 같은 순간들이 쌓여 나란 존재를 구성한다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내 인생도 정확하게 기,,,결로 흘러가서 중요한 순간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고, 장대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일상의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는 순간들은 좀 더 대충, 편하게 흘려 보낼 수도 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이 책은 페이지마다 글보다 여백이 더 많고, 전체 두께도 얇은 편인데 이상하게 여러 번 들춰서 계속 읽어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미 며칠 전에 다 읽어놓고, 오늘 또 뒤적거리다 눈에 들어온 페이지는 '우리 형'이라는 에피소드였다. 뭐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일로 형이랑 다투고 난 뒤 형이 정말 너무 미워서 뒤통수만 봐도 짜증이 치밀고 소리만 들려도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화가 나서 머릿속으로 상상한 형의 행동 중에 실제로 형이 한 행동은 단 한가지도 없더란 말이다. 그는 생각한다. "내가 미워하는 누군가는 실재하는 누군가인지, 내 상상이 만들어낸 누군가인지" 말이다. 미움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가끔은 상대 그 자체보다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 자체에 빠져서 내가 그를 사랑하는 구나 착각할 때가 있고, 가끔은 상대가 너무 미워서 그에 대한 감정을 자꾸만 키워나가 점점 더 관계가 멀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본래 화가 많은 편이라, 용기가 부족해 삼켰던 분노들을 글로 써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기백은 없고 불만만 많은 인간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피해의식과 때때로 술기운까지 곁들여진 부끄러운 글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정의롭고 도덕적인 판단으로 언제나 멋지게 자신의 소신껏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화처럼 크레딧 오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인생은 계속 되니 말이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 또한 고스란히 스스로 책임져야 하니 말이다. "오해들 하는데, 내가 겁이 많아서 참는 거지 착해서 참는 게 아니야." 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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