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온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빨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이곳 퐅랜 사람들은 정말이지 느리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유롭다. 내 눈에는 생활 속의 모든 것들이 너무 굼떠서
슬로모션을 보는 것만 같다. 우체국에서도, 마켓에서도, 식당에서도, 내
기준으로는 너무 느려 터졌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아이폰 같은 걸 만들었을까,
어떻게 세계 최고의 대국이 되었을까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다. 이곳의 느림에는
이유가 있다. 그건 순서를
지키는 것이고 정확하게 일하는 것이리라. 차례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능률적이고 바른 방법이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모 회사의 캠페인 슬로건처럼 이제 여행은 꽉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이곳 저곳을 단기간에 누비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진짜 그곳의 삶을 살아보고, 그 도시의 진짜 삶을 맛보는 것이 요즘 여행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이 책은
2015년 어느 가을 날,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로 날아간 이우일과 그의 가족들이 겪은 현지의 일상들을
그리고 있다. 세상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인 현지인처럼 그곳에서 눌러앉아 직접 살아보기를 실천한 여행산문집인 셈이다.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낯선 도시
'포틀랜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킨포크> 밖에 없었다. 포틀랜드 교외에서 상업 광고를 배제하고 현재
일상을 투영하되 심플 라이프를 지향하는 잡지를 만들자는 목표로 조그맣게 시작한
<킨포크>는,
‘단순한 삶,
함께 나누는 식사’의 의미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발견하여 감성적으로 보이며 세계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이끌었고, 국내에서도
한동안 큰 인기를 끌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킨포크>가
만든 푸드 스타일링 북인 <킨포크 테이블>을 좋아하는데, 단출하고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하고,
현대적이지만 전통이 깃들어 있으며, 만든 이의 개성이 풍겨는 식탁에 대한 이미지가 음식은 나누어야 제 맛이며 함께
밥 먹는 기쁨이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느끼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킨포크의 도시라면,
포틀랜드라는 곳이 대충 어떤 곳일지 짐작은 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졌다. 게다가 이 책은 단순히
몇 주나, 몇 달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쓴 것이 아니고, 아예 그곳에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눌러 앉아 살아본 것이라 여타의 여행 에세이들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하다 도착한 낯선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긴장을 풀게 될 때가 있다. 항상 듣던 음악을 다시 들을 때처럼. 이를테면 카페 앞 테이블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다가, 무심코 낙서를
끼적이다가. 책방에서 아는
작가의 책을 어루만지다가.
어느 낯선 도시에서건 잉크와
종이 냄새가 폴폴 나는 책방에 들어서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종이로 만들어진 미로 같은 그곳에서 문자와 그림이 가득 인쇄된 책을 꺼내 펼쳐보고 냄새를
맡으면 '아아, 이곳
사람들도 우리랑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틀랜드(퐅랜)은 일 년
중 절반이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우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보통
10월 말부터 서서히 비 오는 날이 많아져서 이듬해 5월 초순까지 좀 지겹다 싶게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비가 자주, 많이 오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가 멸종위기종 같은,
우산 쓴 사람을 가끔 보지만,
십중팔구 외지인이라고.
왜 퐅랜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퐅랜은 타투 가게가 유독 많은 곳이기도 하단다. 이우일의 아내와 딸이 타투를 하고 싶어 했다는
에피소드는 굉장히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이우일은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그림을 고르기가 너무 힘들어 타투를 계속 미뤘다는데, 그가 결국 고른 그림이란... 직접 책에서 확인하시길.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우일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들 덕분인데,
41편의 에피소드에
200여 컷의 일러스트가 담겨 있으니 거의 글반, 그림반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퐅랜에서 유행하는 수염, 타투, 삼선 슬리퍼등을 총 집합해서 그린 이미지는 정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반면에 퐅랜의 사람들과 풍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짐작이 되었다고나 할까. 퐅랜의 사람들은 독특하고
괴상하고, 유별한 개성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
특이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그들의 과잉 친절에 대한 에피소드도 너무 재미있었다.
서울처럼 복잡한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넉넉한 여유로움과 소박한 평화로움이 가득한
그곳, 퐅랜의 매력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여행지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 '직접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작가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키와 눈썰매를 즐기러 후드 산에도 가보고
싶고, 퐅랜 재즈 페스티벌에도
가보고 싶다. 다운타운 얌힐
거리에 있는 기부 요가원에서 여유있게 요가도 해보고 싶고,
플로팅 월드 코믹스라는 만화 책방에도 직접 가보고 싶다. 세상 모든 여행에 관련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책은
정말 제대로 여행 가보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그냥 잠시 다녀오는 여행이 아닌, 그곳에 눌러앉아 살아보는 여행 말이다. 아웅, 나도 여행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