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 이 책을 읽기 전에 유튜브에 나오는 태평양 전쟁사를 시청하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는 디테일한 글은 읽어 보면 되니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의견을 덧댄다.
이 책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사를 다큐 형식으로 다룬 책이다. 따라서 약 1세기 전의 일본 제국의 폐망을 다루었다면, 언젠가 역사는 일본의 제2 패망사가 써지지나 않을까 싶다. 그것은 후쿠시마 방사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 폐전을 극복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이벤트가 1965년 도쿄올림픽이었다. 2020년의 도쿄올림픽이 후쿠시마 사고의 복구와 회복의 이벤트 용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방사능은 거짓말 안 한다. 무지하다면 무지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방사능 대처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지출해도 해결할 수 없는 핵물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솔직히 답이 없다. 일본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당면 과제이자 인류의 도전이 되어 버렸다. 어느 핵 과학자가 동일본을 포기하라는 게 뼈아프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국민들이 서서히 병 들어가고 아파가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일본인은 방사능에 면역되었다는 게 어처구니 없이 웃게 된다. 인간은 원자력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였지만, 어떻게 안건들일 수 있는 욕망의 파도는 잠들지 않겠지.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격변의 역사였다. 해방된 이후 미 군정은 일제의 관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안정에만 주력했고, 이는 일본을 굴복시킨 맥아더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미 군정에 정부를 수립한 이후의 이승만의 정치도 일제 잔재를 그대로 이용해 버렸던 오염된 시작되었다. 두 번의 군사 쿠데타의 하극상 정치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올림픽도 거의 정치적으로 이용된 적도 있다. 독재 권력은 항상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역변의 변명을 항상 올림픽등과 같은 이벤트라는 거창한 행사로 무마시키는데 아주 좋은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쿠데타였다. 이렇게 발전시켰다는 것이 결국은 독재자들이 내세우는 필연적인 논리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와중에서도 민주화를 멈추지 않았다. 60년대생으로 80년대를 겪었기에 광주에서 서울에서 혹은 부마사태로 불리는 부산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서 독재정치의 비민주적 역사를 민주주의로 물줄기를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이 이룬 그들의 피가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를 뒤덮었다. 오늘날 오래전에 정착된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따라가는 정치적 민주화도 이루었다. 물론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서 아직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멀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타락한 권력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국민으로부터 국가 권력이 나온다는 민주주의적인 핵심이다. 물론 아직은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도 역시 다수의 국민이 가지는 민주적인 의식이 깔린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아니다. 민주적인 선거라도 있지만 그게 어디 선거라는 시스템의 흉내만 낼 뿐, 외부의 세력이 이식된 타의적 민주주의였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자기 직분과 시민들의 자기 직분은 엄연히 나눠져 있다. 누구라도 출마할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비정치인이 정치에 출마해서 이룬 당선은 멀리 있어 보인다. 일본은 여전히 자기 직분에 벗어난다면 이지메하는 걸 모를 리가 없잖는가 말이다. 그래서 자기 직분에 맞는 직업으로써의 정치가와 장인 정신으로 된 자기 가업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 국민이 원해서 법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 전혀 다른 몇몇의 극소수의 의원들이 그리고 당내의 당직자들의 권력을 가진 소수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일본을 유사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이다. 일본의 사무라이식 군국주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현대의 60년 동안의 정치는 거의 바뀐 적이 없다. 천왕제가 바뀌적이 없듯이, 유사 민주주의의 군국적 마인드도 여전하다. 그들의 적은 늘 내부에 있어도 그 해결책으로 외부로 돌리는 것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자기 직분에 따라 자기의 삶을 결정지운다고는 하나, 일본 군국주의 제국 시절에서 일본 국민들의 불행은 크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천황을 위해 가미카제가 되어 돌아올 수 없는 전투기를 타고 자살공격을 해야 하는 그 위대한? 착각에서 개개인의 행불행은 오로지 대의를 위해 개인이 철저히 희생을 바탕에 두어도 좋다는 식의 그릇된 행복이었다는 점이다. 불행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행복하다는 개인의 무한한 희생으로 누군가 얻어지는 것들에 대한 분노는 거의 없다는 거다. 그러니 주면 주는 대로 자신이 철저히 적응해야만 하는, 그래서 적응을 뛰어넘어 독보적이어야 하는 봉건 근대적 일본 막부 사무라이 시절의 국민들과 뭐가 다를까라는 점이다.
국가의 수립과 존립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령이고 정신이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 국민 개개인의 행복이 천황에서 나온다는 식의 고대 신과 천황의 대리격이라고 보는 샤머니즘의 신도국가이다. 그래서 아직 일본에는 신사가 그리도 많은 이유가 아니고 뭐겠는가 말이다. 그게 노예적인 마인드일 것이고, 왜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는 늘 굴복의 역사에서 종속된 행복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민이 당연히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식의 미화된 위대한 주장은 봤어도, 어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일본 국민들에게 큰 불행을 안겨 줘서 진심에서 나오는 사죄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국가가 국민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이게 올바른 가치관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으로 보자면, 국가의 결정이 국민에게 불행을 주지 않고 영광된 길을 주었다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것인데 사과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군국주의자라고 국민의 불행에 사과도 없고 국가를 위한 일이었으므로 떳떳했으니 반성이 없다. 국가가 국민에게 뻔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가장 큰 오류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필요한 존립 근거이지,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거다. 그렇다면 국가의 존립에 가장 핵심은 누구여야 할 것인가. 천황인가? 국민인가? 여기에서 일본의 사상적 배경과 사고방식은 국민의 행복이 출처가 천황이라면? 국민은 늘 노예로 살아도 할 말이 없다는 거다.
공화국과 왕국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공화의 주체는 국민이고 왕국의 주체는 왕이지,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 주체가 된 국가의 사람은 그저 신하일 뿐이다. 일본 국민은 왕의 신하이고, 왕이 죽으라면 영광스럽게 죽어가야 하는 것. 이게 가미카제가 탄생할 배경적 이념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 신하의 하등한 국민인 조선으로 바라보는 한국민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절대 있을 수 없는 논리적 배경이기도 하다. 아무리 한국인이 일본 정부에게 사과하라 해도 깨어있는 몇몇은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고방식으로는 거의 불가하다. 일본의 국민이 왕의 신하로 여기는 이상, 그들이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역사상 단 한 번도 왕의 핏줄이 바뀐 적이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가 국민을 못살게 굴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전 세계 역사적인 과정이었으나 일본이 유일하게 예외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일본은 천주교가 들어간 시기가 1500년대라고 찾아 보니 나온다. 상당한 박해도 많이 받았던 일본의 천주교 역사였다. 역시나 현재 일본에서 기독교 신도는 거의 미미하게 얼마 되지도 않는다. 기독교적인 역사로 봤을 때, 아프리카 오지에도 선교가 되는 마당에 일본에 기독교가 선교가 쉽지 않고 별로 안되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이는 기독교적인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과 예수라는 영역이 일본 샤머니즘적 신도에게 침투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어느 지역 웬만한 곳에 빨간색 십자가가 즐비하게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한다. 신이라도 다 같은 것도 아닌 것은, 신이라는 관념과 신을 대하는 신앙의 차이일 것이고 유일신과 다신의 개념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그런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웃기는 거지만 적어도, 일본에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막부 시절의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대포를 쏘며 개항을 요구하고 나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국가를 이루며 제국화는 가속화되었다. 여전히 동양은 봉건적 전근대적으로 살았다. 제국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졌어도 극동 아시아는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유럽에서 멀리 있었으니까. 그런 아시아를 잡아먹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장이었고 쉽게 무력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 비등한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초반에는 쉬웠다. 조선이 굴복했고 중국 대륙이 굴복했다.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도 전략물자의 조달처로는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연안과 중국 대륙, 만주까지 이렇다 할 변변한 대응할 무기조차 없이 전근대적 무기와 군사조직으로는 상대가 안되었던 거다.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최대 적이 기상이나 날씨, 위생 등이었지, 상대방의 허약한 무력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거다.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원인이 상대방이 보잘 것 없었으니까 가능했던 거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봉쇄령에 맞서 진주만을 공격해버렸던 것. 미국이야 당연히 가만있을 리도 없고 사자를 건드려 버렸으니 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기고만장했을지는 모르나, 미국의 막대한 군사 생산력은 일본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처럼 강력한 생산력으로 근대화된 국가를 상대로 일본은 싸운 적이 없었으니 싸우면 이길 거 같은 착각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스스로는 몰랐던 거다. 상대할 대상이 심각하게 허약한 국가라면 아무리 뻘짓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고 문제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군국주의 일본이 승승장구한 것이 월등히 뛰어난 전쟁의 힘이라기보다는 상대가 처절하도록 허약한 상대였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크고 더 힘이 쎈 상대라면 자신의 조그마한 헛짓도 엄청 큰 대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전쟁사에서 보면 강력한 상대로 한 심각한 뻘짓을 태평양 전쟁사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나는 패배한 전투가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뻘짓한 지휘관이 승승장구하는 승진을 거듭하는 걸 보면 왜 일본제국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가 나온다. 이 책과 더불어 일본 태평양 전쟁사에 대해 관련 유튜브 다큐 영상을 참고하시면 금방 이해될 것이다.
최근의 허튼짓으로 최대의 판단 착오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 사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약에,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사고가 났을 때, IAEA 등 국제기구를 통해서 조속한 지원과 대처 방안에 대해 신속한 결정을 하였더라면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을까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개별 국가의 자존심 따위의 문제보다 전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한 솔찍한 고백이기도 하다. 아직도 일본은 방사능이 컨트롤하고 통제되고 있다는 몇 마디로 퉁치기고 있어도, 안전하다라고만 하는 주장을 주야장천 하고 있으나 충분한 물리과학적인 근거가 너무 없기도 하다. 일례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났을 때, 소련이라는 공산국가였던 것인지 군인들을 갈아 넣을 정도로 투입하고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방사능은 뿜뿜대고 있을 거다. 콘크리트로 아예 봉쇄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콘크리트 부식 등의 이유로 러시아는 사고 현장의 원전을 스테인리스로 아예 덮어버리는 공사를 한다. 여기에 막대한 건설자금은 러시아가 부담하기 벅차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십시일반의 예산까지 투입된 사례를 볼 수 있다. 단순히 남의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방사능은 국경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전 지구를 오염시키는 이유 때문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 수습은 오도하고 덮어버리려 하며, 이후는 방사능에 관한 뉴스를 차단하기 바쁘다. 일본은 개개인이 후쿠시마 방사능에 관한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처벌받는 이 웃지 못할 짓을 벌이고 있다. 기본적으로 방사능이 전부다 생물체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확실한대도 이를 안전기준치를 운운하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식으로 호도하려 한다.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는 정착된 듯 보여도, 일본은 여전히 천황이 국민의 권리에서 출발하는 봉건제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이다. 정치가 세속 되는 영주나 쇼군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해서 필요로 한 것이지, 국가를 위해 국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동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간 방사능과 앞으로도 멜트 타운 되며 발생하는 지하수의 방사능 오염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염작업을 일본 전국토에 전부를 할 수는 없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반감기가 도래하지 않는 이상, 계속 방사능 원자 붕괴가 계속 이루어지고 방사선은 계속 뿜어져 나온다. 감마선은 생물체의 유전자 사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사람들은 점점 질병에 걸릴 확률은 높아간다. 어린아이들이 갑상선암에 걸린다는 소식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이런 뉴스조차 발표를 금지하는 일본의 정치는 일본 국민들에게 눈을 가리게 하는 법률부터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후쿠시마에서 피난했던 사람들을 안전하다는 홍보로 다시 후쿠시마로 돌려 보네는 압력이 후쿠시마 피난민들의 제정 지원부터 끊어 내고 돈을 벌어 먹고살아하는 입장에서는 제정 지원이 끊기고 후쿠시마에 남은 주택 등에 대해 세금 지원을 끊고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언제까지 피난민으로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돌아가자니 방사능의 위험을 알고 돌아가지 않으려니 제정 지원을 끊겠다고 하니 피난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국민을 진정으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도록 만들어야 할 국가의 책임은 무엇일지, 아직도 과거의 신하들처럼 그렇게 어떻게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걸리면서까지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인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방사능에서 나오는 방사선 감마선이 거짓말하지는 않을 증상은 두고두고 현실을 증명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얼마나 웃끼는 문장인지 들어는 보았는가? "(방사능을) 먹어서 응원하자"라는 게 기막히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다. 피할 수 있게 차단시켜도 모자를 판에, 먹어서 응원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먹고난 후의 내부 피폭은 감당할 수 있느냔 거다. 한번 실수는 가능하다지만 저건 너무 바보스럽다. 천황이란 샤머니즘 같은 지배층이 시키면 시키는 데로 다 하는 게 숙명처럼 받드는 게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가 않는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어느 지역에 작은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웃 간에 상부상조하는 것과 이웃 간에 서로 반목하며 싸우는 것의 차이는 각기 개별적인 인간의 사회성과 관련된 행불행에 대해 개인별로도 관계가 깊다. 서로 좋은 이웃을 두고 함께 공동으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있다면 관계가 밝게 발전되며 서로에게 공동의 이익으로 성립되지만, 만약에 아웅다웅 싸우고 다투게 되면 가까이 있어서 더 미워지고 서로가 불행한 관계로 개별적 삶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에서 왜 국가 공동체인 EU라는 유럽연합을 만들었겠는가. 역사적으로 가까이 있어서 허구한 날 치고 박고 싸우니 서로가 불행했던 역사적 교훈을 스스로 국민들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싸울수록 서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것이란 것은 유럽은 두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부터 경제통합에서 시작하여 이제 국가적인 통합까지 이루었던 거다. 물론 여기서 영국은 빠져나가겠다는 섬나라 특유의 아집이지만 여전히 유럽에서는 관세와 국경과 통화에서 자유롭게 된 원인이 결국은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자는 공통의 사고방식이다. 이익에 다툼이 없을 수는 있을지라도 서로에게 대포를 겨누며 싸우지는 말자는 큰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나라끼리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경우에 더욱더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독일이 유태인이나 프랑스를 향해 필요할 때마다 사과와 반성을 하는 경향도 독일의 제국주의자들이 말끔하게 청소되어 처단된 이유도 될 것이고 독일에서 하켄 크로이츠 깃발만 내 걸어도 독일 내부에서 법정으로 세우며 처벌하는 것도 독일이 가지는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과거의 교육과 경험에서 출발한 현명한 판단이다. 그런 현명한 판단이 독일이 국제 사회에서 대접받고 지지를 얻으며 인정받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독일의 국민들이 겪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심판은 독일 국민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한 정당한 처벌과도 같다. 제국주의에게 지지했고 종사했던 사람들을 아직도 법정에 세우는 노력을 독일 국민들이 그들 스스로가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그런 독일을 바라보는 프랑스는 독일의 국민들에게 긍정의 신호로 보고 화해하는 것은 사과와 반성,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의 처벌이 동시 이루어지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련의 과정들이었다. 철저하게 피해자였던 국가와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과 이를 역사로 교육하는 국가에 대한 용서는 이루어진다. 과거의 앙금과 상처가 미래에도 악영향이 계속 미치게 될 때, 가해자였던 국가나 피해자였던 국가는 서로가 불행하다. 이는 우리와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과정의 적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의 국민들의 민주주의 국민으로써의 시민의식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천황의 신민이라는 가치관으로는 반성과 사죄도 없을 것이 뻔하다. 일본회의라며 샤머니즘적 신앙의 민족으로는 현대적 관념의 가치관과 공유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