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까지 일을 하고 싶어 하는가? 라"라고 묻는 질문에 55세 - 79세까지 연령층의 65%가 73세까지 일을 하고 싶다는 통계 조사 결과로 나왔다. 며칠 전 퇴근길 차 안에서 듣고 있던 라디오 뉴스 한 토막이었다.
며칠 전, 회사에서 자체 사업으로 주거용 건물을 올리고 있는 부지의 준공전 토지 지적을 정리하는 업무가 있었다. 측량 신청을 하고 현장에 토지정보 공사에서 직원이 나와 측량 예약한 날이 17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16일을, 17일로 착각하여 16일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갔다. 물론 16일에 측량하는 직원이 나올 리가 없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17일로 착각인 걸 모른 채, 왜 측량 기사가 제시간에 오지 않는지 일말의 의심도 없이 기다렸다. 아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한 시간에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나 나는 심각히도 날짜 착각 중이었다. 그제서야 오늘이 17일이 아니고 16일인 것을 알게 된 순간, 단순한 인지 착오가 아님을 자각했다. 가끔 건망증이 새삼스럽게 심각한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부쩍 이런 착오의 일들이 잦아졌다. 아무리 정신을 차린다 해도 가끔 미스매치하는 경우가 야금야금 늘어난다. 이렇게 가다간 나 자신도 스트레스이고 일을 맡긴 회사도 업무 효율에 마이너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창 일하던 젊은 시절인 30대나 40대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착오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런 착각의 경우가 점점 잦아진다는 것.
나이가 들면 이렇게 단순한 것조차도 착오의 경우가 늘어가는데 하물며 새로운 시스템이 적용될 때 나 스스로가 얼마나 이 새로움에 적응하고 빠릿빠릿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배운다는 것도 머리 잘 돌아갈 때나 배우는 거지 점점 굳어가며 뇌의 회백질은 흡사 콘크리트처럼 굳어서 전화번호조차 뒤돌아서면 곧장 망각의 고개를 처드는 나이인데 뭘 하나 외운다는 게 보통으로는 외워지지도 않는다. 한번 보고 흡수했던 지식이 이제는 흡수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뻣뻣하고 딱딱해져 버린 효용가치가 사라져버린 굳어 버린 시멘트 스펀지가 된 기분이다. 인지력과 암기력은 그만큼 떨어지고 낮아졌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새로운 일에 항상 부닥쳐야 할 업무가 점점 힘겹고 어렵게 될 때, 과연 나도 70세까지 지금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렇게까지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머물러야 할 인생 이 자체가 정말 우울한 시간이라는 거다. 단순한 착각도 자주하다 보면, 누군가 급여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큰 역효과이다. 그렇다면 계속 일을 주고 급여를 줘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이런 일을 더 잘하는 젊은 후배들도 많다. 앞으로는 과거의 낡은 업무가 새로운 업무로 대체되고 과거의 업무에 비해 새로운 시스템의 일은 전과는 전혀 맞지 않다.
예를 들어 계산을 위해 주판 1급의 실력으로 엑셀을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계산의 원리는 같지만, 그 작동 방식은 전혀 다르다. 주판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손가락이 주판 알을 잘 만진다 해서 엑셀의 키보드 두드리는 일과는 그 체계가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왕년에 주판 1급이었는데 계산이란 말이야 엑셀 정도는 웃습니다"라며 아무 문제없다는 식의 자신감은 그저 자만이며 오만일뿐이다. 계산의 시트의 체계와 주판 알의 계산 체계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로 멀리 있다. 주판 실력으로 75세까지 엑셀을 하겠다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뻔하다. 하고 싶다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쯤은 자각해야 한다. 착각과 자각 사이에 내가 있을 뿐이다.
젊은 시절에 모은 자산으로는 70세 넘어서 감당할 수 없다는 산술적 계산이 깔려 있다. 하기야 당장 벌어먹고사는 사람이라 축적할 수 있는 자산의 여력이 없다면 공짜가 없는 시대에 누가 노후를 보장해줄 거 같지는 않고, 더구나 공공적 복지 체계가 70세 넘은 노인네들의 생활비까지 보조할 충분한 지원도 안된다. 젊은 세대가 무대책으로 늙어 버린 노후세대까지 부양의 짐을 지우는 일도 사실 버거운 현실이다. 결국은 각자가 각자의 삶의 스케줄에서 닥쳐올 미래의 인생에 대해 무시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나이 든 노인네는 누군가 다 봉양했다. 환갑 나이만 지나도 어디 직장을 매일 다니며 고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 살아가더란 것. 물론 남은 자산과 자식의 봉양으로 생존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나, 통계에서 보듯이, 한 달 최저 생계비도 안되는 연금으로 생활이 안되는 노후의 세대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이제는 보험도 아니었고 노후를 책임지라 말할 수도 없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앞가림조차 버거워서 오히려 부모 세대에게 손을 내미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러니 73세까지라도 어떻게라도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당장의 생계 문제가 되어 버린 셈이다. 달리 대책도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하고 당장의 생활비에 연명해야 하는 운명은 정말 처절하고도 슬픈 일이다. 70세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너무 억지스러운 삶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으려 한다. 노예로 살려고 의도적으로 태어나고자 한 자도 단연코 없다! 다만 노예로 살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무시하고 태어나게 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란 자존감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적 존재라는 뜻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운명을 탓하며 노예는 아니지만 존재의 노예화가 된 시대를 사는 것은, 결국은 살아가는 것의 노예가 아니고 뭘까? 젊은 시절이야 어떤 든든한 자리에 직업을 가지려 하는 것도 생존에 더불어 자신의 삶의 성취감 등등의 여려 가지 이유를 붙이며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늙어서 몸도 노쇠하고 인지력도 떨어지며 건강도 이상이 나타나는 나이에서까지 일을 해서 여전히 돈을 벌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이게 너무나도 억지스럽고 거북스러운 거다. 그래서일까. 결과론적으로도 노인네들의 자살률이 다른 연령층보다 월등히 높은 이유를 달리 다른 것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듯하다. 쉽게 말해, 앞가림 안되면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프지만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노예가 더 이상 일을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 내가 돈 벌지 못하면 더 이상 가치 없으니 죽어야 한다는 자조가 노인네 입에서 공공연하게 나오는 현실은 노예적으로 살았음의 직접적인 실토가 아닐까.
하기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일을 해야 산다는 명제는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는 생각. 태어난 목적은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산다는 철칙 같은 관념화된 인식. 현실적으로도 가치관적으로도 일을 못하면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는 불변의 자연법처럼 견고한 성같은 거다. 왜 우린 일을 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야 뻔한 대답이 근본적 존재론적인 질문의 자리를 차지하고 대신하는 듯하다. 다른 질문을 하면 흡사 불경죄를 지어 처벌받을 만큼 생각은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의문을 품는 자는 가까이할 수 없는 불가촉민 것처럼 이 사회와 가정에 대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느 부모라도 지금 태어나게 한 자식은 앞으로 권력자가 될 것인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도록 살게 할 것인지, 판단이야 다 권력자 대열에 서 있으리란 가정을 하겠지만, 결과는 어느 사회이든 하부 구조를 이루는 사람이 아니란 보장은, 사실 하나도 없다. 내가 살아온 모습이 자식에게 그대로 투영될 것이란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대신에, 자식은 나보다 더 나은 직군에서, 더 좋은 자리에서, 더 멋지고 근사한 위치에서 호령할 자식이 되리란 보장은 할 수 있는가? 학교 다닐 때, 수학 시험은 30점을 맴돌던 부모가 자식에겐 100점을 요구하는 것도 자신의 욕망을 투사시킨 것일 뿐이다. 영어 시험을 100점 맞고, 국어를 100점 맞고 수학을 100점 맞으면 좋은 대학 좋은 학과 혹은 의사나 판사쯤 되는 꿈을 꾼다. 자식이 이루는 성취가 곧 내 삶의 성취로 둔갑하는 것은 바로 자식이 반드시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영 아니란 말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엄연히 1등급 학생은 전교에서 4% 일 뿐이고 나머지 96%가 2등급 이하인 것을.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도시에서 살면서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쓰는 모든 것들을 거의 대부분 전자결제 시스템을 사용한다. 지갑엔 현금 대신에 플라스틱으로 된 IC 칩이 내장된 카드를 쓰며 혹은 휴대폰의 전파로 전자 결제 시스템에 접근해서 돈을 지불한다. 전산 기록 상에 존재하는 숫자가 진짜로 화폐와 비례할까 아니면 단지 숫자의 정보일까. 그리고 어떤 곳에서 사용된 결제 자는 포인트 점수를 주거나 때론 몇 번 구매하면 하나는 서비스를 준다며 쿠폰을 주기도 한다. 결제를 수납 받은 금융기관이나 통신사에서 포인트 점수나 마일리지를 주기도 한다. 현금으로 주고받으면 결제 회사를 거치지 않으니 포인트나 쿠폰이 없다.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은 난다. 계속 한 곳에 집중해서 소비하려는 심리가 발동된다. 내가 소비에 있어서 이른바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셈이다. 때론 이런 할인처럼 보이도록 유도하는 것을 마케팅이라고 하기도 하고 상술이라고 하는데 소비자의 얼마 되지도 않고 또 이미 할인된 금액을 제품가에 다 반영 시켜 놓고서 할인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다른 곳을 이용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족쇄형 마케팅 전술이다. 나아가서 우리가 매일 지출하며 결제하는 신용카드, 전제 결제 시스템에서는 거래 기록이 그대로 빅데이터가 된다. 어디서 무엇으로 소비를 하며 어떻게 이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단순한 정보가 모이면 모일수록 소비의 패턴이나 성향이 나타나고 이런 소비의 성향을 통계적으로 추출하게 되면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 마케팅의 자료로 활용된다. 모든 SNS의 수익기반이 광고 마케팅의 도구인데, 어떤 쇼셜 미디어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그 마케팅 자료는 곧잘 홍보용으로 빅데이터로 제공될 때 역시 또 새롭게 유인용으로 대체된다.
오래 전 역사에서 배웠다시피, 분명 노예제도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전쟁으로 폐한 국가의 국민이나 시민들이 포로로 잡혀가면 노예로 살다 죽었다. 혹은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노예로 살다 죽었다. 노예는 재산이 되어 이리 지리 노동력을 제공하며 살았다. 예를 들면 로마시대에는 노예의 수명이 30년이 채 넘지 못했다는 기록을 봤다. 노예로 살았던 사람의 무덤을 발굴한 뼈를 보면 무릎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니 무릎이 다 닳아 버리리 정도로 노동을 했으니 어떻게 30까지 살지는 못했던 수명이었다. 권력이 점점 고착화되면서 전쟁의 포로가 노예로 살기보다는 노예가 노예를 낳는 것이 점점 많아졌을 것이고 보면, 노예는 왜 노예를 낳았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하나 어느 노예가 그런 질문을 할 만큼의 자존감을 가지고 존재의 근원에 대해 따져 묻는 것은 서자로 취급받아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한 홍길동 정도나 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노예는 질문이나 의문을 가질 자유가 없었다. 조선시대의 양반 가문의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도 노비라는 항목의 재산이 얼마나 자산적 가치로 취급했는지 기록으로도 나온다. 대를 이어 노비는 노비로 살아야 했던 그 노비의 아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노예나 노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만한 자각이나 인식의 지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뭘 알아야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노비였으니 당연히 자식, 또한 노비로 노예로 주인을 섬기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대를 이어 가문의 노비가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생각이었고 여기에 다른 이의를 품을 수도 없는, 그런 확신의 신념 앞에서 노에 탈출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간혹 탈출이라고는 하겠지만 극소수의 상황으로 가능했을 수는 있어도 그러지는 못했다. 노예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해 노동을 끝없이 제공하는 역할만 있을 뿐,누군 태어날 때부터 노비고 양반이고라는 물음의 생각이란 것을 하는 즉시 죽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할 지식도 없이 태어나면서 주어진 고착될 종속된 인생에 다른 어떤 의문이 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배제된다는 뜻이고 존재함으로써 반드시 구속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육체의 구속일 수도 있고 생각의 구속일 수도 있고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는 것의 조건에 따르는 것으로써 필수적으로 종속되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 살았는가에 따른 구속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적인 전지한 존재로는 인간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누구인지 지금의 누구인지 그 사회적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몇 살까지 일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마다 곤란하다. 네, 죽을 때까지 일하죠. 일로 노예처럼 살도록 나왔으니까요.라고 말하면 시작부터 너무 우울하지 않을까. 사는 게 도대체 일하러 나왔다는 것도 슬프다. 이럴 바에는 왜? 나와가지고 이렇게 일 없어서 삶의 졸보로 사는 걸까. 오늘도 또 지루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질문을 또 받았다. 언제까지 일할 거냐라고 묻는다. 아, 이 무슨 저주스러운 질문인건지...
가스 학살로 유명했던 폴란드의 아우츠비츠 유태인 수용소 정문에 걸린 팻말이 떠오른다.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를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