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지 눈빛사진가선 61
이성호 지음 / 눈빛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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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작가는 가톨릭 성지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췄다. 개인적으로 이 사진집의 저자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으나, 가톨릭 성지에 시선에 머문 이유가 순교의 장소였던 추측 때문이다. 그래, 순교.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 권력으로부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꺼이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 그리고 현생의 포기를 통해서 다시 부활하겠다는 신념.(신념이 틀렸든 맞든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자신의 가치관을 굽히지 않고 기꺼이 삶을 스스로 꺾어 버리는 자해와도 같은 것이 순교이다. 흡사 예수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렸던 것과 같은, 이런 같은 순교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욕구는 누구나 알다시피, 오래 살려고 한다는 것이 확정된 성향이다. 진시황이 영원히 살고자 불로불사의 꿈을 꾸었듯이 종교 또한 영원한 삶이 인간 욕구의 신앙적 근거이다. 삶의 본질이 죽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기한다는 것은 그래서 특별한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구차한 현실을 포기하고 더 나은 삶의 부활이야말로 인간이 가지는 궁극의 욕구에 부합함으로 지금의 현생의 포기도 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종교적인 이유로 가톨릭 성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대구 지역의 팔공산 한티재에도 가톨릭 성지인 순교지가 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죽었던지, 산의 계곡이 전부 피로 흘렀다고도 전한다. 지금이야 어떤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치러야 할 생명의 대가는 별로 없다. 지금이야 거리낌 없는 신앙인데, 탄압이 한창일 때의 신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박하고도 위험한 신앙이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앙을 버리지 못했던 그 강렬한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신성이 강력한 새로운 세상을 바랐던 것일 수도 있고, 낡은 현실보다 새로운 낙원의 추구하는 삶일 수도 있다. 문제는 현실에서 안주할 수 없는, 그 못 견디겠음의 반증일 수도 있다. 새로운 종교의 접근 방식은 그것이 환상이었든, 현실적인 대안이 없어서 전혀 다른 어떤 체재이었든 간에 현실의 반작용임에는 틀림없다. 현실이 거칠고 사악해지고 흉폭한 권력의 난동이 커져갈수록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될 것이 뻔하다. 하기야 요즘 새로운 신흥 종교 하나가 나와 신도 수를 늘려 간다 해도 억압하거나 핍박해서 탄압으로 죽이지는 않는다. 엄연히 종교적인 자유가 있는 곳에서는 순교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를 싫어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신심의 종교에 대해 폄하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그리스도교이건 불교이건 모든 종교는 인간의 욕망의 궁극에 해당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의 부조리에 대해 극복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종교이기도 하다. 영원한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성지의 순교에 대해 의미는 매우 특별하기도 하다. 종교는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결과로써 다가서려는 인간성의 본능과 다르지 않기도 하다. 크리스마스에는 성당을 가서 성탄절의 종소리를 듣고 마리아 상에 경건의 기도를 하기도 하고, 초파일에는 가까운 절에가서 등 하나 달고 이름 석자 적기도 한다. 다만 유일신이든 다신이든 상관하지 않을 뿐이다. 믿음이란 그 어떤 궁극의 다가섬의 표정과 같기 때문이며, 그래서 종종 카메라를 들고 산사를 찾고 성당에 성모상에 카메라를 통해 보려 든다. 다만 주장이 강요가 될 때는 그 주장의 순수성을 주장자가 입증할 책임이 있다.

 

일부의 인간이 위대해지는 경우는 대부분 인간의 일반적인 본능에 반대할 때이다. 욕구와 나아가서 욕망과 이기에 저항하고 권력과 압재에 도전할 때이다. 왜냐면 본능에 반하거나, 압력에 저항할수록 자신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던, 가장 큰 본질적인 욕구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생각해봐도 과연 나도 이 본능에 저항할 곤조가 있기는 있나?라는 자문을 해보게 된다. 비겁하고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그때 그때마다 요령의 처신으로 약삭빠르게 욕망에 부합되고 살아가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비록 종교인은 아니지만,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으로 삶을 내려놓을 수 있는, 본능에 저항할 신념이라도 있을까?라는 부끄러움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난 내 삶에 신앙이 무엇인지. 내 생을 버릴 만큼의 강렬한 염원이 있기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면 비굴해지는 걸 자각하게 된다. 변절이란 간혹 위기 상황의 재빠른 대처라고 변명으로 여길 수도 있다. 뭐든 스스로에게 자기 합리화는 필요한 것이고 보면, 그런 신념으로 생을 끊어 버리는 것은 도저히 버릴 수 없어서 결국 자신의 육체를 버리는 편을 택한 것일 테다. 현재의 육신을 버리고 죄를 사함을 받아 새롭게 부활하는 곳의 낙원에서 삶은 그래야만 가능했던 이유도 된다. 거듭남이란 그런 거다.

 

삶이란 자랑스러움보다는 부끄러운 일들의 연속이다. 자신에게 떳떳하게 주장하고 모두가 공감된 나만의 오기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삶의 공허와 허무를 외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존재의 절망 앞에서 굽히지 않는 자신의 깡다구를 가지지 못한 탓은 아니었던가 되묻게 된다. 오늘 하루 하루 이익과 돈벌이에 있어 자본에 늘 휘둘리며 살아가는 비겁한 모습이 굴욕적이기도 하다. 살아가야 한다는 보기 그럴싸한 핑계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도 벅찬 것도 사실이다. 자본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조하고 상황에 따라 항상 일관되지 못하고 이중 잣대로 사는 것이 뭐가 나쁜 것은 아니더라도, 쪽팔리는 것도 부정하기엔 스스로가 나약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러니 신념이 없는 자에게는 허무와 비애가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비굴함을 애써 외면하고 자본에 부합하려고 이게 잘 사는 거라는 등식은 현대인의 고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 어떤 것에 자신의 전념을 받칠 거리가 없다는 것은 고독한 거다. 객기 하나 부리지 않는 고독은 스스로가 더 초라하지 않을까.

 

비록 이 책 사진집에서 순교자의 장면을 담은 사진이 없을지라도, 순교지에서 담은 조형물이나 풍경을 통해 전해져 오는 순교하는 날의 메아리가 처절하게 들리는 듯한 사진이다. 거룩함과 숭고함은 종교의 상징적 의미에서 나오는 순교의 위엄이, 그래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모습의 마리아 상에서 느껴지는 온화한 평화를 순교지에서 만나게 된다. 이 땅의 평화란 무엇이고 새로운 세상의 염원은 또 무엇일까. 단순히 종교적인 신념에 의한 것 이상의 가치관과 믿음을 사진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이란 경건하고 엄숙한 과정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사진에서 만나는 순교지의 풍경은 그래서 허투루 살지 않는 신념 하나쯤 가지게 된다면 온화함이 깃들 수 있다는 생각을 읽게 된다. 순교지에서의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은 처참함과 평화로움이다. 그때 당시의 처참함이 오늘날의 평화로 이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들이 순교당하면서 가지고 싶어 했던 오늘의 모습은 아닐까. 믿음에 강압이 없고 자유가 있을 때, 헌신과 자기희생이 있을 때, 어쩌면 세상은 그야말로 천국 같은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내가 자신의 믿는 신념에 목숨 하나 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사진에서 요구를 하는듯하다. 신념의 가치관과 목숨을 바꿀 수 있는 강건한 자기 애증은 감히 내가 넘볼 수 없을 것만 같다.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바뀌는 삶의 방식은 늘 일관성을 위협하고, 요령껏 대처하는 약싹빠른 것이 미덕이 된 오늘날의 조변석개의 삶의 태도에 과연 무슨 문제는 없는지 따져 보게 하는 사진이었다.

 

 

PS : 개인적으로는 크리스마스철이면 성당 가서 성모 상을 보고 기도하러 간 적도 있고, 초파일에 가까운 산사에 이름 석자 넣고 등도 달아 공양한다. 종교란 전체를 아울러서 바라보지 특정 종교를 대상으로 신앙을 따지지는 않는다. 종교는 개별적으로 존중하는 편이다. 다만 예수천국 불신지옥 따위를 종교로 보지 않고 그저 영업으로 호객행위로 여길 뿐이다. 또는, 무슨 암자에서 부적 하나에 몇십몇백씩이나 들여 기도하고 재사 지는데 수백 들어가는 식의 기복적인 것들도 같은 맥락의 종교 산업의 영업으로 볼 뿐이다. 종교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 깊숙이 들어왔을지언정, 절대적인 영역이 자본에 휘둘리면 그냥 종교 장사라 칭한다. 물론 종교 장사에 순교한 적이 없다는 것도 안다.  특히, 여자 신도는 빤주를 팍팍 벗어야 자기 신도라는 사이비 따위는 극혐한다. 그게 종교를 영업에 이용하려한 자들이 똘끼 목사가 나오게 한 배경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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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8-29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하고 비슷한 종교관념을 가지셨네요. 저도 편리교 신자거든요.
세상 모든 종교를 인정합니다. 뭘 믿든 자기 마음 편하면 되고 남에게 민폐 안끼치면 되고.
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등의 독선은 별로예요.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일종의 마음 수련 과정 같다는 생각이구요.
기독교 집안에 시집간 제 동생, 교회 안 나간다고 평생 사탄 취급 받으며 살았어요.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가 사람 잡습니다요

yureka01 2019-08-29 11:17   좋아요 1 | URL
앗..정말 좋은 종교를 믿으셨어요..편리교..

네 ..신앙의 가치관이 사람을 악압하면 그건 종교의 본질하곤 거리가 멀죠...

독선적 종교가 위험한 거라서요..

대부분 이단.사탄, 악마, 저주..이런 험악한 단어가 나오것치고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본질의 고민이 없어보여서요..

2019-08-30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9-08-31 22:46   좋아요 2 | URL
강요가 곧 영업이거든요...
종교로 장사하는 영업은 이미 순수성 실종이라서요..

가을 시작입니다..더 아름다운 시간 만드시길!~

2019-09-01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