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휴가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치로 향했다. 갑자기 우금치였던지 모르겠다. 특별히 작정한 바 있어서 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4년 11월 그날의 전투의 현장에서 과연 이름 없는 아무개 농민이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죽창 하나 들고 우금치 고개를 달렸을 그 순간을 떠 올렸다면 너무 비약인지는 모르겠다. 좁은 골 양 사이드에 대포와 개틀링 기관총은 밀집 대형으로 뛰어오는 농민군들이 쉬운 표적지나 마찬가지였겠지. 전투라기보다는 그냥 학살 수준이었을 것이고, 농민군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자살 수준이었다. 1-2만 명이 50번의 "둘격 앞으로"에서 죽어 나간 숫자가 산을 이루듯이 시체가 쌓였을 것이다. 참가한 인원이 정확히 몇몇인지 참가 대장을 기록하지도 않아서 일까 기록이 없으니 아마 누군지도 몰랐을 것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몰랐을 것이다. 전황을 분석할 줄 아는, 군사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운 지도자도 없이, 싸우던 대로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오로지 돌격 앞으로!~였으니, 패배하는 거야 아쉽지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했을 것이다. 썰에 따르면, 일본군 1명이 거의 500명을 죽였을 정도로 전투 수치는 극명히 대비하는 것을 보게 된다.
2. 시작은 전라도 고부 군수의 폭정이 원인이었지만 국내외의 정세는 제국주의가 침략이 시작되고 전 세계는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이다. 일찍 개항을 하고 막부의 군국주의가 임진왜란에서 주장한 정한론이 다시 군국주의적 제국건설과 대동아공영권이 다시 정한론으로 나온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소비시장이 필요하고 자원을 약탈할 식민지가 그래서 필요한 목표가 조선 점령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국가가 패망하는 이유나 원인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결국은 집권하고 있는 통치 세력의 무능과 판단력 부재, 그리고 기득권의 집착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다. 일개 군수가 저지른 패악으로 비추어 보면 중앙의 집권세력의 패악은 오죽할까만은, 철저한 기득권의 권력 안주는 국제정세를 너무 둔감할 수밖에 없고 기득권의 손실을 두려워 놓지를 못하게 하는 것도 판단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쇄국도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서 문을 닥고 막기에 급급한 방편일 뿐이었음에 대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가 다 국가의 힘을 가질 수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집권세력의 판단에 대한 책임은, 그대로 국민으로 피해로 전가되었고 국가를 잃은 식민지 2등 국민의 역할은 36년 동안의 피지배자로 약탈당하는 고통으로 연결되었다. 권력의 무능한 책임에 대한 대가가 국민이 고스란히 전가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똥칠은 권력자들이 질러 놓고, 치우는 것은 국민이었던 아픔이다. 사대주의 속에 빠져 있었을지라도, 복속당해서 말과 글을 잃은 적이 없었던 역사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흡수 합병되어 나라가 사라지는 결과는 처음이었으니 근대사의 뼈아픈 치욕적 패배였다.
3. 러시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단 돌격 앞으로!~의 구령이 우라!~이다. 돌격 앞으로 할 때 우라!~~~를 외치며 총알과 포탄이 터지는 사이로 달려 들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은 무모하기 이를 대가 없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피를 끓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날의 전투에서 이름 모를 농민이 죽창 하나 빼어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을 것이다. 죽창으로 한번 찔러 보지도 못한 채 멀리서 쏘는 타깃이 된 돌격은 무참히 쓰러지고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고통의 아우성 같은 바람 소리가 우라!~~로 들렸을 법도 한 착각이었다.
4. 우금치 골짜기에는 너무나도 적막한데 한 여름의 바람 소리는 흡사 그날의 아우성처럼 복잡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골짜기를 타고 빠르게 흐르는 바람은 그날의 소리를 닮은 듯이 거세게 불어 댔다. 그리고 100년도 더 지난 한 여름날의 더위는 숨 막히게 했다. 이름 모를 무수한 들풀들이 우금치 골짜기에 빼곡히 피어 있었다. 개망초꽃이 뜨거운 한여름의 바람을 맞아 흐드러지게 흔들렸다. 이 많은 풀들이 흡사 그날 치열하게 내 달렸을 농민들이었을 것만 같았다. 스치는 바람은 더 뜨거웠던 함성을 닮았다.
5. 휘몰아치는 바람에 골짜기의 나무는 온몸을 비틀어 가지를 흔들 거렸다. 역사는 그날의 기록으로 한 페이지를 남겼지만, 추풍낙엽처럼 떨어져간 영혼들은 외로운 위령탑 하나로 가름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렇겠지. 장비도 변변하게 없이 군복이란 것도 없이 전투모 하나 없이 짚신으로 전투를 했을 사람들의 생명들은 바람 앞에선 촛불과 다를 바 없었던 비극의 현장이었던 거다.
6.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영향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미치고 효력은 되풀이로 살아난다. 징용당해 청춘을 빼앗긴 피해자가 민간 개인 신분으로 기업에 착취 당해 배상을 청구한 결과를 두고 정치적 대응한 현재의 일본 정치권은, 수출 규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에 국내는 일본에서 만든 제품의 불매를 시작했다. 결과는 어디까지 미치게 될지 장담은 할 수 없으나 현대에서 기업의 제품은 각종 부품의 생산 유통 제조 판매가 분산되어 있거나 분업화되어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 한 기업에서 모든 것을 다 하기에는 벅차다. 하려면 다 할 수 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고 생산 코스트의 상승을 야기하게 된다. 이런 국제 무역의 질서가 효율적이고 상대적인 이익 발생이 우월하기 때문에 분업화되는 무역 선정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질서에 대해 정치적인 영향으로 재제적 수단화시키는 것은 양자 사이에서 대단히 위험하다는 거다. 그런데 일본 정치권에서 사법적인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무역의 제재라는 카드가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자칫 자해적이기도 하다. 일본은 간과한 것이 하나가 있다면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대로 일이 꼬여 박살 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분연하게 일어난 것은 이름 없는 의병이 불처럼 일어나듯 같은 시민들의 합일점이었다. IMF 때 금반지까지 빼서 던질 분위기를 잘 타는 민족임을 몰랐던 거다. 아직 IMF의 자금을 받은 국가치고 이렇게 금을 모아 달러로 바꾼 경우는 우리가 유일하다. 즉, 분위기 타는 것을 냄비근성이라고도 하지만 이랬든 저랬든 그 위기의 대응은 결국 다수의 결집으로 타나 났던 거다.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과 후의 양상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거다. 요즘 가끔 대두되는 문구가 떠오른다.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못했으나, 불매운동은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동학 농민군들처럼 죽창을 들고 개틀링 기관총 앞으로 돌진할 수는 없어도 내가 가진 자본으로 일본산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것은 독립운동보다 훨씬 쉽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역이란 어디까지나 구매처가 갑이다. 사달라고 마케팅이 있고 판매가 이루어져야 이익이 발생한다. 팔아도 사주지 않겠다는 단체의 구매력의 힘은 자본주의에서 함부로 건들기 상당히 힘든 상황에 빠지게 한다. 일본은 개개인의 청구권에 제갈을 물리겠다는 발상에는 동학 농민군이 지금 나타났다면 과연 찬성했을까 따져 볼 문제일 것이다.
7. 일본의 방식은 늘 한국이 그들의 존재적 이유였던 것처럼 이익을 많이 봤다. 식민지에서 뽑아 먹은 노동력이 얼마였으며 자원이 얼마였고, 수탈한 물자들은 얼마였겠는가 싶다. 6.25한국 전쟁의 군수물자 생산 기지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도 한국 때문이었을 것이고 베트남전에 한국의 군수물자를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은 도쿄의 올림픽을 하고 자신들이 부를 쌓은 과시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옆에 뽕 빨아먹는 존재가 있어서 고맙기는커녕 항상 혐한이 그들의 방식으로 임란 때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닮았을까.
독일에 점령 당한 프랑스의 어느 서점에서 혐독일이란 책이 매대를 차지하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일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 년 전쟁을 벌였을 정도로 앙숙이었다지만 영국의 어느 서점에서 혐 프랑스 코너로 다수의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도 없고 프랑스에서 어느 서점에서 혐영국이란 베스트 코너도 없다. 하물며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어느 서점에서도 혐독일하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제일 잘 보이는 매대를 장식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 대형 서점에는 혐한의 지독한 정서로 장식된 책이 버젓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판매 순위를 오르락 거린다. 일본에서도 분명 지식인이 있고 양심이 살아 있는 층이 있을 수 있다지만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서이다. 반대로 우리나라 어느 서점에서도 혐일하는 책을 모아 제일 잘 띄는 위치에 매대를 세웠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알라딘 온라인 서점에서도 혐오의 일본에 관한 책을 모아 코너로 만든 것도 없다. 과연 한국이 일본에 무슨 잘못을 하고 밉보였던 걸까? 혹시 그들의 섬나라 특유의 열등감은 미움과 혐오로 발전되고 살아가는 존재적 이유는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일본은 한때 잘 나갔다. 잘 나갔을 때의 갈라파고스 같은 똥고집은 곧 잘 장인정신으로 우대되며 오로지 자기 분야의 최고 실력으로 발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 시대는 복제가 자유로운 시대이다. 광범위한 복사의 방식은 진본과 모방의 구분을 없애 버렸다. 여기에서 일본의 장인정신은 타협 없는 똥고집이 최고하는 신화가 무너진다는 점이다. 그 똥고집과 혐한의 정서는 결국 자신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성찰을 방해한다.
사과와 반성은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피해자가 그만하면 많이 했으니 반성과 사과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해소가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그들의 특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는 자만심의 민족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한일간의 갈등 역시 양상의 방향과 키는 가해자이자 전범국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였던 우리가 용서와 반성을 받아 줄지 말지를 결정권자이다. 이런 인식이 없는 한, 앞으로도 한일간의 서로 앙숙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패망한 것은 한 번도 과하다. 다시는 막무가내의 돌격 앞으로 같은 우를 범하지 않고 국가가 복속되었을 때의 식민 국민의 한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노예는 가끔 자발적일 때가 제일 안타까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