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기해보면,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30년 동안 한해 평균 GDP 성장률이 7%의 고도기. 자산은 나날이 늘어나고 장사는 잘되고 소비는 늘어난다.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고 자고 나면 몇백을 벌었던 시절. 공급은 늘 딸리고 수요는 늘어나니 인플레이션도 심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 역사 이래로 그렇게 호황인 시절이 없었다. 6.25 전쟁 후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나라에 돈에 대한 열망은 무엇보다도 강했고 잘 먹고 잘 살아 보세의 새마을 운동은 시골까지 번졌다. 다시는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했던 때를 사무치도록 복수하고 싶었던 민족이었으니 먹고 잘 살자는 욕망의 생존이란 어떤 불법도 용납하고 독재도 타협하고 수긍하는, 먹고살기 위한 것에 비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둘러대던 시절이었다. 그런 욕망의 열정은 자산에 거품을 끼이하였고 때가 끼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돈으로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하는 시절이었다. 맥주와 샴페인은 마구 흔들고 욕망이 흔들리듯이 거품을 일으켰다. 흥청망청 쓰고도 다시 채워지는 물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사업하던 사람들은 차입에 차입을 거듭한다. 차입해서 비싼 이자를 지불해도 매출에는 꺼떡없었다. 은행도 부동산과 사업에 비싼 이자 받아먹느라 마구 빌려줬다. 국제적 투기자본 해지펀드도 마구 들어오고 투자 자유화조치는 밀물처럼 외국 자금이 몰려든다. 성장률을 보니 빌려 줘도 남는 돈놀이가 최고였다.
1997년 11월, 이전부터 동남아 발 외환 위기의 여파였던가. 해지펀드(외국계 은행들 포함)란 놈들이 일시에 외채를 상환하라는 압력이 들어온다. 수출로 벌어들인 상환으로 달러가 빠져나간다. 은행은 달러가 없다. 한국은행에 달러를 빌려 달라고 해도 한국은행도 달러가 없다. 상환할 돈이 없으니 파산에 놓인 상황이다. 아 디폴트. 디폴트. 이 부족분을 비싼 이자를 주고 국제 공공 금융기금에게 빌려야겠다. 그게 인터네쇼날 머너트러니 펀드, 즉 국제통화기금이란 곳(IMF). 선진국들이 돈을 갹출해서 빚진 놈들에게 고리로 빚을 다시 내줘서 자기들 은행에 손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든 기금. 물론 빌려주면 공짜로 빌려주나. 무슨 담보를 조건을 내걸고 그 담보대로 이행하면 빌려 줄께라고 했거든. 이 돈이라도 빌려서 메꿀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안 그러면 디폴트, 파산이라. 그럼 국내은행은 빌려 준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려 하지만 기업들은 현금이 당장에 없다. 연체에 또 연체. 제일 돈을 많이 끌어다 쓴 대기업이 파산하고 딸려 있는 협력업체 중소기업 모조리 은행 압류이었다. 제 돈으로 사업하는 놈 하나도 없이 모조리 차입에 의존해서 기업이 먹고살았는데 돈이 돌고 돌았는데 일시에 빌려 준돈 내놔. 다시 재대출 승인 못해.라고 하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어음은 휴지조각처럼 나부 겼다. 은행에 어음 결제를 못하니까 부도난 어음은 휴지로도 못쓴다. 은행들이 워낙 때인 돈이 많으니 은행의 자산 부실은 천문학적인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은행은 통폐합하고 망한 은행 직원들 구조조정당한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사표를 내고 쫓겨 나야만 했다. 기업의 직원들은 망한 회사의 치맛자락을 붙잡아도 회사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량 실업의 나라가 되었다. 이른바 소위 말하는 IMF 체제를 맞이했던 거다. 일시에 담보 잡은 대출금 상황이 들어오면 연체가 된다. 현금이 없었으니 상환은 하지 못한다. 아파트 담보가 경매로 나오고 매물이 쏟아진다. 자산 하락이 홍수를 이룬다. 실직에 자산 가치 하락의 이중고였던 거다.
국가 전체가 맥주컵이라고 가정해보자. 컵에 맥주가 차오르니 부글부글 거품이 먼저 차오른다. 네 거품. 이걸 보고 버블경제라고도 했다. 이 거품이 일시에 꺼져 버리고 실제 담긴 건 반도 안찬 맥이 다 빠져버린 맥주 맛만 쓰게 남았던 거. 이게 고도성장의 허상이었다.
그럼 개인들은 어떻게 실직의 시절을 건너왔을까? 나의 경력증명서(건설 기술자 경력관리하는 기술자 협회 발행)에 보면 98년에서 99년 사이동안 아무런 경력이 없이 비어있다. 소속이 없었다는 증명이다. 자영업자로 있었고 98년에 회사는 문을 닫고 이력서 넣을 곳도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장사를 했다. 잘 될 리도 없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테고, 보기 좋게 떨어 먹었다. 그나마 짜내고 짜낸 채무로 만든 자산조차 다 사라지고 죽어라 직장을 얻으러 이력서를 남발했다. 말이 남발이지 남발할 만한 곳도 많이 없었고 조건을 살피고 자시고 가 없었다. (이하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기로!~사연이야 없을 수는 없으나 무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서. 줄이기로 하고.)
이 책은 그 IMF 시절을 거쳐온 한 개인이 갑자기 직장에서 퇴직하고 난 후, 산사로 출가하는듯한 수기를 적은 이야기이다. 산사를 찾아서 시름을 달래고자 했던 목적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었으니 왜 공감이 되지 않겠는가. 아마 나도 그 시절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고 책의 저자는 출가처럼 다녔고 나는 사진으로 출사를 나갔던 일체감이었다. 공허의 시련을 출사와 출가로 풀었던 것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어느 시대이든 십자가의 무게가 다 하나씩 있다. 전쟁통에는 생존의 무게가, IMF 시절에는 파산의 무게가, 요즘처럼 젊은 후배들은 취직의 무게 등등 시대를 관통해가면서 저마다의 삶에서 무게의 부대끼는 고역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짐을 덜어낼 자기 합리화가 무엇이라야 할까? 누가 더 무겁고 덜 무겁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마다의 짐은 다 무겁거든.
문득 하나의 문장이 떠오른다.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네 짐을 대신 덜어 줄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삶이란 어쨌거나 완벽한 제로의 무게는 없다. 어떤 것이든 무거움은 따라다닌다. 물리적으로는 중력의 작용일 것이고 심리적으로는 부담감일 테다. 관건은 어떻게 덜어낼 수 있게 저마다 감당할 무게만 가진 채로 시간에 놓인 인생의 고갯길을 가뿐하게 넘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산행을 해보면 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기고 욕심부려서 배낭에 이것저것 다 때려 넣고 짊어지고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어깨는 처지고 숨은 가쁘다. 우리 삶에서 왜 꼭 덜어내야 할, 그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가야 할는지 스스로에게 죽는 날 배낭을 내려놓을 때까지 끝없이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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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화에서도 화풍이라는 것이 있고 음악에서도 지향하는 음악 스타일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사진에서도 제각각의 사진 스타일이 있다. 어떤 피사체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추구하는 모티브이자 추임새이며 사진의 스타일을 규정하고 이를 작가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고 이 표현이 곧 작가의 주장이나 다름없다. 작가마다 제각각의 개성과 취향. 피사체의 느낌은 같은 것은 없겠으나, 어떤 스타일로 수렴되는 추임새와 장단과 고저는 있기 마련이다. 오랫만에 발견한 스타일이 비슷한 사진 산문집이다. 비슷하면 공감이 쉽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일치할 수는 없더라도 동질성의 성격이 수렴되고 모아진다. 그래서 사진에서 스타일이 비슷해도 추구하는 아이덴티티가 없다면 그 사진은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봐도 재미조차 없다.
이 책에 나오는 한 장의 사진에서 나오는 작가의 사유가 깊고도 풍부하다. 다른 것도 물론 마찬가지겠지만 사진도 더더욱 보는 만큼 찍고(보이는 것이 아니라) 찍은 만큼 보고서 생각한다. 어떤 감성의 시선이 마음을 움직였으며 셔터를 누르게 된 것인지 또 사진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심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마음의 직결 스위치인 셈이다. 감성은 심성이고 심성이 곧 감성이 아니겠는가. 책에 실려 있는 사진들이 하나같이 정갈하다. 정갈하니 사진이 깔끔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스타일에 생각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깊다. 표현의 방식이 단순성과 정갈함에서 깊이가 나온다. 들뜬 느낌이 아니라 차분히 가라앉았다. 사색을 깊이 하려면 자세부터가 차분해지듯이 작가의 사진 자세가 차분할 것임을 유추할 수 있고 한편 역설적으로 차분할수록 사유의 앙금은 짙게 피어오른다. 사진은 이래야 하는 것이라고 예시로 보여주는 것처럼 멋지다.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 스티브 잡스의 단순한 디자인이 왜 나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플함이 곧 미려함으로 표현되는 세련미는 난삽한 것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사진이 뺄셈의 미학이라는 말이 아주 딱 들어맞는 군더더기가 없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사진에 붙은 산문은 길지 않다. 운문처럼 짧고 간결하지만 핵심도 둘러 가지도 않는다. 하고자 하는 표현이 그래서 간추렸으니 깔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사진과 글이 좋다. 구구절절 긴 글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사진은 포인트를 담는 작업이니 글 또한 그런 스타일에 초점과 궁합을 이룬다. 사진의 골격 즉 프레임과 글의 골격이 오버랩된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아는 바 없지만 적어도 10년 이상 자기의 사진을 발견했다는 걸 추측하게 된다. 사진이 그랬으니까. 하루 이틀 찍어서는 스타일이 뭉쳐지지도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한 장을 찍어서는 실수로도 찍을 수 있는 게 사진이지만 이는 아무도 모른다.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장에 두 장에 수백수천 장을 찍다 보면 그제서야 뭉쳐지는 생각의 응어리가 뭉쳐진 덩어리로 나온다. 그래야 의도라는 의미와 뜻이 사진에 문신같이 새겨지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들이 흔히 보는 눈으로 보이는 것들을 뽑아낼 안목을 가졌고 이 안목에 짧은 글은 사유를 덩어리의 글로 풀어낸다. 사진들이 나와 죽이 잘 맞다. 이 정도의 사진과 글이면 앞으로도 주목하게 될 작가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아주 마음에 드는 책 하나 발견했다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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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끔 우리가 사는 걸 연극에 비유할 때가 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혹은 영화 같은 극적으로 은유된 세계에서 제각각의 역할분담극이 아닐까. 이게 게임으로 치면 롤 플레잉이다. 그러니 사는 게 꼭 게임 같은 느낌도 난다. 나의 역할. 당신의 역할. 제각각에 설정된 우리가 가진 역할에 따라 플레이하는 모든 것, 이것이 삶이라고 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이다.
가정을 해보자. 선사 시대에 어디 어디에서 태어났더라면? 혹은 고대 어느 시대에 어떤 지역에서 살았더라면? 아니면 중세 시대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아, 혹은 나라는 인식을 하고 보니 현재라는 이곳에서 살고 모종의 어떤 역할 중이었더라는 이야기이다. 지금을 의식하고 알아차리고 보니 글쎄 여기였고 이곳에서 내가 가진 모양과 크기와 깊이로 살고 있더란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가 사는 우리 세대의 서사는 무엇일까. 호메로스와 일리아드가 살았던 시대의 서사는 무엇이고 중세의 십자군의 일개 병사는 대체 어떤 시대의 서사로 살았을까? 아니라면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어느 지방에서 출병한 병사는 유럽의 어느 전선 참호에서 호각소리에 돌격 앞으로 달리며 독일군의 기총소사를 받으며 쓰러져 갔던 그 서사는 대체 무엇일까. 역할과 서사의 구조에 각 시대마다의 아우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삶이 게임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은 직장인 스트레스 구조의 서사 게임 중은 아닐까. 경력을 쌓는 것은 레벨을 올리고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무언가 열심히 몹을 때려잡듯이 돈을 벌어 필요한 게임 아이템을 사고 장구류를 사고 집도 사고 자동차도 사고 그래서 레벨을 더더 올려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은 아닐까. 흡사 가상의 매트릭스의 세계에서처럼 만들어진 이 세계의 서사적 맵 구조에서 과연 나는 무엇으로 정의되는 것이 역할로써 규정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이게 곧 자신의 자아와 세계관의 서사가 아닌가 싶다. 오늘을 사는 모든 자들의 게이밍 세계에서 각각의 규정된 시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은 무슨 캐릭터이며 어떤 레벨로 시간을 달리고 있을까?
산다는 것이 마치 게임 속에서의 가공된 체제와 닮았다. 그래서일까. 현실은 게임의 반영이고 게임은 현실의 투영이다. 여기에 시대의 문명과 문화가 결합된 이야기가 결합된다. 따라서 문학이란 이 서사의 골격이나 다름없다. 게임의 뼈는 서사이고 이야기이다. 어떤 스토리로 세계관을 규정할 것인지 마치 우리가 소속한 이 현실의 게이밍 룰인 것처럼 우린 게임하듯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