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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4월
평점 :
벨 자 : 진공 함 또는 시험 용기로 사용되는 아래쪽은 열려 있고 위쪽은 밀폐되어 있는 종모양의 용기.
“일 년의 하루하루가 흰 상자들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고, 상자와 상자 사이에 검은 그림자 같은 잠이 있었다. 유독 내게는 상자와 상자 사이에 놓인 긴 그림자가 갑자기 쑥 빠져서, 하루하루가 끝없이 쓸쓸한 흰 대로처럼 내 앞에서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172쪽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담긴 소설이다.
모범생에 장학금과 상장 받는데 선수인 에스더의 이야기다. 그런 에스더의 글이 뽑혀 뉴욕으로 가게 된다. 화려하고 비싼 음식들과 다양한 모임과 만남, 그렇지만 이 곳에서도 에스더는 길을 잃는다. 아니 에스더가 하고자 하는 건, 꿈꾸는 것은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다.
엄마는 에스더에게 실용성을 강조한다. 속기를 배워놓길 바라며, 의대생인 버디와 짝을 이뤄 그렇고 그런, 그러나 엄마나 세상의 눈에는 평범하고 올바르게 보이는 그 길을 가길 바란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듯, 에스더에겐 그런 삶이 어떻겠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여자라면 당연히 아이를 좋아하고 낳아야 하는건가, 나는 아이가 싫은데.
나를 야한 여자인척 몰아붙이던 버디가 오히려 순결하지 않은걸, 그럼에도 왜 당당한걸까.
선택지가 없으니, 에스더는 자신이 길을 만들어야 한다. 자살이란 선택지를 만들었고 시도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
다들 그냥 넘어가는 일인데 뭘 그렇게 신경을 쓰니
원래 그런거야.
너 정도면 괜찮은거 아냐?
배부른 소리하네.
뭐? 네가 감히?
이젠 네가 누구한테 시집갈지 걱정이다, 에스더. 이런 곳에 있었으니.>
언제 또 다시 에스더에게 벨자가 내려와, 그녀를 가둘지 모른다. 그 곳은 잠들 수 없으며, 세상의 부조리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에스더가 느끼는 부조리와 외로움과 두려움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속에 떠오른 대화는 늘 버디와 실제로 나눈 대화로 시작됐다. 다만 상상 속의 대화는 내가 앉아서 "그렇겠네"라고맞장구치는 대신 톡 쏘는 걸로 끝났다. 이제 침대에 누워서 나는 버디가 이런 말을 하는 상상을했다. "시가 뭔지 알아, 에스더?" "아니, 뭔데?" 내가 묻겠지. "먼지." 그가 미소 지으면서 으스대는 표정을 짓기 시작하면, 나는말하리라. "네가 해부하는 시체도 마찬가지야. 네가 치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들도 다 먼지에 불과하다고, 훌륭한시는 그런 사람들 백 명을 모아놓은 것보다도 훨씬 오래 남지."
순결을 지키다가 순결한 남자랑 결혼하는 게 좋을지 몰라도, 결혼 후에 갑자기 남자가 버드 윌러드처럼 순결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면 어떨까? 여자는 순결한 삶만 살아야 하는데남자는 순결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 두 가지를 산다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순교자같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꾸나." 나쁜 꿈. 벨 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 해부용 시신, 도린, 무화과 이야기, 마르코의 다이아몬드, 광장에서 만난 해병, 닥터 고든 병원의 사시 간호사, 깨진 체온계, 두 종류의 콩 요리를 가져다준 흑인, 인슐린 투약으로 9킬로그램이 늘어버린 체중, 하늘과 바다 사이에 회색 두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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