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에키 유조, 세키네 소지, 아이미쓰


읽으면 읽을수록 생소한 화가들과의 만남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서경식님의 책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않았을 화가들이다. 그러고보니, 일본 미술을 소개한 책은 처음이고, 미술에 관한 책에서도 일본 우키요에 아니고서는 접할 일이 없었다. 얼마나 서양미술에 치우쳐져 있었는지 실감이 난다. 


특히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근대미술은 우리가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시점이라 일본 미술을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 화가들의 그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수혜로 파리등으로 가서 서양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우리 화가들은 일본을 통해서 서양미술을 맛보고 있었다. 

파리에서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사에키 유조의 작품은 아무런 정보없이 보면 일본화가의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림들이었다. 전쟁화를 주로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화가들에 비하면 정말 순수하게 그림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해야할듯하다. 예술은 시대를 담는다고 했지만, 순수하게 그림을 즐길 수 있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모티프, 예컨대 파리의 광고판이나 벽에 온통 마음을 사로잡혔던, 말 그대로 그림에 '미친'자였다. p73


아이미쓰의 그림을 다룬 장에서는 1989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쇼와 시대의 미술>전시에 등장한 전쟁화의 공개에 대한 글이 있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어서 질지만 인용해둔다. 


그때까지 전쟁화가 본격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전쟁 피해자인 아시아 여러 민족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전후 가까스로 제어돠어 온 우파와 국가주의자가 전쟁기록화의 '해금'을 하나의 신호로 여겨 다시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평화국가'를 자임해 온 전후 일본의 미술계. 교육계, 매스컴 등이 전쟁 프로파간다 회화가 왕성히 제작된 꺼림칙한 과거를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의식도 가로놓여 있지는 않았을까? 당사자인 미술가 중에서도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연합국에게 전범으로 추궁받을까 걱정하며 침묵했다.(후지타 쓰구하루는 대표적인 예외로 하더라도) 자신의 전쟁화 제작 이력에 대해 입을 다물거나, 군부의 압력 속에 어쩔 수 없이 그렸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을 늘어놓는 사례도 많았다. 한마디로 전쟁기록화는 "없었던 일"로 치고 숨겨 두고 싶은 역사 자료였던 셈이다. 하지만 1989년 당시 덴노 히로히토가 죽자 '쇼와'라는 연호로 묶였던 시다(1926~1989)의 종언과 발맞춰 "온전히 미술적인 관점에서 ("정치적 관점이 아닌 "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으리라)"라고 신경질적이라 할 정도의 이유를 붙여가며 전쟁화의 대표작 일곱점을 공개했다. 봉인보다는 공개가 바람직하다는 점에는 나 역시 이견이 없지만, 염려했던대로 '정치적 이유'로 봉인해 온 미술의 '명작'이 드디어 해금되었다고 파악하는, 참으로 '이데올로기적'반응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반응을 "미술적 관점에서" 작가나 작품을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p112


일본인이 쓴 일본 그림에 관한 글이었다면 내가 관심을 가졌을까?  재일조선인으로서 보는 것은 아마도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본 근대미술에 대한 글은 생소하지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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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작가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가 생일 선물로 보내준 책이다. 

작가님 책 코너에 모셔두고 있다가 읽기 시작했다. 

최근에 읽은 <어둠에 새기는 빛>에서 이 책에 있는 작품들이 언급되기도 하고, 

인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지금이다'라는 맘이 들었다. 

책의 부제는 '일본 근대미술의 이단자들'이다.

나카무라 쓰네, 사에키 유조, 세키네 쇼지, 아이미쓰, 오기와라 로쿠잔,노다 히데오, 마쓰모토 슌스케

1920년대부터 1945년까지 짧은 시기 동안만 활동했던 일본 근대미술 화가 7명을 다루고 있다. 

익숙한 이름은 한 명도 없었다. 서경식 작가님이 아니었다면 이 이름을 들어볼 기회나 있었을까?

일본 미술이라고 하면 서양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우키요에, 

그리고 우키요에 화가인 가츠시카 호쿠사이,히시카와 모로노부, 우타가와 히로시게 정도의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일본 미술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같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있을 당시의 그림들이라 궁금하기도 하면서 

이유없이 반감이 드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는데, 읽은 후에는 어떤 생각이 들게 될지 모르겠다. 


'일본'을 진정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에 침식당했고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미의식'의 수준으로까지 파고들어가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자기 이해, 진정한 정신적 독립을 위해서 필요한 태도다. 내가 일본미술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는 '패배주의'도 , '식민지 근대화론'도 아니며,'일본 찬미'는 더더욱 아니다.-p7


죽음을 들고 평온한 남자-나카무라 쓰네(1887~1924), <두개골을 든 자화상>


작년에 다녀왔던 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갔어야 했는데.

중학교 2학년때 처음 본 이후 20대, 50대에 다시 만나면서 달라졌던 그림의 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은 이렇게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존재인가.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그런 생각, 굳이 말하자면 화가를 향한 어떤 '친밀감'같은 기분이 뒤섞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초상화(책에는 그가 그린 초상화 7점이 수록되어있다) 를 가만히 들여다보니,작품에 시대를 담았다기보다는 단지 인간만을 들여다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것은 본인의 삶은 짧고 외로웠는데 그림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미술평론가 하라다 히카루는 이 자화상을 두고 "화가라는 본분에 철저했던 나머지 종교인으로 승화한 모습"이라고 쓰기도 했다.-p38~39


종교인으로 승화까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초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근대 미술을 다루면서 시대를 담은 것은 아닌듯한 나카무라 쓰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위에 인용한 글을 두고 작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나도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정말 이대로 정화되고 승천해도 좋은걸까? 어째서 조금 더 미칠 듯 격노하지 못햇는가?"라는, 이 그림을 마주한 젊은 날에 느꼈던 갑갑증도 여전히 남아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 감정은 내가 '일본 근대미술'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일본의 '근대' 그 자체가 가진 성격과도 관련된 수수께끼이기도 하다.-p39



따라가다보면 작가가 일본의 근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게 될것같은 기분이 든다.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일본에 있어 제1차 세계대전은 지배층이 막대한 부를 축적함으로써 국립서양미술관이나 오하라 미술관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자유와 민주의 기운이 피어오르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 1923년 간토 대지진 확살사건, 1925년 '치안유지법'등 <어둠에 새기는 빛>에서 알게된 내용들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나카무라 쓰네<두개골을 든 자화상>, 1923년, 오하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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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 그린 사람이 누구일까 맞춰보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에곤 실레의 풍경화를 보고도 의외라고 생각했었는데.

에곤 실레가 이런 꽃 그림도 그렸었구나.

화가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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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라는 말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미술책을 읽다보면 정말 많이 만나긴 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최근 읽은 책 두 권에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진실은 뭘까?

난 왜 이것이 궁금한걸까? 

















모네는 고향 르아브르 해안에서 바닷가에 떠 있는 배, 멀리 보이는 항구를 비롯해 그 어떤 것도 형체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그저 붉은 하늘과 물에 비친 잔영들의 '인상'을 빠른 붓놀림으로 그렸습니다.그런데 전시회를 찾은 예술평론가 르루아는 모네의 그림을 가리켜 "마치 총에 물감을 넣고 쏜 것처럼 그리다 만 그림을 봤다. 화가는 해가 뜨는 장면을 그렸다지만, 본질에서 벗어나 짧은 순간의 인상만을 그린 것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네는 '짧은 순간의 인상을 그렸다'는 르루아의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의 제목인 '해돋이'에 '인상(impression)'이란 단어를 붙여 넣었지요. 그러면서 "인상을 그린다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은 햇빛의 시간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인상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네의 말은 그대로 전시회를 연 화가들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인상파'기 태동한 것이지요.-p385~386


















이 전시회는 총 165점의 작품을 선보였고 모네의 1872년 작품 [인상: 해돋이]가 포함되었다. 이 작품은 배와 굴착기, 공장의 회색 실루엣 뒤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스케치한 작품으로 빛이 아래쪽 물과 위쪽의 하늘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작품 제목에 주목하여 이 단체를 인상파라고 불렀다. 이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단지 인상, 즉 무언가를 살짝 본 듯한 느낌, 스케치만 했다는 뜻이었다. 면밀하게 계획된 구도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쥘 카스타냐리 같은 다른 비평가들은 조금 더 관대했다. '풍경이 아니라 풍경이 만든 감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들은 인상주의자라 하겠다'라고 그는 썼다. '인상파'라는 이름은 고착되었고 1877년 세 번째 전시회가 열릴 무렵에는 예술가들 스스로 이 명칭을 받아들였다. -p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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