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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이책은 march님이 읽으셔야하는 책인데요.'라는 친구의 톡을 받았다. 제목을 보는 순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은 배우였고, 이름은 이마치였다. 마치는 3월에 태어났다고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사실은 12월에 태어났는데 죽을지도 모르니 더 두고보자고 한 아이가 3월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블로그를 개설하려고 했을 때 닉네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생일이 3월에 있으니 march로 하자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지었는데, 20년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니 이 책은 당연히 읽어야지.
3월,march. 경쾌한 내용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시간, 기억, 망각,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알츠하이머를 앓게 된 이마치는 배우 생활을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VR을 이용한 기억 재생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까? 잊어가는 부분들을 채워나감으로써 알츠하이머를 늦추는 치료법이라고 해야할 것같다. 인간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한 일도 있지만,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저 밑 바닥에 묻어놓고 꺼내보고 싶지 않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게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어머니의 학대,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 남편과의 불화, 딸과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화려해 보이는 배우의 삶 이면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배우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개인사는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를 현재에 두고 과거의 자신을 대면해가는 과정을 아파트로 표현해나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40층의 문이 열리면 40살의 나를, 7층의 문이 열리면 7살의 나를 만나는 설정. 이를 통해 우리는 이마치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이마치는 잊고 있었던 또는 왜곡되어 있었던 과거의 자신을 만났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정말 그때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내 편한대로 포장을 하고 넘어가 버렸던 기억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마치는 치료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래 전 자신을 만나면서 인간 이마치의 빈틈을 메워나가고 있었다. 잊어가는 과거를 붙들어 두려는 VR치료. 실현 가능한 이야기라면 어떤 선택이 현명할까?
VR치료 직후 자해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경우는 흔했다. 치료가 트라우마를 유발시키느냐고 묻는다면 이마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 좋은 기억만 남길 수 없으며, 무작위로 차오르는 기억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매번 새롭게 아귀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VR치료를 중단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는 없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잊어버리는 쪽과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쪽. 어느 쪽이나 지옥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지옥을 선택했다. -p239
이마치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책의 마지막 장은 서늘한 아픔, 이별의 방식, 존재의 가벼움, 마음의 평화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이었다. 한 편의 시와 같은 서정적인 글은 이 소설을 자꾸 자꾸 곱씹어보게 만들었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신체의 노화와는 달리 열심히 달려왔던 인생 전체를 도둑맞는 것일 듯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옆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가슴 시리게 다가왔던 소설이었다.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이 쿠팡 플레이 시리즈 <안나>로 드라마 되었었다고 한다. 인간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가볍지 않은 드라마였기에 기억에 남아있는데, 원작자가 정한아 작가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정한아 작가의 책, 계속 찾아 읽게 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