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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고독한 날 - 정수윤 번역가의 시로 쓰는 산문
정수윤 지음 / 정은문고 / 2020년 10월
평점 :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하이쿠,와카를 내가 접할 기회가 있기나 했을까? '와카란 일본 고유의 시를 말한다. 일본을 뜻하는 와 (和)에 노래를 뜻하는 카 (歌)를 쓴다. (중략) 음수율은 부드럽게 암송하기 쉬운 5.7.5.7.7자를 기본으로 한다. (중략) 17세기 들어 서른 한자도 길다 하요 7.7을 떼고 5.7.5만 남긴 것이 하이쿠다.'- (저자의 설명) . 국어 시간에도 이태백, 두보 등의 작품이나 우리 시조를 접하긴 했지만 일본의 하이쿠나 와카를 만났던 기억은 없다. 아마 역사적인 배경, 일본과의 관계도 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싶다. <정수윤 번역가의 시로 쓰는 산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은 일본 와카 한편에 저자 산문을 더한 형식이었다. 저자는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시작으로 일본의 다양한 명작들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이며,장편동화를 쓰기도 한 작가이다. 일본어 공부를 했기에, 일본 문화에 관심이 생겼기에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어와 상관없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와카는 우리 나라의 시조를 읽는듯했다. 짧은 글에 함축된 내용이 상당한 임팩트를 주었다.
나이 탓일까? 남편에게 보여주고는 함께 웃은 와카가 있었다.
늙음이란 게 찾아올 줄 알았다면 문을 잠그고
없다고 대답하며 만나지도 말것을 -p166
저자는 엄마의 환갑을 맞아 함께 여행했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난 건강이 좋지 못한 엄마가 생각났고, 내 나이를 떠올렸다. 칠순을 앞둔 엄마와의 자동차 여행을 계획하려하는 저자를 보며 부러웠다. 함께 긴 여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오래 오래 내 곁에 있어주시기만 하면 좋겠다. 없다고 대답하면 순순히 물러가 줄 늙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최대한 문고리 잡고 버텨보자. 운동하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면서.
달콤하고 절절한 사랑을 담은 와카가 특히 많았다. 그 중 한편을 보면,
그대 위하여 봄 들판으로 나가 어린 순 뜯네
나의 옷소매에는 눈 송이 흩날리고 -p170
그해 첫 새순을 먹으면 한 해 동안 병치레 없이 건강히 지낼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던 때, 남자가 정성스레 딴 어린 순과 함께 이 와카를 선물했다고 한다. 저자는 서울과 도쿄 원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 남자친구가 자신을 위해 방 곳곳에 숨겨둔 열 장의 편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이 에피소드를 읽다보니 고3 딸과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고1 아들의 학교로 편지를 보냈던 기억이 났다. 말로 전하는 것도 좋지만 꾹꾹 눌러 쓴 글이 전하는 의미도 크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끔 그 편지를 함께 읽으며 그 날을 떠올리곤 한다.
누군가를 위해 눈 내리는 들판에 쪼그려 앉아 풀을 뜯는 사람, 누군가를 위해 방 구석구석에 편지를 숨겨두는 사람. 그런 작고 소소한 정성으로 우리는 산다. 즐겁게 산다. 일상이 빡빡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약간의 정성, 약간의 시구를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고싶다. - p172
당연히 일본 문학을 많이 접하니, 일본 문학에 대한 글이 자주 등장을 했는데,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도 큰 재미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으면서 줄거리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문장들이 아름다웠다는 느낌은 남아있다. 그 느낌만으로 애정하는 작가가 되었는데,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읊은 와카를 소개하고 있었다. 와카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두었지만, 그 보다도 이 문장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구름을 나와 나를 따라나서는 겨울밤의 달
바람이 저미느냐 눈이 차디차느냐 - p234
사물이 모두 다르게 보여도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완전히 융합되고 뒤섞여 있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자연도 인간도 국가도 인종도 정치 색깔도 서로 다른 조각의 퍼즐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이어진 형상 속에서 우리는 산다.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다들 모르는 것처럼 사는 것 같아서. -p236
덧붙여진 저자의 글은 요즘 세계의 움직임을 보면서 더 맘에 와 닿았다.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은 있었지만, 세계는 안정되어 있고, 평화롭다고 생각했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끝날 줄을 모르고, 중동 사태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 정치가들은 민생에 관심이라도 있기나 한 건지.
하여가, 단심가등 우리의 시조도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지만 빠져들 수 있듯이 와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는 소개한 와카의 배경(일본인들의 역사, 문화,풍류등) 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기에 와카가 전하는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와카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보다도 솔직 담백한 저자의 글이 더 좋았다. 일본어 원서를 읽으면서 번역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번역가가 되게 된 계기, 번역가로서 만났던 사람들, 번역가로 사는 삶 등에 대한 글을 특히 재밌게 읽었다. 오랜 세월을 아우르는 와카 65 편에는 현대를 사는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정성껏 골라낸 와카와 어우러진 진솔한 저자의 산문과 함께 한 시간은 더운 여름 날에 청량감을 더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