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있는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끝과 시작>을 꺼내서 아무페이지나 읽고 다시 꽂아두는 일을, 나는 무한히 사랑한다.-p53


시집을 읽기에 이런 방법도 괜찮겠다싶었다. 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시집을 구입하는 일은 거위 없고,아주 가끔 읽을 뿐이다. 시 한 편을 읽으면 뭔가를 꼭 얻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마음 가는대로 편하게 읽으면 되는 것을.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마음도 내려놓으면 좀 더 편하게 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싶다.


비스와바 쉽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묵직하게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책을 꺼내들고는 무작정 펼쳤다. 그렇게 만나게 된 시가 '중세 시대 세밀화'였다.


















중세 시대 세밀화


가장 푸르른 언덕을 향해,

가장 보드라운 비단 안장으로 장식된,

가장 멋진 말들이 끄는 행렬이 막 시작되었다.


일곱 개의 탑이 솟아 있는 성 (城)으로 향하는 중.

모든 탑이 최고로 놓아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선두에는 공작(公爵)이 앞장선다.

가장 심한 아부를 덧붙이자면 ,그는 절대로 뚱뚱하지 않음,

공작의 옆에는 공작 부인.

기막히게 젊고 매력적임.


공작 내외 뒤에는 몇 명의 하녀들,

마치 그림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어여쁘기 그지없음.

그 뒤로는 모든 하인들 중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어린 급사,

급사의 어깨 위에는

원숭이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큰 동물,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주둥이와 꼬리를 가진 생명체.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세 명의 기사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중하면서도 경쟁적으로.

그들 중 누군가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

나머지는 재빨리 더욱더 위압적인 표정으로 맞선다.

그들 중 누군가가 적갈색의 준마를 타고 가면

다른 누군가는 더욱 진한 적갈색의 준마에 성큼 올라탄다.

열두 개의 말발굽이

길가에서 가장 흔한 데이지 꽃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슬픔에 지치고, 고통에 인상을 찡그린 사람들,

팔꿈치에 구멍이 나고,눈이 사팔뜨기인 사람들,

여기서 가장 눈에 띄게 부재중인 건 그들이다.


가장 새파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부르주아와 농민들의 

가장 절박한 사안들도 부재중.


교수형에 처해도 시원치 않을

가장 독수리다운 눈빛도 부재중이기에 

아무런 의혹의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가장 유쾌하게 걸음을 옮긴다,

여기, 가장 봉건적인 리얼리즘 속에서.


화가는 최선을 다해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지옥은 이미 두번째 그림 속에서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마쳤으니.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가장 조용한 말조차 필요 없을 만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p237~239)



중세의 모습이기만 할까?

아첨하기 좋아하는 이들과 뭔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옆에 둔채,

정말 소중한 것, 정말 신경써야 할 부분에는 눈을 감은 권력자들은 얼마나 많은지.

진정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걸까?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 보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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