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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인의 키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려 600여 편이 중단편 소설을 썼다고 하는 체호프. 그 중에서 내가 읽은 소설은 40여 편 정도가 된다. 공통된 느낌은 어느 하나 가벼운 소설이 없다는 것. 어느 작가든 가볍게 쓰려고 하겠냐마는 길이에 상관없이 묵직한 울림이 느껴진다. 그래서, 체호프의 작품을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낯선 여인의 키스>와 <6호실>은 읽은 기억이 있었다. 다 읽은 후에 가지고 있는 책들을 찾아보니 <농담>과 <검은 수사>도 읽었던 작품이었다. 이런! 이래서 재독이 필요한거야. 각 작품들에 대해 간단한 감상을 남겨두려한다.
농담 : 실컷 타인의 마음을 혼란에 빠트리거나 기분 상하게 하고서는 농담이었어라고 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농담 속에도 진심이 어느 정도는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소설 속 남자에게는 진심이 있었을까? 왜 그런 말을 했는 지도 모르는 남자가 있고, 확신은 없지만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의 말을 가장 행복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는 여자가 있다. 이런 농담은 선한 농담이라고 해야할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가 정사를 나누고 각자의 가정을 돌아갔다. 구로프는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자들처럼 그녀도 기억 속에서 금방 사라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정은 더욱 더 강렬해졌다. 결국, 안나를 찾아가게 되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게 된 그들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다. 구로프는 가족이 있고 일이 있는 이 삶이 진실인지,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그 시간들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다른 사람도 모두 그럴거라고 합리화했다.
밤이 되면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듯이 인간은 누구나 진실된 인생, 가장 흥미로운 사람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비밀 덕분에 버틸 힘을 얻으며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지도 모른다.-p 49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합리화 하겨 했고, 어떻게 하면 함께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이야기헸다. 체호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햇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사랑이 끝나려면 한참 먼 길을 가야하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고. 체호프의 영향을 받아 썼다는 작가 부닌의 '일사병'이란 소설을 보면 하룻밤만 보내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후 방황하는 남자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는데, 체호프는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더 큰 숙지를 안겨줬다. 그들이 사랑이라고 믿는 이 불륜의 끝을 체호프는 어떻게 결말을 내고 싶은 걸까?
진창 :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제목을 붙였을까? 사촌 형제가 한 여자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가관이다.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팜므파탈같은 여자가 결혼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나는 사람들이 왜들 그렇게 결혼하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삶은 너무 짧고 자유도 적은데 거기에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구속까지 하려 드니 말이에요."
귀여운 여인 :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여자.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는 빛났고, 호감을 주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관심을 가질 존재가 없을 때는 피폐해졌다.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 누군가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건 이제 그녀가 그 어떤 일을 해도 아무런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물들을 보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했지만, 자기의 의견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랐다. 자기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가! -p102
검은 수사 : 코브린은 시골에서 보내라는 조언을 듣고 과거 후견인이자 스승 페소츠키의 집에 갔다. 페소츠키는 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을 가꾸고 있었다.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딸 타냐와은 좋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타냐에게 '검은 수사'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는데, 검은 수사가 코브린 앞에 나타났다. 사실 검은 수사는 코브린에게만 나타나는 환영이었고, 코브린은 학문을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페소츠키가 정원을 가꾸는 사람으로 나왔던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자연의 영향을 받고, 끊임없이 정성을 쏟아야하는 눈에 보이는 목표를 추구하며 현실을 사는 사람으로, 코브린과는 어느 정도 상반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환각을 보고 진리에 매몰된 코브린도, 페소츠키도 모두 불행해졌다. 진리를 추구하는 코브린에게 검은 수사를 보낸 안톤체호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어려운 소설이었다.
낯선 여인의 키스 : 야영지에 도착한 장교들은 그 곳 지주 폰 라베크 중장으로부터 초대를 받아서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 당구 치는 사람들 속에서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고 있던 랴보비치는 어두컴컴한 벙에 들어섰다가 한 여인으로부터 키스를 받게 되었다. 여자는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놀라서 도망가버렸고, 랴보비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에 있는 여자들 중에서 과연 키스를 한 여자는 누구일까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 그를 다정하게 대했고 행복하게 해주었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어리석지만 특별한, 굉장히 기쁘고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 그는 꿈속에서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p183
반복된 일상에서 낯선 여인의 키스는 행복한 상상 속에 빠져들게 했지만,어느 순간 현실을 돌아와 자신의 삶은 초라하고, 보잘것 없으며, 무료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상 속에서 그는 활력을 얻었고, 행복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6호실 : 의사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있는 6호실이라는 정신병원엘 자주 찾아간다. 그곳에 감금되어 있는 환자 중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하지만, 6호실을 찾아가는 이 일은 그를 이 병동에 감금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상인 사람이 정신병자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저런 일은 현재 어떤 공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라 무서운 이야기였다.
신부 :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쟈는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 친척 오빠인 사샤는 그녀에게 공부하러 떠나라고 말했다. 결국, 나쟈는 사샤의 말대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데......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서 공부하는 거야.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고.너의 삶을 뒤집으면 모든 것이 변할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거지. 그럼,우린 내일 함께 떠나는 건가?" -p313
정작 타인의 인생을 바꾸려 했던 사샤는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죽고 말았고, 나쟈가 제 삶을 살고 싶다고 소리쳤지만 무책임하게 보였던 것은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쟈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림이든,음악이든, 문학이든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이 나오게 마련이다. 작가는 분명 독자에게 전하는 바가 있었겠지만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꼭 작가의 의도대로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친구는 오독도 읽기의 재미라고 했다.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고, 세상사에 관심을 가져보는 시간. 문학 읽기는 그런 선물을 나에게 안겨준다.
삶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진리는 깨닫는 것이 복일까? 독일까?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는 무엇일까? 체호프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면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이유는 그들이 이러한 질문 속에서 고뇌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표면적 의미와 수수께끼 같은 작품의 주제는 서로 티격태격하며 독자들의 머릿 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그려 넣는다.p 330 (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렇다. 책장은 덮었지만 나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삶의 순간 순간 그런 질문들을 다시 떠올리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