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 P36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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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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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뒷표지)
우리는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며 다시 배워야 한다. 행복과 위로, 애도와 회복, 정상성과 결함, 실수와 기회, 자유로움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나아가도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무엇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따뜻하고 찬란한 소설을 만났다. 고맙고 벅차다.
-최진영(소설가)

✏️
이토록 똑부러진 평이 또 있을까? 소설가 최진영의 평은 달리 덧붙일 만한 군더더기도 없을, 그 이상의 찬사마저도 존재치 않을 만큼 공감되는 소감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공감능력이 미흡하여 벅찬감까지 표출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고맙고 벅차다‘는 최진영의 마지막 표현은 그 어떤 표현보다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누구든 꼭 한번은 읽어보시길, 그래서 가슴 따뜻한 작가 천선란의 이야기에 감동을 느껴보시길 적극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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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쪽
소방관이 놓지 않았던 보경의 (생존율) 3%에는 실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 113쪽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다.

📖 168쪽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 252쪽
˝그래도 우리가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상상보다 늘 나을 거예요.˝

📖 331쪽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오직 연재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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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천선란 작가의 세상을 보는 눈이 끌리고 마음에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전히 희망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극히 고통스럽지도 않다. 언제나 희망은 존재하지만 언제나 희망적이지는 않고, 언제나 고통은 존재하지만 언제나 고통스럽지도 않다. 희망 앞에서 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고통 앞에서 늘 희망이 좌절되는 것도 아닌 것이 오늘이라는 삶이다.

희망과 고통 사이에서 방황하기 보다는 매 지금이라는 순간을 사랑하고 열정을 놓지 않은 채 살아가는 힘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하는 게 삶이고 우리라는 사람이지 않을까.

가슴 뛰는 삶, 우리는 그런 삶을 얼마나 잊고,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 301쪽
떨린다. 행복에 휩싸인 연재의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연재는 살아 있었다. 늘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무엇이 연재를 이토록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일까.


알베르 까뮈가 그랬다.
살아지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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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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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딜리터》는 강치우라는 주인공이 책점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형사 오재도와 심문과정이 진행됨으로써 이 작품이 어느 한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될 것을 예고한다.

그 사건은 소하윤이라는 여성의 실종사건이다.

‘소하윤 실종사건‘은 작품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메인 줄기이다. 그리고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작품의 전체내용이 된다. 소하윤의 실종사건과 연계되는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다양한 인물관계가 설키면서 이야기는 소하윤을 진득하게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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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의 《딜리터》는 판타지 소설임을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뭐랄까,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약하다‘ 또는 ‘가볍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작품에서 판타지적 요소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 107쪽
현실의 물건을 다른 레이어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을 ‘딜리터‘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나는 딜리터라는 능력과 존재이다. 물건을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심지어 사람까지도 옮길 수 있는 능력과 그 능력을 가진 ‘딜리터‘라는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레이어‘로 설명되는 현실과 다른 차원의 존재이다.

이 두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판타지적 요소는 없다. 그런데 작품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설명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독자를 그 세계에 젖어들게 하기 보다는 이해를 시키려는 배려(?)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게는 하지만 상상의 의지를 한풀 꺾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라고 할까. 그러다보니 긴박감이랄까, 짜릿함이랄까... 그런 극적 순간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판타지로써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이라든가, 기괴함이라든가, 신비함이라든가... 뭔가 상상력을 심각하게 자극하는 힘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오히려 작품은 기시감이 강해서 판타지적 요소가 의외로 있을 법한 이야기의 성격으로 치환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현실적인 색채가 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덕분에 작품은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나온다.

개인적으로는 《딜리터》를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적 성격을 배제한 채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김중혁 작가에 대한 독자적 호감이 아직 자리잡지 않은 상태라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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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의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는 작품 내용에 대한 문학적 또는 정서적 접근이나 작가적 관심의 접근보다는 ‘판타지 소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읽은 보람을 느낀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어중간하고 막연한 ‘판타지 소설‘이라는 개념을 이번 독서를 통해 폭넓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큰 소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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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 소설‘을 사전적으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소설.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출처: 다음백과사전)

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탓에 판타지라고 하면 뭔가 굉장한 상상력을 자극 받을 것만 같은 기대에 차게 되는 선입견이 없지 않다.

판타지의 사전적 정의처럼, 개인적 선입견을 옹호해준 작품이 바로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었다. 1편을 작품의 거대한 세계관에 묶여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흠뻑 빠져들었는데, 아쉽게도 2편으로 이어가질 못했다.

그건 그렇더라도 문학에서는 판타지가 문학의 보편적 특성 중 하나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고도 한다. 장르가 아닌 지칭 용어라는 사실. 그 보편적 특성은 ‘상상력이 작용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라는 것인데, 그래서 상상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상상력만을 놓고 보면, 《딜리터》에서 현실과 다른 차원으로 설정한 ‘레이어‘가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신선하다랄 수 있다. 컴퓨터 화면 상에서만 존재하는 프로그램을 하나의 가상 세계로 인간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치환한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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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힌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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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단편전집) 카프카 전집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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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책들이 있다.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들. 까뮈의 《이방인》이 그랬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그랬으며, 나의 최애 중의 하나인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마저도 그랬다. 이 뿐만 아니다. 책장에 고이 꽂혀 있는 책들 중에는 그런 책이 한둘이 아니다.

귀에 딱지가 일만큼 너무 자주 들은 탓에 책 내용을 술술 이야기할 정도가 되다보니 그래서 읽었다 착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하도 많이 회자되다보니 사람들 속에서 나의 무식함을 감추기 위해 귀동냥으로 들었거나 짤막하게 알고 있는 정보들을 주절거리다가 결국에 책을 읽은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살면서 이런 경우들을 종종 접하다 보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게 된다. 카프카의 《변신》이 내게는 그런 생활 속의 한 예가 된 셈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렇게 읽지도 않은 것이 읽은 것으로 ‘변화‘되는 오류는 독서의 절대적 필요성 보다는 정보의 단순편의적 검색성에 더 치중하는 꼴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 카프카의 《변신》을 읽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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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의 《변신》은 1915년에 발표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이야기다. 하지만 《변신》은 100년 이상의 물리적 거리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동시대성의 힘이 강렬하다. 오늘은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라해도 거부감 내지 저항력이 없을 정도다. 이것이 고전의 힘일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동시대적 감화능력.

📖 109쪽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는 것으로 채워가길 바라는 마음에 요약만 하자면,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라는 직접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후 한 가족이 잠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라 할 것이다.

📖 149쪽
그레고르에게 한 달 이상이나 고통을 주었던 심한 상처는-아무도 사과를 빼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과는 눈에 보이는 기념품처럼 살 속에 박혀 있었다- 그레고르의 현재 모습이 비참하고 역겹게 보일지라도 그 역시 한 식구이니 원수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고 증오심을 억누르고 참고 또 참는 것만이 가족이 지킬 의무의 계명이라는 것을 아버지에게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족 구성원 하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원수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참고 또 참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그러질 못한다.

📖 161쪽
˝저것이 두 분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할 거예요. 저에겐 그렇게 되는 게 뻔히 보여요. 우리는 전부 힘들여 일을 해야만 하는데, 집에 저런 끝없는 두통거리를 감당할 수는 없어요. 더 이상 그럴 수 없어요.˝

그레고르가 소중하게 여기던 여동생 크레테마저 그레고르를 향해 ˝없어져야 해요.˝라는 충격적인 외침까지 쏟아내는 변화의 과정에는 자본주의 논리도 개입한다. 그레고르가 해충으로 변한 일보다 더 끔찍한 것은 당장에 먹고 사는 일, 생존의 위기에 있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라는 인식은 이 작품이 던지는 극한의 우울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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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간을 해충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이 작가적 상상력은 오늘날 ‘카프카적‘이라는 멋진 상용구를 지적 사치로 남발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카프카적 상황. 이 말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서도 언급긴 하는데, 뭐 그건 그렇다치고라도, 만일 눈을 떠보니 해충이 되었다... 만일 내가 그런 상황에 봉착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라면 당장에 죽고 싶겠지... 그래서 죽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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