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된 어느 흑인 사형수 -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의 한 무고한 사형수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자비스 제이 마스터스 지음, 권혜림 옮김 / 불광출판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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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를 담았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목이 말하고 있는 느낌으로 책을 판단하기엔 

스토리 중반을 넘어가도 그런 내용이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계속 읽었다 그냥.

자비스 스스로 말하는 인생 경로를 따라가며.


마지막 장을 덮게 됐을 때까지

크게 불교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없어도,

불교적인 색채는 분명 느낄 수 있었고

왜 오프라 윈프리가 극구 추천했는지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라면 주인공 자비스가

스스로 평가해보며 돌아보는 자신의 인생이야기에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상대를 침묵하게 만든다, 삶이 준 슬픔이니까.


마약상이라기 보다는, 마약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간을 빌려주는 식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자비스의 친엄마와 그의 양부는

항상 자신의 아이들을 홀로 내버려 뒀다.

어린 자비스는 그럼에서 그 안에서 신이 나 있다.

인사불성이 되어가는 중독자들뿐인 어른들 모습과는 별개로

여기저기 집안에서 몰려다니며 놀거나 

군것질 할 걸 사러 몰래 창문밖을 넘다드는 등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동심 속에 희희덕 거리기 바빴으니까.

때로는 캐리어 가방을 작은 방삼아 

들어가 노는 장난도 해 보면서.


하지만, 자비스의 실상은 

사회복지사 역할을 하는 인물들에 의해

발견 아닌 구조가 된 이후 다른 묘사로 입혀진다.


몇일 먹지 못할 때도 있던 그 집 아이들,

그걸 아는지 이웃 할머니가 가끔 놓고가는 음식을 먹거나

마약중독자들의 가끔 사온 도넛 등이 아이들의 유일한 주식.

그렇게 방치되어 진 아이들에게 부모랑 함께살던 집이란

깨끗이 씻겨줄 보호자도 음식을 챙겨주는 이 없는 환경이었다.

팡팡 뛰놀던 매트리스엔 그냥 거기에 대소변을 보며 지내도

아이들의 하루는 오늘도 내일도 같았던 그 시절.


아이들은 결국 부모와 격리되어 

뿔뿔이 위탁가정에 맡겨진다.


자비스는 이때를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로 회상하며,

처음 맡겨졌을 때 그 위탁가정의 노부부는 

당시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그건 자신이 

세상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생긴 긴장감 때문이라 떠올린다.

왜냐면,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라지 못했기에

나쁨만이 일상이었고 익숙했던 자신은,

잘해주는 누군가가 다가오더라도

어떤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거나

그걸 분별있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게 애초에 부족했으리라 설명했다.

필요한 자질을 교육받지도 못한

자신의 어린시절 탓이라고 지금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또다르게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그는,

부족함과 정서적 결핍 속에서 자랐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엇나가거나 실수 안했던 건 

본능적으로 순수한 내면을 계속 간직했기 때문이라 믿는다.


현재 사형수로 복역중인 그가

이렇게 자신을 묘사하는게 누군가에겐 뻔뻔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누군가를 죽인 적이 없이 

누명을 써서 사형수까지 됐음을 설명한다, 덤덤하게.

절대적으로 착하고 결백하게 살았다고 할 순 없지만

누군가를 죽인적 없고 

현재의 죄명으로  사형수가 될 만한 짓 또한 

저지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그다.


그렇다면, 왜 단순 범죄 수준이 아닌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다는 그가

사형수로써 판결을 받고 복역중일까?


그는 이 모든 원인엔

자신이 살면서 갈구했던 소속감과 동료의식, 

거기에 자포자기나 방관이 있었다고 느낀다.

같은 제소자들이 좋지않은 일을 꾸밀 때

본인이 주축이 되진 않았지만

일원으로써는 참여되길 거부하진 않았고,

반론을 제기하거나 막지도 않았던 건

원초적으로 내면에서 자신의 그들의

동료로 인식되길 갈구했기 때문이었으며,

결론적으로 자신은 무고하니 

상황이 어떻게 오해를 받고있던 간에

결백함은 자연스럽게 밝혀지리라 지켜본 건

일종에 자기 인생의 방관이라 평가했다.

상황의 흐름이 예상과 너무 달라지더라도

그냥 원래부터 노력해도 힘들기만 했던 지난 과거처럼

아니더라도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자포자기 식으로 지켜볼 뿐이었다는 것.


이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그가 쓴 본인의 인생을 읽어보면

어느정도 이해갈 변호일거라 생각되며,

굳이 동정받기 위해 지어냈다거나

뻔뻔스럽고 허황된 거짓말로 보이지 않을

그냥 믿어도 되는 주장이라 말하고 싶다.

그의 결백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까진 아니더라도.


그의 인생 중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지금 생활의 시초가 된거로 보이는

무리들과의 좋지 못한 어울림이나

끝나지 않은 교도소 생활 자체가 아니었다.


첫 위탁가정에서 두번째 위탁가정으로 맡겨지고

다시 소년 보호시설로 옮겨지던 그 시절이

어쩌면 그의 인생 중 

가장 슬펐고 수정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첫 집에서의 행복이 끝나야 했던데는

지병으로 인해 노부인이 더이상

위탁가정 일을 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그걸 어린 자비스에게 다 이해시키진 못했으나

느낌만으로 서로 사정은 이해하고 헤어진다.

그렇게 옮기게 된 다른 위탁가정의 생활은

그 전과는 180도 다른 분위기.

거기서 살 수 없다 느낀 저자는

당시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본다.

혼자 다시 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호소도 해보고

자신을 보호관찰 하던 감독자에게도 설명해 본다.

첫번째 맡아줬던 노부부에겐 상황을 이야기 해 본들

모든게 통하지 않았던 건, 두번째 위탁가정 부부가

철저하게 연기를 해가며 자신의 행실은 숨긴채

주변 모두를 설득하며 저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기 때문.

거기서 어린 자비스는 단순 좌절만이 아닌 

깊은 자포자기를 배운거 같았다.

거기에 더해지는 슬프며 웃긴 이야기는 

그 다음에 간 소년원에서 이어진다.

결국 2번째 집을 떠나 집단 소년시설로 옮겨졌을 때

자신의 이런 처지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니

거기서는 힘들게 진실을 믿어달라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그곳 아이들은 모두 

엇비슷하게 그런 상황을 겪었었기 때문.

되려, 사랑을 줬다는 첫 위탁가정의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힘들었다던 주인공.


이건 절망적인 아이러니였다.

고통은 공감하지만 행복은 공감될 수 없는 

공통된 경험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교도소에서 민간수사관의 권유로 

명상과 불교를 접한 건 이 책의 매우 적은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인성을 스스로 돌아보게 했고

교도소 담장 밖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은 

결국 명상과 불교 덕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자서전 같이 쓰인 이 책을 읽으며

결국엔 무얼 느끼며 끝나게 될지 궁금했다.


슬픈 공감 속 

삶의 궁극적 의미가 뭔지 돌아보게 될까?


행복? 극복? 가족?


잠깐 보청기를 맞추러

교도소 밖 민간병원에 왔다가

호송직원과 입씨름을 하게 된 그는,

밖에서 살아가는 요즘 민간인들이 

다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긴거 같은데

갇혀 사는 자신에겐 보이지만

일상이 된 호송관은 둔하게 못본다며

농담처럼 타박을 한다.


그 말에 상대방은 여러번 웃으며

몇년간 그가 교도소에 있었는지 헤아리려 보게 한다.

그러다 저들의 혼잣말이란 

자비스 시대엔 없던 무선 전화통화라고 이해시켜 준다.


그러다 자비스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게 무엇인지 다시금 느낀다.

그건, 잠시 교도소 담장 안에 들어왔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갈매기의 그 날개.

그게 자기 것이라 말해 보면서...


결국 깨달았지만

다시 가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

자비스에겐 그건 '자유'였다...

그 자유를 반납한 건 자신의 과오였지만

자신의 순수한 의지라고만 할 수 없었을 과거들.


깨달음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커 안타깝던 자비스의 인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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