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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이천우 지음 / 북다 / 2024년 1월
평점 :

소설의 껍질을 지녔으나
이 책은 저자의 실화를 모티브로 구성됐다.
실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던 어머니를 지켜보던
저자가 집에 들렸다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 5권을 읽게 된 후
느낀 바가 있어 쓰게 됐다는 이 소설.
저자 어머니의 평소 간병모습은
부모님이 젊었던 예전 시절부터
현재의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까지
하나의 띄처럼 연속성으로 다가오며,
원래 기획했던 스토리가 가진 방향을 틀어
부모님의 실제 스토리에 상상을 더해
이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전한다.
스토리 속 진태, 진수, 해민은 3남매다.
그들이 매우 의좋은 남매지간이라고
보이는 부분은 없다.
오히려 서로의 고통에도 무관심하고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거리감도 있던 사이.
매우 시니컬하게 세상을 보는 첫째 진태,
양심과 그 동반자 게으름이 천성이 된 착한 둘째 진수,
자신의 성정체성을 레즈비언이라 공헌하는 웹툰작가 막내 해민까지,
이들 3남매는 아버지의 장례식 바로 전
실연의 충격에 한강다리에서
투신시도를 하다 미수에 그쳐버린
진수를 진태가 부모님 집까지 데려오게 되면서
집에 있던 막내 해민까지 다 모이는 장면으로
셋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게
이들의 첫 3자 대면으로 등장한다.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아버지의 유품 중 아랑훼즈 협주곡을 틀어놓고
우연히 발견한 시바스리갈의 술기운에 빠져
3남매 모두 스르륵 잠에 빠져 들었다가,
납득 안되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정기간만 반복되는 시간 루프에 빠지고 만다.
2010년 8월 5일부터 2010년 8월 22일까지만 반복되는 세상 속으로.
이 짧은 순간의 반복동안
이들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꿈꾸거나 꾀하진 않는다.
그냥 믿기 힘든 사실에 혼란스러워 하고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괴로움을 반복한다.
중요한 변화도 일어나긴 하지만
결국 모두 비슷한 상황으로 끝나버리는 시간의 반복들.
그러다 셋은 생각한다.
이게 아버지가 만든 반복되는 세상일지 모른다는.
아버지가 겪은 무던히도 힘들었던
20대 시절 속 고통을 들여다 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해병대 시절 펜팔로 열열히 사랑했던
에이미란 여자와의 사랑얘기에 남매들은 꽂힌다.
만약 이 시간반복에 이유가 있다면
분명 이 이야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촉으로
그들은 아버지의 연애담에 집중한다.
반복되는 임종 때마다 아버지가 되뇌이는 이름.
의사가 먼저 그 '에이미'라는 사람이 누군지
남매들에게 언질은 줬지만.
3명의 자식들이 반복된 시간에 갇혀
결국은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 쯤으로
스토리라인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얘기 같지만,
책을 이끌어 나가는 건
아버지의 과거를 쫓아가며 알게 되는
아버지의 실제 과거 속 모습과
자신들이 자라며 각자 인식해 왔던
아버지 모습간의 간극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 간극을 매꾸지 못하고 떠나 버릴지도 모를 아버지를 두고
남매들 각자가 그 빈틈을 매꿔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고.
책의 말미쯤에 가선,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 속에 묘사된
옛날 아버지 모습과 같은 누군가를
그 장소 근처에서 본 듯하다는 얘기를
남매들이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빗속에서 에미미를 기다리며
단성사 앞에서 마음 졸이던 그 옛날 아버지가
현실에 등장해 종로 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느낌으로.
책에선 그 사실을 더이상은 확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게 가능한 시간반복의 상상 속에서
이 확인되지 않은 존재의 등장은
삶과 죽음 모두가 되풀이 되는 줄거리 안에서라면
의식없이 누워있던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실제 젊은 모습으로 어딘가에선 실제로
자신이 애타했던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떠돌고 있는 것도 필히 가능할지 모른다는
착각인지 실제인지 확인 안될
가능성 하나를 독자들에게 던지는 듯도 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후려치는 인생'을 먼저 매우 재밌게 읽었었는데
이번 책 또한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잘 읽을 수 있었고,
말미쯤 부터는 몇번 눈물이 맺히게 만들던
재연과정 속 이별이 임박한 아버지와 남매들의 모습도
글을 마무리하며 새삼 떠오른다.
무의미한 재미나 감동쪽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묘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스토리를 품고있다고 봐주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