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가 다르고 플롯이 다른 책들을 읽고 비슷한 감상과 결론을 내릴 때 나는 혹시 매너리즘에 빠졌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선택하는 책들이 다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무슨 책을 읽어도 같은 주제로만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일한 주제에 갇혀있는 것은 실천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아님 그 주제는 인간의 오래된 질문일까? 오래 전이든 현대이든 많은 작품에서 나는 같은 질문 앞에 멈추고 만다. 독자인 나는 모든 시대의 작가들과 함께 같은 질문 앞에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타임루프 안에 갇힌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와 카프카의 『성』의 주인공들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백치』의 미시킨 공작은 불우하게 태어났다. 좋은 후원자를 만나 간질 발작과 심리 치료를 위해 스위스에 머물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을 ‘백치’라고 소개한다. 스스로를 ‘백치’라 말하는 미시킨 공작의 이 정체성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것이 경험을 통해 외부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귀족들은 미시킨을 향해 정중한 태도를 보이나 그 예의를 갖춘 말에는 조롱을 가득 담고 있다. 미시킨이 자신의 간질 발작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내용은 독자에게는 연민을 자아낸다. 그러나 소설 속 청자들은 오히려 비웃음으로 대한다. 아마도 이런 반응은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이 질병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독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미시낀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민첩하고 섬세하게 이해하고, 또 그것을 기막히게 잘 전달할 줄 아(『백치』 제1부 8. 141p)”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사람들의 갈등과 욕망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선의를 발견하고 정직하게 접근한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곤란을 해결해주려고 한다. 그의 순수함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당혹감을 일으키고 반감마저 갖게 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욕망과 세속적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치정극 같은 내용을 담은 이 소설은 러시아의 귀족계급의 몰락과 철도와 같은 문명의 발달,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한 사회에 들어온 인물 미시킨이 환대받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배제되고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욕망이 목격되고 위선이 드러난다. 미시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탐욕이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백치』를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집필했다. 그 집필 기간 동안 첫딸이 태어났고 4개월 만에 죽었다. 돈에 쫓기던 시기여서 잠시 중단했던 작업도 다시 재개해야만 했다. 그는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품을 완성한다. 아이를 잃은 도시는 그에게 얼마나 잔인할까? 더구나 경제적 이유 때문에 글을 계속 써야만 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처럼 종일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글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그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적대감을 느꼈으리라.
카프카의 『성』 주인공 K는 측량사로서 고용되어 성(城)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고 간 일자리는 없고 성주나 성의 일을 담당하는 관료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는 그 성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의 관청은 규칙과 절차로 운영되지만, 그 체계는 모호하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K는 관청의 관리인(클람 등)과 접촉하려 하지만, 방식은 간접적이고 불확실하다. 그와의 사이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관리들은 그와 관청과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를 소외시키고 있는 이 관료사회의 부조리는 깊고 소외를 더욱 강화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성의 주민들도 그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K는 그 사회에 환대받지 못하고,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난다.
카프카에게 ‘문’은 통과할 수 없도록 굳게 닫혀진, 절망적인 장애를 의미한다. 그 앞에서 존재는 기다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이다. 『성』에 나타난 이 소외의 부조리는 견고한 관료주의라는 문턱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마주해야 했던, 이 세계의 닫힌 문이다.
K가 이 성에서 욕망하고 시도한 것은 측량사로서 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일은 학교에서 청소와 보조로서의 역할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는 것이 실존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됨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요구와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는 지점 중 하나다. 미완성인 이 소설에서 K의 기다림이 끝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부정적 전망을 지울 수가 없다.
인간의 실존을 부정하는 공동체의 부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세계(국가, 사회)로부터 어떤 소외의 경험을 하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타자들이 기다림과 같은 상황에 놓인 대상은 무엇이고, 무시된 욕망은 무엇일까?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이런 소외를 경험하는 우리 사회 타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계급과 배제된 존재의 독백이다. 독백을 듣는 독자로서 내가 깊이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은 나 역시 같은 계급이고 마음속으로 같은 독백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욕망과 그 욕망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만드는 계급과 권력(「홈파티」 「숲속 작은 집」), 부동산 현상과 계급 간 격차의 심화(「좋은 이웃」, 「빗방울처럼」), 그로인한 실존의 문제와 존재의 고독(「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에 관해 들여다보게 한다.
돈, 아파트, 부동산으로 이제 우리는 여러 계급의 ‘그들’을 만들어 냈다. 욕망하고 기다리고 배제됨은 그들 때문이라는 원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의 소통할 수 없는 언어를 갖고 있다. 자본 정신에 의해 의미가 만들어지고 특정한 계급끼리만 유통되는 언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폐지상자에 넣은 남편과 이 책을 집어올려 들춰보던 화자의 마음이 공명하며 나에게 전해져 온다. 그 감정의 실체는 치솟는 아파트 값에 의한 추방에 대한 것이 아닌 그 동안 붙들고 있던 신념을 잃어버린 상실감이다.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라고 생각했던 신념!
나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아님 내가 이상한가?
나는 자발적 타자인가, 소외당한 타자인가?
조금 우울했지만, 사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 찾는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기도한다. 세상이 변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