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리뷰를 남겨야 할지 벅찬 책들이 있다. 온통 발췌문만 가득해지고 내 문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가 힘든……. 보뱅의 책들이 그렇다. 아름답다는 말로만은 표현할 수 없다. 그가 보는 세계는 그에게서 정화되어 글이 된다. 그 글은 아포리즘이 되고 시가 된다. 새롭게 창조된 세상이 된다.

 

원제 ‘La Folle Allure’미친 발걸음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순화하면 무분별한 발걸음이라고 하면 될까? 그러고 보니, 소설의 표제지에 인쇄되어 있는 작가의 글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같은 수레에 묶여 서로 자기 쪽으로 미친 듯이 끌어당기는 두 마리 말과 같은, 기쁨과 고통, 웃음과 그늘이라는 두 줄기 피가 우리 마음에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니 적절한 보폭을 찾고 올바로 판단하려 애쓰는 눈밭의 기수들처럼 앞으로 나아가자. 그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이 때론 얼굴을 때리는 낮은 나뭇가지처럼 우리를 쓰리게 하고, 목덜미로 달려드는 황홀한 늑대처럼 우리를 물어뜯는다 해도.

-크리스티앙 보뱅


이 소설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글이 많이 담겨 있다. “나는 진지할수록 웃는 게 좋고,……이름들은 진지하다. ()은 태어날 때부터 당신 위로 떨어지고, 나이가 들수록 두툼한 옷 속으로 스미는 가랑비처럼 점점 더 무거워진다.(29)” 타고난 혈통에 덧입혀진 의미들로 말미암아 무거워진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독자에게 사유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보뱅은 이 소설 가벼운 마음에서 계속해서 탈주하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무거움으로부터 탈주다. 무거움을 견디지 못한다.

 

화자이며 주인공인 뤼시는 나는 오로르다라고 소개하고는 곧 아니 농담이다. 내 이름은 벨라돈이다. 그리고 마리 뤼드밀라, 앙젤, 에밀리, 아스트레, 바르바라, 아망드, 카트린, 블랑슈다.(29p)”라고 한다. 그녀는 그 누구도 아니고 그 누구도 될 수 있다. 한 가지 이름으로 규정되길 거절하고 규정 될 수 없다는 뜻이리라. 모비딕“Call me Ishmael”이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문장의 번역과 해석을 놓고도 독자들은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 냈다. 이름으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표적 소설이다. 반면 보뱅의 이 소설에서는 화자가 지나가며 가볍게 농담하듯 여러 가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오히려 웃음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이름조차 말할 필요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뤼시의 영혼의 친구는 늑대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두 살 때 늑대의 우리 안에서 늑대의 배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어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들이 공포에 떨었던 것은 우리 안에서 졸고 있는 짐승이 아니라 우리 위에 적힌 빨간 글씨의 안내판이다. “두렵게 만드는 건 이름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실체 자체도 없다.(11p)” 늑대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가출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이름들을 지어냈다.

 

뤼시는 서커스단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모가 있지만 특별히 누가 부모랄 것도 없이 그 공동체 내의 열세 가정에서 동시에 자랐다. 어릿광대나 곡예사 아주머니 등 어른들에게서 자랐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직관적이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늑대와 같고 어머니는 고양이 참새, 넝쿨식물, 소금, 꽃가루 같다.

 

뤼시는 네 살짜리 쌍둥이 동생들을 물속에 빠뜨리고, 머리위로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싶어 세례를 주었다고 말함으로 어릿광대 아저씨의 교육을 무화시키지만, 그의 몸짓과 표정으로 표현된 복음서 이야기들을 승화된 아름다운 예술적 장면으로 기억한다.

종교에 관한 한, 나는 향유, 맨발, 머리카락, 이 눈부신 삼위일체에 머물러 있다.(41p)”

 

그녀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 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68p)”

 

아름다운 글이다. 그녀가 말하듯 어디에나 가벼움이 있지만, 찾기 힘든 게 우리다. 그렇게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나로서는 실천하기 힘든 태도다. 그런 기술을 장착할 수 없는 것은 불안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도 될까?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될까? 그 뒤에 다른 의미들이 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서커스단에서 태어나서 이리저리 유랑하고, 다툼이 일상인 부모가 불편하면 다른 트레일러를 찾아가고, 가출이 습관이 되어버린 아이 뤼시는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속에 감추어진 가벼움으로 글을 쓰는 능력은 그러한 삶에서 갖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진 않겠지만 그녀에겐 축복이 되었다.

 

마주할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바로 그때가 되면 생각하는 것, 어떤 일을 할 때 왜 하는지 몰라도 할 수 있다는 것, 가벼움으로 본 삶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사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다.” “부부생활을 더딘 죽음을 견뎌내는 커다란 짐승과 같다.”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 영혼은 무엇인가?”이른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녀에게 이런 질문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들에 바람을 쐬어 주고 응시하기 위해 자주 홀로 머문다. 그녀는 누군가의 구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나의 늑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 같을 때라도 실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과,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간다는 것이다. ……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154p)”

 

누군가에게는 미친 발걸음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가벼움을 찾아가는 걸음이다. 그만큼 무게를 덜어내기가 쉽지 않으므로 갈지자로 보인다. 유목민처럼 태어나고 살았던 그녀일지라도. 수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보면 그 가벼운 마음의 행보가 미친 듯 보인다. 그녀와 달리 오늘도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나를 본다. 무겁다. 무엇이 나에게 더 좋은 삶일까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3-07-31 15: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아서 주변에도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는 웃다가 벅차서 눈물 나는 가벼움이었어요.
설명하기 힘들어서 독후감 쓰지 못했는데 그레이스님의 리뷰로 대리만족합니다.ㅎㅎㅎ

그레이스 2023-07-31 15:07   좋아요 3 | URL
미미님도 그러시군요.
그냥 책 한권으로 간직하고 싶은 그런 글들이죠. 뭔가 감상을 쓰는게 훼손하는 것 같은! ㅎㅎ

거리의화가 2023-07-31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장들이 참 아름답네요. 저도 언젠가 보뱅 만나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7-31 15:28   좋아요 2 | URL

정말 넘 아름다운 문장들이예요
제 책상에는 환희의 인간이 올려져 있습니다.
절판된 책들도 다시 나왔으면 좋겠네요.

페넬로페 2023-07-31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 이 책 다 읽었는데~~
다시 읽으려고 해요.
제 나름의 의미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그레이스 2023-07-31 15:29   좋아요 3 | URL
예~
저도 다시 읽게 되면 놓친게 많은걸 알게 될 것 같아요

얄라알라 2023-07-31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영광입니다!!!!

[가벼운 마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바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었을 정도로 보벵의 문체와 매력적인 인간형에 반했었는데요. 그의 문장에 압도되다 보니, 찬탄만 나오지 독자로서 어떤 문장으로 정리해야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주인공이 남편을 떠나 계단을 내려올 때 내던 그 소리가, 책 읽은지 몇 달 지나고 난 지금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그레이스님께서는 ‘이름‘에 주목하셨네요. ˝ 이름조차 말할 필요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그레이스님 말씀)___ 혹 제가 이 책을 또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땐 그레이스님의 시선을 상상하며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그레이스 2023-07-31 20:1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댓글에 감동받았어요
저도 말씀하시는 그 부분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타타티...~♡

제가 영광입니다^^

얄라알라 2023-08-01 12:43   좋아요 1 | URL
아!!! ㅋㅋ맞아요 그레이스님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타타티....˝

자꾸 그 부분에서 무용수의 몸짓을 상상했는데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타타티..
요거 였군요^^

2023-08-01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3-08-02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가벼운마음 진짜 좋죠!!!!! 🥹🥹🥹🥹🥹🥹🥹🥹🥹🥹🥹🥹🥹🥹🥹🥹🥹
저도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보뱅 에세이도 한권 읽었는데 이것도 좋았지만 역시 가벼운마음이 최곤거같아요.. 진짜.. 너무 좋아....ㅠㅠ

그레이스 2023-08-02 21:31   좋아요 1 | URL

다들 좋다고 하시니, 저도 뿌듯합니다.
보뱅읽기는 계속되어야 할듯요.

얄라알라 2023-08-03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보뱅의 파란책을 빌려왔는데 제목이 갑자기 기억이 안남이요...혹시 은오님 말씀하시는 에세이일까?^^ 기억력을 구박하며 서가로...가봐야겠습니다 ㅎ

그레이스 2023-08-03 05:14   좋아요 1 | URL
환희의 인간!
저도 그거 읽으려고 해요~~

얄라알라 2023-08-05 03:54   좋아요 1 | URL
^^ 그레이스님

온통 파란 그 책 제목은 <인간, 즐거움>이네요 저도 이후 찾아봤어요

1984books처럼 편집이 예쁘지는 않아서 말 그대로의 파란색이예요^^

저도 나중에 <환희의 인간> 읽어볼게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3-08-05 07:59   좋아요 0 | URL
그건 없는데...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ㅠㅠ
절판된 책이군요.
도서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