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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1
임레 케르테스 지음, 이상동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가 있다. 질문이나 대답이 필요 없다. 그들은 상대방이 듣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생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하려는 태도 때문에 끼어 들 틈도 없다. 가끔 긴 시간 계속해서 들어주는 것이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 작품은 그런 느낌을 준다. 연속되는 쉼표(,), 하이픈(-), 콜론(:), 세미콜론(;) 들과 괄호들 때문에 끊기고 돌부리에 걸렸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고 있는 작가의 독백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여백이 없는 글들은 독자가 사색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문장부호들과 삽입구를 걷어내고 맥락을 읽으려 했다. 차츰 익숙해지면서 그 흐름에 의식을 맡기게 되고, 동시에 작가의 고통과 고독, 회환에 깊이 침잠(沈潛)해 들어갔다.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反)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9p) 작가가 반복하는 말이다. 말장난처럼 들리는 이 말이 그에게는 적나라하고 비참한 진실이다.
작가는 해명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아무 할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으며 안 될 것 같은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강박에 압도당한 채, 또 내가 우려하는바, 마친 내가 나의 현존을 끊임없이 갈망하기라도 하는 듯, 스스로를 내던질 정도로 과장된 친절함으로 철학자에게 해명한다.”(10p) 이 해명을 촉발한 것은 철학자와의 대화이다.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은 일종의 “의무에 대한 태만 행위”라고 말하는 철학자에게 “아니요!”라고 본능적으로 반박한다. 그의 본능은 반(反)본능이 대신하고 있다. 다름에 대해서 해명하는 그는, 아이를 원하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안 돼!”하고 울부짖었던 때를 기억한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격앙된 감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자신을 보고 마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가오는 아내를 받아들였다. 결코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묵인하고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결국은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녀에게 그의 상처와 불임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가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과 같은 고통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망설임 없이 “안 돼!”라고 울부짖었던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의 흐느낌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하나의 물음이 되어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혹시 네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딸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을까? 너의 작은 코 주위에는 주근깨가 엷게 흩어져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네가 고집 센 아들인 것일까? 너의 눈은 회청색 조약돌처럼 근사하고 힘찰까?”(26p)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해명과 같은 글쓰기를 시작한다. “의식적인 자기청산의 길고도 긴”시작이었고, 그가 계속 반복하는 표현으로 빌자면, 그것은 “하늘 높이 파고 있는 나를 위한 무덤을 향한 최초의 삽질”(27p)이었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 첫 번째다. 그 정체성의 이미지는 빨간 잠옷을 입고 있는 대머리 여자다. 폴란드 유대인 전통인 셰이틀(유부녀들이 머리를 밀고 쓰는 가발)을 벗고 앉아있는 친척 아주머니를 목격한 후, 그 이미지는 자신을 규정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사회적 혐오의 분위기와 맞물려 그 모습은 창녀, 마녀의 이미지와 결합 된다. 그것은 자신을 정의한, 필연적이고 유쾌하지 않은, 기이한 이미지였다.
그의 결혼, 양육과 같은 본능에 대한 반(反)본능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부모의 이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가정과 학교, 나아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인 가부장제에 그 근원을 둔다. 더 나아가 “아우슈비츠는, 각각의 삶의 표상이자 행위”이며, 그 가부장제 정신의 지배를 받아 온 개인의 모임인 인류가 “통째로 꿈을 꾸기 시작한다면”, 매혹적인 살인마와 같은 인물이 반드시 탄생한다. “전부로서의 개별적인 삶, 그 전부가 전개되어 가는 역학”(57p), 학살을 부른 전체주의는 가부장제로 귀착되고, 그는 자신의 부모와 선조가 믿은 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는 종전 후 그가 아직 수용소에 있던 시기에 그 원형을 체험했다. 화장실에서 세면대를 닦고 있던 독일군과 마주친 기억이다. 독일군 병사가 그를 위해 세면대를 닦고 있었다는 것은 세상의 질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독일인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그토록 사실적인 것이다.”(84p) 그는 이것을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셋방살이와 연결시킨다. 그는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에서 멀어지기로 작정했고, 아니 반(反)본능이 본능이 되었고, 모든 것이 환원되는 자본도 거절한다.
소외감, 이름에 들러붙어 있는 불가해한 수치심, 허무……. 이런 감정들이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부조리함을 비웃으려 한다. 여전히 유대인 혐오가 공공연한 세상에서 그는 말한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대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서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체험으로서 그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 한다; 추상적 관념으로서 그것은: 빨간 잠옷을 입고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대머리 여자다, 체험으로서의 그것은: 나의 삶이다, 말하자면 나의 생존, 내가 살고 있는 정신적 실존 약식이며, 정신적 실존 양식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하다,”(127p)
그는 존재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런데 그것은 “하늘 높이 파고 있는, 나를 위한 무덤을 향한 삽질”이라고 한다. 죽음과 실존은 뗄 수 없다. 그러기에 실존적 글쓰기는 무덤을 파는 삽질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땅속이 아닌 하늘에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
단단하게 사유를 쌓아가던 그도 예상치 못한 작은 사건에 흔들린다. 재혼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아저씨에게 인사 하렴”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건은 그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연약하면서도 완강한 그의 삶을 드러낸다. 그는 기도로 글을 마친다.
“오 하느님!
저를 가라앉히소서
영원히
아멘.”
제목에 사용된 카디시(유대인의 기도)와는 반하는 내용이다. 그 격정이 고통스러워 가라앉혀 달라는 호소일 것이다.
깊은 상흔은 통증을 기억한다. 통증이 찾아오면 자신을 굳건히 세워왔던 철학도 신념도 신앙도 흔들린다. 그 흔들림과 격정 앞에서 절망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기 어려웠고,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책이다. 작가가 쌓은 사유만큼이나 고통이 헤아려진다. 어려웠다고 작품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가끔은 어려운 문장보다 내 독서력을 탓하며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