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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청명한 하늘, 교회 종탑에 걸린 구름, 관목들 사이로 바쁘게 날아드는 새들, 언덕 위로 부는 시원한 바람 ……. 영어단편소설을 낭독하고 있었다. 읽기를 마친 나에게 원어민 강사가 단조롭게 읽어가는 내 음성이 오히려 슬프게 들렸다고 했다. 주인공 소년이 걸어가며 보았던 이 아름다운 풍경이 슬프게 읽혔던 이유는 전후의 슬픈 상황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신부에게 알리러 가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맥락을 알게 되면 이런 아름다움은 슬픔을 더욱 짙게 한다. 그리 좋지 않은 발음이었으나, 나도 나름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다.
14세의 소년이었던 작가가 아우슈비츠를 향하는 장면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녘이라 바깥 공기가 서늘하고 향기도 좋았다. 드넓은 들판 위로 회색빛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 잠시 후 트럼펫 소리처럼 강렬하고 가늘고 붉은 햇살이 갑자기 우리 뒤쪽 어딘가로부터 비쳐 왔다. 나는 일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름답고 흥미로웠다. 집에서는 그 시간이면 항상 잠을 자고 있었다.”(86p)
아우슈비츠를 향하는 열차 안에서 창밖으로 보인 풍경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목적지의 참혹함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과 대비되어 공포와 슬픔을 더 진하게 느껴진다.
“역은 꽤 멋있었다. 이런 길이 일반적으로 그렇듯 우리 발밑에는 자갈이 깔려 있고 저 멀리에는 잔디가 줄지어 심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 노란 꽃들이 피고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아스팔트 길도 하나 있었다. 같은 모양으로 휜 일련의 기둥들과 그 사이에 있는 반짝이는 금속으로 된 가시철조망이 이 길을, 뒤에서 시작되는 들여다볼 수 없는 지역과 보이는 지역으로 나누었다.”(93p)
기차역에서 걸어간 길과 수용소에 대한 감상이다. ‘나’는 그 철조망 안에서 움직이는 죄수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을지 궁금해 한다. 죄수복을 입고 나와서, 상황을 어렴풋이 인지한 후, 바라본 풍경은 처음 인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 밀쳐지면서 밖으로 나온 ‘나’의 귀에 “누군가가 등을 얻어맞는 것처럼 뒤에서 철썩하는 이상한 소리”(110p)가 들렸고, 울타리 쪽으로 밀려간 ‘나’의 눈에 삭막한 마당들, 철조망 울타리들과 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그의 삶을 따라다니는 ‘냄새’를 맡았다. 시각, 청각, 후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성은 그것들을 해석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면, 감각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주인공 ‘나’는 사람들이 증오하는 유대인의 이름을 갖고 있다. 학교에서 상점에서 길거리에서 항상 정체성 확인과 자기검열을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와 분노를 지니고 있는 십대이다. 아버지는 노동수용소로 떠나고, 새어머니와 함께 남는다. 학교에서 퇴출되고, 군수공장에서 일한다. 출근하던 중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려지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열차에 태워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우슈비츠’이고, 이곳이 학살 수용소라는 사실과 바람의 방향에 함께 불어오는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된다. 정보의 수용하고 수용소에 적응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담담하게 그려진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지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부헨발트로 이감되면서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시간이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다. 끔찍한 현실을 수용하기에는 벅찬 14살 소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부헨발트에 아침에 도착했는데 해는 비쳤지만 구름이 좀 있는 데다 가벼운 바람이 공기를 식혀 주어 상쾌하고 깨끗한 날씨였다. 그곳의 기차역은 아우슈비츠 역에 비하면 최소한 시골 냄새가 나고 플랫폼이 정감이 가서 마음에 들었다.”(133p)
아우슈비츠 도처에서 목격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런 감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군인들의 걸음에 방향과 속도를 맞춰 걸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의 모든 삶이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종잇조각과 막대기를 가지고 송충이를 성냥 통에 들어가게 한 기억이 있는데 그 경우와 좀 비슷한 것 같았다. 송충이는 계속 움직이고 꿈틀거렸다. 이 모든 생각에 나는 몸이 좀 마비되고 멍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이 좀 나오기도 했는데 헝가리에서 헌병대로 이동하던 날 우리는 인솔하던 헝가리 경찰들이 허둥대며 부끄러워하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134p)
여기서 나는 마음의 병적 징후를 엿본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멍해지는 상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機制)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다시 차이츠로 옮겨지고,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죄수로 적응하던 ‘나’는 강제노역 현장에서 감독관에게 구타를 당한 날 “안에 있는 무언가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되었다는 느낌이”(185p) 든다. 과민반응을 보이고, 쉽게 화를 내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수레에 실려 가며, 죽음의 장소로 끌려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치료를 받기위해 옮겨진 병동 막사에서 음식 냄새를 맡고 눈물을 쏟는다.
“이때 가슴속에서 한 가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욕망의 비합리성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욕망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은 이 멋진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205p)
부헨발트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나’는 독일인 간호사와 의사의 호의로 완쾌된 후에도 계속 돌봄을 받고 그곳에서 종전과 자유를 맞이한다. 선의를 받는 태도 역시 일반적인 기대를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감한 반응이다. 그러고 보니 15살이면 지금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청소년이다. 무엇을 기대하나? 관념이 형성되기도 전에 악의와 선의를 몸으로 겪고 있는 청소년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 아닐까?
'나'는 집을 떠났을 때와 비슷한 계절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기차역에서 만난 기자는 그에게 묻는다. 헝가리에 돌아와 부다페스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증오심요”, 누구를 증오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모든 사람요”(266p)라고 대답한다. 세상을 위해 수용소의 일을 증언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을 뒤로 하고 집을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노인들의 격려-자유를 위해 수용소의 일을 잊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가라는-에 ‘나’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278p)고 대답한다.
‘나’는 말한다. 운명’은 없다. 길을 걸어온 자신이 운명이라고 말한다.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보다 지금 이곳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문제라고.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 비슷한 것을 느낀 것처럼, 저만치 어디선가 행복이 피할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고 말한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인류의 모든 비참과 고통의 총합처럼 보이는 곳에서 살아나온 존재는 그 상처를 딛고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지속해가겠다는 각오를 한다. 인류가 학살에 관심을 두고 파헤치고 있을 때 처절하게 삶을 지속하고 있는 존재가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의 후속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그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그의 후속작 『좌절』에서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출판 거절 편지를 받는 장면이 그려진다.
“…… 귀하는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사용했으나 그것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제도 끔찍하고 충격적입니다.…… 돌려 말하자면, 주인공의 특이한 반응 때문입니다. 물론 사춘기의 주인공이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렇지만 우리는 주인공이 유대인 수용소에 도착해서 왜 …… 보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화장터의 광경을……‘학생들의 고약한 장난처럼’ 보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 자신의 모든 것을 말살시키는 수용소 안에 있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말입니다. 주인공의 태도와 회고적인 보고들은 ……거부감을 주고 ……결말 부분을 읽어도, 소설의 주인공은 계속해서 수수방관하는 태도로……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51p 『좌절』)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작품은 『운명』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이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와 ‘어떤 평가를 내리는 편에 있는가’에만 있다는 것이다. 그 학살의 현장을 지나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도덕적인 평가를 내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 왜 그 일을 겪는지,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도덕적 평가는 이 비극을 읽는 독자에게 맡겨진 몫이다. 편집자의 편지에서 나는 이 비극을 만들어낸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그 그늘 아래서 한 인간이 지속해가려는 삶에의 욕망을 무시하는 눈 먼 권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