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글은 설득하는 힘이 있다. 그는 실패와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그의 위트는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열쇠다. 공감의 웃음이 배시시 삐져나온다.



페낙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몸의 일기로 만났다.

사랑하는 리종에게로 시작하는 유서가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딸에게 남긴 '몸의 일기'는 자신의 부재를 대신하는 또 다른 몸이다.

지금쯤 넌 내 장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겠구나.……변호사가 네게 전해주는 건 괴상한 선물이야. 다름 아닌 내 몸! 살과 뼈로 된 몸이 아니라, 내가 평생 동안 몰래 써온 일기장. …… 이건 생리학 논문이 아니라 내 비밀 정원이다. 여기야말로 여러 면에서 우리가 공동으로 가꾼 영토지. 너에게 이걸 맡기마. 왜 하필 너냐고? 널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이지.……”(9~12p)


몸은 두려움으로 인해 설사와 같은 생리작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 경험 때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첫날의 일기장을 채우고 있다. 그만큼 처음 겪는 몸의 반응은 낯설고 두렵다. 유년기의 그는 이런 몸의 반응이라든지 성장과 함께 오는 변화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항상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와 자신을 돌볼 에너지가 없는 아버지 사이에서 외로웠다. 그는 상상 속에서 동생 도도를 만들어내고 비밀스런 장난을 한다. 함께 자신의 신체를 관찰하고 탐험한다. 육체적으로 함께할 동반자가 필요했었다. 자신의 존재를 확실 드러내는 훈련을 하게 된 대상.

엄마를 대신해서 그를 씻겨주고 돌봐준 비올레트 아줌마가 없었다며, 그의 유년은 찬바람만 불었을 것이다. 비올레트 아줌마가 죽고 일기는 슬픔에 젖고 말라 버린다.


그는 기숙사로 보내진다. 춤에는 재능이 없는 몸, 부끄러움이 많은 몸은 호기심과 열기, 치기로 가득한 또래들 사이에서 겪는 2차 성징은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뒤섞인다. 20대의 몸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고, 종전 후 프랑스 공화국의 기념식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눈물에 대한 묘사는 감동적이다.

“2년 만에 다시 쓰는 이 일기에서 내가 우선 주목하고 싶은 건 바로 그 눈물이다. 오늘 아침 난 실제로 내 몸 안의 눈물을 전부 다 쏟아버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있을 수 없는 살육의 기간 동안 내 정신이 축적해온 눈물을 모조리 쏟아버린 것이다. 눈물은 자아의 배설이다. 그 엄청난 양이란! 우리는 울면서 오줌 눌 때보다 훨씬 더 시원하게 자신을 비운다.”(140p)


그의 뇌는 다시 지적 노동을 시작한다. 20대의 청년의 몸은 일찌감치 건강염려증을 경험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성애를 경험한 몸의 고백, 작고 연약한 몸을 향한 불안증, 자신이 교감하지 못한 몸의 대화를 한다.

아침나절, 꿈꾸는 개처럼 힘없이 혀를 늘어뜨리고 있는 브뤼노,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194p)

이런 일기를 쓰는 그는 설레고 행복할 것이다.


질병으로 입원한 병실에서 그는 계속 그림자처럼 따라온 두려움의 실체, “두려움은 인생의 유일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는 홉스의 고백과 마주친다. 혈관종, 안경, 성기능 쇠퇴, 그리고 은퇴 등 노화와 함께 그의 삶은 그 나이의 이벤트를 겪는다. 몸은 굉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해빙을 겪는다. “몸이라는 극지에서 빙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362P)

노년엔 없을 것 같던 외도도 비밀스런 몸의 이벤트였다.

 


그리고 소설처럼을 읽었다. 그의 책은 많은 소설의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게 한다. 교직에서 아이들의 읽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경험한 읽기 교육에 대한 이야기다. 교육자로서 아이들이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단지 tv, 학교, 시대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한다. 독서가 아이에게 가혹한 징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독서를 즐겁게 해주어야한다. 그들은 훌륭한 독자가 될 자질을 갖고 태어난다. 이 자질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점수와 성적과 같은 목적을 위해서 책을 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에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무엇이 있다. 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갈구하는 그들의 욕구를 일깨워줌으로 읽도록 해줄 수 있다.


그는 방법을 제시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 그것은 선물이다. 읽어주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강의에서 조르주 페로스의 낭독을 들었던 어느 여학생의 추억은 감동적이다. “그분은 책을 읽어주기만 하신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돈키호테보바리 부인까지도요! 비평적 통찰이 요구되는 대작인데, 교수님은 먼저 단순한 이야기로 들려주셨어요. 그분의 이야기를 통해 산초는 살아 있는 뚱보가 되었고, 슬픈 얼굴의 기사 돈키호테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신념으로 가득 찬 깡마른 꺽다리가 되었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들려준 에마는, ‘오래된 서가에 꽂힌 한물간 책들의 잔영에만 매달려 타락해가는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라, 놀랄 만한 열정을 품고 있는 인물이었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페로스 교수님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이라는 그 부조리한 모순 덩어리에게 냉소를 던지는 플로베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죠.”(169p)


소설을 읽음은 소설과 내가 교감하는 것이다. 교감에 실패하면 읽다가 중단할 권리도 나에게 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한다는 말에서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소설을 읽는 방식과 조금 달랐기 때문에. 그러나 낭독이 주는 역동성과 감동은 가끔 낭독모임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더해주어 흐뭇했다.

 



학교의 슬픔은 그의 열등했던 어린 시절로 시작해서 교사로서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몸의 일기가 유년시절에서 시작해서 노년에 이르는 몸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 책은 배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알파벳을 a를 외우는데 1년이 걸렸던 이해력 결핍과 바칼로레아 때문에 재수를 했던 경험으로 시작한다. 열등생이었던 두려움은 학창시절 내내 그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교사가 된 뒤, 그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30p) 문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단지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가 설명하는 문법과 철자법은 아름답기조차 하다.


이 책에서도 그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읽어준 책들의 목록이 줄을 잇는다. 그의 어린 시절 구원과도 같았던 독서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결국 나는 위스망스의 저아래를 구입했다프랑스 현대 문학사에 이어 페낙의 책을 읽어오면서 위스망스를 세 번이나 마주쳤기 때문이다.

은퇴 후 우연히 마주친 제자들과 수업에서 읽었던 문학으로 추억하는 그들의 대화에 가슴이 뭉클하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분 단 한 분!-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고.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내게는 그런 스승은 없었던 것 같다. 스승의 역할을 했던 분들은 있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젊은 교사들이 준비하지 못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멋진 메타포로 글을 마치고 있다. 오래도록 기억에 넣어두고 싶다. 여러 개의 갈피와 태그가 붙게 된 이 책을 내 아이들 키울 때 읽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함께 하는 아이들과 함께 적용해볼 수는 있을까?

 

페낙의 글은 그의 저서를 계속 찾아 읽게 하는 매력이 있다. 산문팔이 소녀를 읽기 시작했다출간된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며 찾아 읽어가고 있다. 나는 페낙 읽기 늦바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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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2-22 03: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은 페낙 읽기 늦바람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하나도 안 봤습니다 이름만 들어봤어요 소설을 소설로 보라는 건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한테 하는 말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책읽기를 재미없게 여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책읽기는 재미있어야 하죠 처음에는 그러고 시간이 흐른 뒤엔 자신이 읽고 싶은대로 보면 되겠지요


희선

그레이스 2022-02-22 06:26   좋아요 3 | URL
^^
말로센 시리즈까지 가게 되면 늦바람 맞을듯요!
^^

미미 2022-02-22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처럼>p.169 마음에 드네요^^♡ 선생님이 해주시는 돈키호테 이야기 얼마나 재미있었을까요?!
그레이스님의 늦바람 응원합니다!ㅎㅎㅡ뒷북미미

그레이스 2022-02-22 10:00   좋아요 3 | URL
늦바람에 뒷북이라!
ㅎㅎ
넘 좋았어요
선생님들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런 만남이 있다면 행복할것 같아요~
조금은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예요^^

레삭매냐 2022-02-22 1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 전에 <소설처럼>
을 읽었었는데 재밌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책들도 궁금하네요.

그레이스 2022-02-22 10:02   좋아요 3 | URL
제게는 다 좋았어요
지금 읽고 있는 산문팔이 소녀도 좋아요^^

단발머리 2022-02-22 1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처럼>이 좋았는데 <학교의 슬픔>은 좋은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공존하더라구요. <몸의 일기>는 노년과도 연관 지어 읽을 수 있겠네요.
페냑의 책을 이리 정리해주시니 처음 페낙 읽으신 분들에게는 쫘악 정리되고 넘 좋을 것 같아요. 고퀄 페이퍼에 감탄하고 갑니다^^

그레이스 2022-02-22 10:1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저는 몸의 일기 보고 넘 솔직해서 살짝 충격이었거든요. 그 일기를 아들도 아니고 딸에게 주는 것도 그렇고...!
신선하고 좋았어요^^ 매력있는 사람인듯요~♡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2-22 1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드릴식 그레이스만의 독서법이죠!
늦바람이 아니라요~^^
파고드는 집중력!!!^^
몸의 일기가 노년 이야기로군요?
신문팔이 소녀 책도 처음 봤습니다.
페낙 제대로 읽고 싶을 때, 어울리는 페이퍼가 맞네요~^^

그레이스 2022-02-22 16:04   좋아요 4 | URL
드릴식 ^^
노년의 이야기뿐 아니라 유년의 몸이야기도 있습니다. 노년보다는 유년의 이야기가 가슴아팠습니다.
감사합니다 ~

mini74 2022-02-22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몸의 일기 다들 평이 좋네요. 학교의 슬픔 도 관심이 갑니다 ~ 작가가 바칼로레아 때문에 애먹었군요. 바칼로레아 악명이 높던데요 ㅎㅎ

그레이스 2022-02-22 18:18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바칼로레아, 좋은 시험으로 보였는데 막상 점수위주의 프랑스교육을 문제로 지적하네요ㅠ
어디에나 단점은 있기마련이니...

얄라알라 2022-02-23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를 돌아보며 읽었습니다.
스크린 중독, 외로움, 분위기 탓, 아이들 집중력 탓
요즘 아이들 책 적게 읽고 가볍게 읽는 분위기를 탓하기 전에 읽어주는 것!

누군가에게 책 읽어주는 것이 꼭 영유아기 아이 대상뿐 아니라 훨씬 더 커서도 가능한 것인데
생각이 갇혀 있었다는 걸 그레이스님 글 읽으며 돌아봤네요^^

그레이스 2022-02-24 08:16   좋아요 1 | URL
예~
작년에 사기 일부분 낭독으로 읽고, 요즘은 중학교 아이들하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낭독으로 읽고 있는데 좋아요. 고전읽기 모임에서 호메로스 낭독으로 읽기 계획중인데 다시 읽는 것이어도 새로운 느낌일듯 해서 기대가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