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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흘러 다닌다’는 말은 걸립패가 사용하는 말이고, ‘표연’이라는 말은 오고 감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들린다”(15p)
문학자 시라이 도야(白井道也)가 시골의 중학교를 “두세 군데 흘러 다니다가 표연히 도쿄로 되돌아왔다”는 말을 하며 ‘흘러 다닌다’ 와 ‘표연히'가 그의 거취를 형용하는 것에 적합한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 도입부에 빠져든다. 한 사람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는데도 오랜 과정을 거치는 생각의 깊이가 느껴진다. 더구나 작가 자신의 자아를 투영한 인물을 표현하는데 고심을 하고 있어서 그가 말하는 “구애받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게 하는 이중 삼중의 인연”은 무엇이기에? 하는 생각이 든다. 도야는 작가 자신이고, 작가는 관찰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고양이다. 소설이 아닌 나쓰메 소세키의 시론이나 연설문을 읽고 있는 듯하다. 문학자 도야의 신념은 ‘존귀한 인격을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가난과 이로 인한 아내의 은근한 압력을 견디며 글을 쓰고 있다.
“다카야나기 군은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비아냥거리기 좋아해 염세가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반면 나카노 군은 대범하고 원만한 성격에 다양한 취미를 가진 수재였다”(33p)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 관계다. 작가의 문(文)이 이어진다. “이렇듯 운명은 비백무늬의 오시마 비단과 질이 떨어지는 지치부 비단도 하나로 꿰매어진다.”(33p) 이런 관계에서는 지치부 비단에 해당하는 다카야나기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다카야나기는 도야가 가르치던 학교의 학생이었고 도야를 학교에서 떠나게 했던 무리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사유가 많아진 『도련님』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야를 찾아간 다카야나기에게 도야는 문학론을 펼치고 그 말에 다카야나기는 고개를 숙인다. 자신의 본령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그다지 견고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도야선생은 계절이 바뀌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냉대한다는 것도 모른 채 붓과 벼루에 목숨을 걸고 있다. “움직이는 사회를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도야 선생의 소명이다. 높고, 위대하고, 사심이 없는 방향으로, 한 발짝만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도야 선생의 사명이다.”(125p) 그에 비해 다카야나기는 자신을 불운하고 외로운 존재라고 여기고, 차가운 현실을 너무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 문학도로서 자신을 의심하고,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 다카야나기는 부유한 나카노에 대한 부러움과 환멸의 양가감정을 느꼈었다. 항상 자의식 과잉상태에 있었다. 여인이 부른 노래가사 속 부질없이 부는 태풍에 흩어져있는 흰 나비, 검은 머리카락처럼(109p) 근심이 드리워진 나약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도야 선생은 사회적으로 매도당할 위험이 있는 연설회의 연사로 나선다. 그가 하는 작고 큰 행위는 사람을 위하는 일이다. 그는 청중을 설득한다. 세태를 비판하고 학문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도야는 연설의 말미에 세상이 “학자나 문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반드시 올 것”(193p)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믿고 글을 쓰겠다는 작가의 다짐이다. 다카야나기는 청중과 함께 함성을 지른다. 통쾌함을 느꼈다. 문학을 읽고 독자가 느끼는 감정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삶을 비추게 된다. 다카야나기가 문학자로서 자신을 점검하고 다시 길을 걷듯이.
다카야나기, 나카노, 도야와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근대 일본의 지식인 사회를 형성하고 혼재했을 것이다. ‘세상은 형형색색이다’(202p)라는 독백에서 자신의 길을 정한 마음을 본다. “지금 지나치고 있는 나는 내일 아침이면 65리나 날아간다. 이런 사실을 스시집의 점원도 국화빵 굽는 할머니도 꿈에서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202p) 이 생각에서 타인의 시선과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를 발견한다.
흰나비, 흰 꽃에
조그만 나비, 조그만 꽃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있네
……
부질없이, 부는 태풍
부질없이 사는가 속세에
흰 나비도, 검은 머리카락도
흩어져 있네, 흩어져있네
(109p)
나의 읽기를 반추한다. ‘왜 읽어?’ 라고 물어보면 ‘좋아서’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읽는 동안 들어오는 새로운 지식과 감동에 진동을 느낀다. 느껴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책을 또다시 집어 든다. 읽고 쓰는 것으로 무엇을 하거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읽는다. 자연스럽게 삶은 문자 뒤에 있는 의미들에 의해 조명되고 충돌하며 생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