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마음』 은 나쓰메 소세키의 에고 3부작이라고 한다. 『춘분 지나고까지』에서는 감춰져있던 불안의 원인이 드러나고, 『행인』에서는 불안이 쌓이고 증폭된다. 『마음』에서는 자살로 갑작스럽게 진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행인』에서 이치로는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거나, 내 앞에는 이 세 가지 길밖에 없네”라고 말했다. ‘죽거나’는 『마음』에서, ‘종교에 입문하거나’는 『문』에서, ‘미치거나’는 『행인』에서 주인공들이 가는 길이다. 이렇게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들의 삶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의 화자(話者)인 ‘나’는 어느 바닷가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알게 된다. ‘나’는 도쿄로 돌아와서도 선생님 집을 찾고, 계속되는 방문과 교제 속에서 선생님의 학문과 사상에 존경심을 갖는다. 선생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나가 떠드는 건 죄스러운 일이지”(41p)라고 말할 뿐, 그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과거의 어떤 일이 선생님을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짐작한다. 어느새 ‘나’는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임종을 위해 떠나오던 날 선생님의 정원에 서있던 목서 한그루는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았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후에 ‘나’는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암시와 커다란 의미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처음 자신에게 보였던 선생님의 냉담한 태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할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24p)였음을 깨닫는다. 고향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그에게 선생님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도착하고 선생님의 비밀이 드러난다.
『갱부』의 주인공 청년이 막장에서 사내를 만나고 그의 숙소를 찾으며 한동안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것처럼 『마음』의 화자 역시 선생님에게 비슷한 인력을 느낀다. 막장에서 만난 사내가 그곳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마음』의 화자에게 선생님이 과거를 편지로 고백하는 것도 유사하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의 삶을 고백함으로 청자(聽者)에게 삶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나는 내 과거의 선과 악 모두를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할 생각이네.”(274p)
지금의 화자와 같은 나이 때, 대학시절 선생님에게는 친구 K가 있었다. K는 이상주의자였고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K를 돕고자 선생님은 자신이 묵고 있는 하숙집을 소개한다. 하숙집 딸(아가씨)을 사랑하게 된 K의 마음을 알고 선생님은 질투심에 휩싸이게 된다. 초조해진 선생님은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되고, 그의 옆방에서 친구 K는 목숨을 끊는다.
『행인』에서 여인을 두고 지로가 미사와와 벌였던 보이지 않는 갈등과 신경전은 『마음』에서 K로 인해 선생님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와 병행한다. 처음에는 없었던 아가씨에 대한 감정이 K의 마음을 확인한 후에 생겨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이다. 『행인』에서 지로는
“거기에 우리가 깨닫지 못한 암투가 있었다. 거기에 인간의 타고난 이기심과 질투가 있었다. 거기에 조화로도 충돌로도 발전할 수 없는, 중심을 결여한 흥미가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내 비겁함을 부끄러워했다. 동시에 미사와의 비겁함을 미워했다. 하지만 비열한 인간인 이상 앞으로 몇 년을 교제한다고 해도 도저히 그 비겁함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는 자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굉장히 불안해졌다. 또 슬퍼졌다.”(76p, 『행인』)
라고 생각한다. 불안과 슬픔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감이다. 왜 우리는 그런 감정의 천박함을 알면서도 사로잡히고 끌려갈까?
친구 K의 사인(死因)을 생각하며, 처음엔 실연 때문이라고 단정했지만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갑자기 결심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선생님은 오싹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자신도 “K가 걸어간 길을, K와 똑같이 가고 있는 거라는 예감이 때때로 바람처럼 가슴을 가로질렀기 때문”(267p)이라고 한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키지 못한 자의식 과잉 상태의 두 사람은 그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행인』의 이치로는 '말라르메의 의자'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껏 의자 하나 잃고 마음의 평화가 흐트러진 말라르메는 행복한 사람이지. 난 이제 대부분 잃었네. 겨우 내 소유로 남아 있는 이 육체마저 거리낌 없이 나를 배신할 정도니까.”
(381p, 『행인』)
이 세상에 거할 곳이 없는 존재, 그 육체마저도 거절하는 것처럼 느끼는 그는 H와 동행한 여행에서 극도의 불안과 고독을 토로한다. 밥을 먹는 그는 육체의 거절은 극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위태롭다.
오랫동안 죽음을 생각하던 선생님은 노기대장의 죽음과 그의 글을 읽고 갑자기 실행에 옮긴다. “노기씨는 그 35년간 죽자, 죽자, 하면서 죽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273p) 죽을 당시의 고통보다 살아온 35년이 더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자 죽음을 결행한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트리거가 될 수 있는 것들은 도처에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을 그 주인을 배반한 다른 존재인 듯 쓰고 있다. 자신을 타자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는 윤리적인 위상과 존재론적인 위상의 이중구조가 있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이야기한다. 타자(대상)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대상화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양심을 위배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당시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하다. 시간이 지난 뒤 여전히 과거에 과오를 저질렀던 마음을 떨어뜨려 대상화 하지 못하면 그 안에 갇힌 신경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반성도 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것도 오직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절망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는 변함없이 절망 속에 있는 것이며, 자신으로서는 얼마간 분투했다고 여길지라도 그렇게 분투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절망의 늪에 빠질 따름이다. 절망이라는 차질은 단순한 차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차질, 또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차질이므로, 자기 혼자를 상대로 삼은 관계 속에서의 차질은 동시에 자기라는 관계를 만든 힘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반영되는 것이다.” - 키르케고어, 『죽음에 이르는 병』
(31p, 『나쓰메 소세키론 집성』)
실존주의를 거론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때때로 몸서리쳐지는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이 있고 그것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그 절망에 갇히게 된다.
신경쇠약을 앓았었던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작품 안에서 주인공들에게 그의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을까는 그의 에세이나 편지글들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유리문 안에서』 라는 수필을 보면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이런 만남들, 서신들, 그리고 작품은 그가 자신 안에 갇히지 않고 자신과 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깊은 연애에 뿌리내린 열렬한 기억을 빼앗더라도 그녀의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를 ‘시간’으로 씻어주려고 했다. 내가 본 그녀에게는, 아무리 평범해도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늘 삶보다 죽음을 귀중하다고 믿고 있는 나의 희망과 조언은 결국 불쾌감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초월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것을 실행하는 자신이 평범한 자연주의자임을 입증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다.” (228p 「유리문 안에서」『긴 봄날의 소품』)
오늘 『행인』과 『마음』으로 동아리 회원들과 토론하며, 만일 이 책들을 혼자 읽고 끝냈다면, 감상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의미를 생성하는 만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