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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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여성의 구원을 향한 여정과 그 길에서 만난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몸으로 관통해간 시대의 현상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역사를 불러와 거기에 기인한 사회의 신념과 전통을 배설排設하고, 한 가족사를 통해 들여다보게 한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 아래서 개인은 개별자가 아닌 가족이나 공동체란 단위로 묶이기도 하고, 이방인이 되기도 한다. 자유 하고자 하는 욕망은 억압당하고, 억압당한 욕망은 이탈을 이끌어내고 탈주하게 한다그렇게 떠난다. 그 길에서 누군가의 악의는 덫을 놓기도 하고, 선의는 쉴만한 경유지를 제공한다. 그 여정은 떠날 때 생각했던 곳을 넘어 더 멀리 나가고,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계속 될 것이다. 떠날 때 바랐던 구원은 사라지고 이리저리 부유한다.

 

펠리시아의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1916년 부활절 봉기 때 죽은 여성 혁명가의 이름이다.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고집스럽게 지켜낸 자부심이다. 카톨릭 전통과 관습이 지배하는 마을에서 펠리시아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한 기술 없이 통조림 제조 공장에 다니다가 공장이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자유도 함께 잃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는 아침을 차리고, 누워계신 할머니를 돌보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저녁식사를 차리는 일상을 살게 된다. 역사, 전통, 관습이 여성인 펠리시아의 삶을 규정짓고, 불황은 그녀를 가둔다.


펠리시아는 조니 라이서트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 아이를 가진 것을 안 그녀는 그의 주소조차 알지 못한 채 그를 찾아 영국 버밍햄을 향한다. 펠리시아의 여행은 위태해보이기만 하고, 이어서 등장하는 힐디치씨의 일상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조성한다. 힐디치씨는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 관목 숲에 둘러싸인 단독주택에 홀로 살고 있다. 오래 전 어머니를 여의었다. 공장 직원들 사이에서 그는 유쾌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통한다. 그의 사생활은 평범하고 예상 가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스럽다”(19p)는 말이 불길하다. 조니를 찾기 위해 공장으로 찾아왔던 펠리시아와 길에서 다시 마주친 그는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녀가 조니를 찾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녀의 돈을 몰래 빼돌리고 자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든다. 호의를 거절했던 펠리시아는 그의 도움을 받게 되고, 절망가운데서 그의 권고대로 낙태시술을 받는다. 뒤늦게 후회를 하고 떠나려는 그녀에게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녀는 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그에게서 달아나지 못했음을 알아챈다.

여기까지는 연쇄 살인범 힐디치의 덫에 걸려든 펠리시아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추리소설이다

펠리시아는 그에게서 도망쳐 나오고, 다른 도시에서 거리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힐디치는 망상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끝을 낸다. 잡목들 밑에 묻힌 소녀들은 영원히 비밀이 된다. 펠리시아 역시 침묵한다.

많은 질문의 과정을 거쳐야 메시지가 잡힐 것 같다.

 

펠리시아는 왜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녀의 여정 중 마음에 떠오르는 집에 대한 회상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부정적 메시지였다. ‘칠푼이’, ‘나사 빠진 인간같은 비난, 희생에 대한 암묵적 요구, 조니 라이서트가 영국군이라는 소문을 알려 주며 했던 아버지의 경고, 그리고 조용히 내뱉은 말 창녀’. 밤마다 꾸는 꿈에 자신을 비난하는 아버지와 사람들이 등장하고, 돌아간 후의 삶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그녀는 또다시 그 침실에서 깨어날 것이다. 같은 절망 속에서 또다시 찾아오는 새벽, 여섯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눈을 뜨는 고단함, 또다른 하루의 시작, 화요일이면 다시 그 비좁은 계단을 닦아야 하고, 주말에는 노인의 침대 시트를 갈아야 한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비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냉정한 표정으로 쳐다볼 것이다.” (73p)

 

그래서 그녀는 조니와 함께 있는 것만이, 둘의 사랑만이 구원을 가져오리라”(73p)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애써 외면했던 조니의 진심을 깨닫게 되고, 그를 찾는 것을 단념한다. 미혼모의 가능성은 없어졌지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강화된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던 그녀는 조니의 데이트 신청에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근사하네"(49p)라고 말해주는 그가 달라보였다.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녀에게는 정말 구원이었던 것이다. 잠깐이지만 행복감과 희망을 맛 본 그녀가 과연 절망을 들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이미 길을 떠났고 과거의 자신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그리고 사람들은 길에 머물게 된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가을날 결혼식 신부 들러리도 아니고 자동차 뒷좌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썼던 아이도 아니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312p)

 

펠리시아는 여정 중에 사람들을 만난다. 도움을 줄 것 같았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리나와 조지와 같은 거리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구원을 찾아 생존하기 위해 이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펠리시아는 그들처럼 길에서 잠을 자고, 구걸을 하고, 몸을 팔기도 하면서 서서히 그들이 되어간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여자들과 노숙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치과의사를 보고 그녀는 힐디치의 사악함을 떠올린다.

 

힐디치는 사생아였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폭행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을 만나고, 그녀들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이내 떠나려는 그녀들을 살해했다. 남자들은 어머니에게서 육체적 욕구만을 채우고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동일시 혹은 망상일까그는 과거에서 떠나지 못하고 망상에 갇힌 존재이다. 

그는 규칙을 깨뜨리고 펠리시아를 집으로 데려 온다. 그리고 그녀를 놓쳤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그로 인해 자각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상처입고 우울한 그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녀들의 불행한 처지를 유독 알아차리는 눈을 가졌다조니와의 잊지 못할 만남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불행한 그녀를 길에서 발견한 사람은 힐디치다.


과연 순수한 선의는 존재할까? 

 

일자리를 잃으면서 다이아몬드 커피 독에 앉아 있을 자유, 비용 먼저 따져보지 않고 투스크린 리츠에서 저녁을 보낼 자유”(42p)를 빼앗겼던 펠리시아는 어느 도시의 길에서, 죽은 자의 이름이 새겨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가 버리고 간 커피를 마시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다.

 

부엌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에게로, 그 후 다정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가져다준 조개껍데기에게로, 녹색 점박이 알들, 존 카운트의 노래, 그 무렵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던 아버지의 쓸쓸한 눈, 떠나버린 남편이 안긴 치욕에 대한 답이었던 형벌 같은 상처, 아들을 향한 암처럼 조용한 사랑. 살인을 한 남자의 저 깊은 곳에도 다른 영혼과 다를 바 없는 영혼이, 한때는 분명 순수했을 영혼이 있었을 것이다.” (319p)

 

의미도 규칙도 없이 시간과 사람들이 뒤섞여 들어가는 사색이었지만, 그녀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된다. 다른 존재인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일들은 사소한 사건과 우연한 만남일 수 있다. 모든 일은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작은 긴 여정으로 이어진다. 어느 도시의 거리와 도로에나 그들은 존재한다. 그들이 길을 떠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실종자. 거리의 사람들. 밑바닥 인생과 같은 단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이다. 대상화할 수 없다.

 

나의 삶을 움직인 선택들과 현재의 정체성을 갖게 된 삶의 과정들을 되새기며,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사건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억울했던 감정들, 답답한 시간들, 구원이라 여겼던 것들의 허상들, 이런 것들을 떠올려보며, 다시 생각은 거리의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그들이 그곳까지 이르게 된 서사는 무엇일까과연 자유로울까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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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31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펠리시아도 그렇고 힐디치도 그렇고 감정의 극단에 몰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은 참 서글픈거 같아요 ㅜㅜ 그래서 여정을 떠나는 구나 생각이 드네요~~

그레이스 2021-07-31 11:08   좋아요 4 | URL
두사람이 조금 결이 다르지만 새파랑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scott 2021-07-31 15:43   좋아요 4 | URL
아ㅜ.ㅜ 저도 새파랑님 말씀에 공감 합니다

미미 2021-07-31 11: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이 작품 읽으셨네요?!! 우째 저만 안 읽은 듯한 기분;;;ㅋㅋㅋ8월엔 꼭 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1-07-31 11:32   좋아요 4 | URL
꼭 숙제한 기분이예요
리뷰 쓰느라 새벽에 잤거든요
낮에는 올림픽중계 소리에 생각이 끊어져서...^^
오늘까지라니까 가망은 없지만 암튼 써서 올려봤어요 ;;;;;

scott 2021-07-31 15:43   좋아요 4 | URL
저도 올림픽 울 선수들 경기 영상 넋 놓고 보느라 일상에 균열이 ㅎㅎㅎ

2021-07-31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1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8-01 0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펠리시아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없는 엄마를 찾으면 안 될 텐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도 그렇게 좋지 않겠지요 아버지가 펠리시아를 기다린다 해도... 집을 나가 거리에서 사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 펠리시아한테 안 좋은 일 없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바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요


희선

그레이스 2021-08-01 08:10   좋아요 2 | URL
펠리시아가 아버지의 무심함을 대할때마다 엄마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긴 했어요.

mini74 2021-08-01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펠리시아가 전혀 친하지 않은 이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모습에서 참 슬펐어요. 돌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 같아요. 리뷰가 정말 좋아요. 공감도 가고~ *^^*

그레이스 2021-08-01 16:08   좋아요 1 | URL
저두요
그 장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