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책무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황소걸음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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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이라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 철학, 인지 과학, 역사학, 사회정치학 등의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오늘날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928년 유대인 이민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학부는 물론 석,박사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MIT에서의 대부분의 연구 활동을 비롯, 컬럼비아 대학,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등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합니다. 촘스키가 단순히 해당 학문의 연구에 매진하는 평범한 학자였다면 그를 향한 '세계의 양심'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1962년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1967년에 나온 소책자 '지식인의 책임'를 통해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로 자리매김합니다. 특히 과거 그에 대한 네오콘들의 증오는 정말 상당한 것이었는데요. 그는 냉전 시기에 콜롬비아, 니카라과, 파나마 등지에서 있었던 CIA에 의한 '더러운 개입'을 폭로하고, 그러한 왜곡된 미국 정치와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정치적 술수를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미국 사회에 가감 없이 알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쥘리앵 방다가 외쳤던 '지식인의 책임'과 관련해 이것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노엄 촘스키의 양심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촘스키는 현재 매우 고령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모쪼록 그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Writers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로 지난 1996년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번역은 강주헌씨가 맡았습니다.

이 글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인의 책무"와 관련해, 촘스키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함의를 기억한다면 소위 배운자들의 도덕적 의무는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뒤에 나오는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토크빌과 존 듀이가 강조한 실천적 시민에 대한 의미로도 읽히는데요. 과거 존 듀이가 귀스타브 르봉을 일독했는지 모르겠지만 듀이가 지속적으로 탐구한 '시민'과 '교육'에 대한 정체성은 실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전자의 르 봉처럼 대중 다수에 대한 반쯤은 추정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인식'을 뒤이어 등장하는 권력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감을 제공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듀이와 비교될 만한 일화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논증 가운데, 촘스키는 지식인이 양심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알려야 하는 도덕의 사투와 관련되어 있는 사건으로 캄보디아와 동티모르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학살이야 이미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방조되어 인도네시아 군이 자행한 동티모르에서의 무고한 학살은 실로 국제 윤리와 최소한의 도덕성을 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코소보에서의 살육과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조차 구축된 처리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미국과 인도네시아와의 중요한 정치 외교적 관계를 국익의 관점을 무시하고 일개 지식인이 이 학살 과정을 폭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에 대해 아마도 의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대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실천하는 지식인에게는 무조건 이를 전할만한 '가치 있는 대중'이 중간의 매개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뒤이어 진술되는 2장은 흔히 애덤 스미스의 오독으로 비롯해, 더욱 체제 전반에 낱낱이 적용된 시장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의 저자임을 망각하고 지냅니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의 화신으로 꾸며 배타적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오랫동안 그를 왜곡해 온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데요. 더욱이 촘스키가 멜서스를 인용하며 입증하고자 하는 바는 경제적 합리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간접적으로 파괴하는지 밝히는 것에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돈을 향한 탐욕이 우리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있다"는 인식마저도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인데요. 사실 지그문트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촘스키도 역시, 이런 시장주의가 우선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에 수렴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는 '참된 자유주의'라는 의미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단되어 과거 전통적인 의미를 상실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지배계급으로터 자유로울 권리, 권력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그만큼 현 시대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기존의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인 정치학 수준에서의 교리를 뛰어넘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을 우리가 자각하고 있다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원래의 자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버틀란드 러셀과 존 듀이의 사상적 행적은 그만큼 많은 시민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이들이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시대의 선구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촘스키의 설득력은 그만큼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3장은 로버트 커트너와 대니 로드릭의 민주주의에 관한 종래의 논증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미국 정부의 중요한 국제 무대에서의 원칙, 시장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세계 각지에 이식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정치적 명분이자 세계 패권의 정당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기업과 은행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취하면서도 공공의 감시를 제대로 받지 않는 그림은 자본주의의 이행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는 촘스키도 진술하듯, 시장에서의 광범위한 영리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기업들이 내부의 의사 결정이 민주적인 부분과는 동떨어진 채로, 거의 전체주의식의 상명하달의 위계는 마치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이익 앞에서 충분히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평등과 모두의 이익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적 논리나 더 나아가 금융 자본주의의 이행으로 인한 더욱더 강화된 자본의 축적은 그야말로 배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칠레의 피노체트의 사례를 고려해 봤을 때, 미국 정부가 과거 냉전 시기나 작금의 시기까지 신자유주의의 개혁을 남아메리카를 비롯, 여러 국가들에 밀어붙인 정치경제적 행위는 과거 영국이 자국의 시장을 위해 인도의 산업 전반을 항복시킨 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또한 실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정부를 미국이 CIA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원한 역사적 과오는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질서'와 매우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국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위대한 제임스 매디슨은 새로운 국가가 사적 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지주들을 비롯한 부자들의 권리가 다수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인 인물입니다. 재산권에 대한 위협이라는 매디슨의 사회에 대한 우려는 그동안 미국의 헌법을 통해 면밀히 계산되어 적용되어 왔습니다. 아마도 미국 시민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에 대한 함의는 이와 같은 맥락을 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상 기득권 보수주의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자유'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되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더 많은 자유는 아마도 '과두제'로 나아가는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이와 관련해 촘스키는 사법제도를 떠받들고 있는 판사들이 시장의 자율권을 위해 사법적 조치를 공공연하게 한 점을 끄집어 내고, 기존의 연방이 갖고 있는 권력이 각 주로 이행되는 과정에는 권력을 가진 기업이 연방 정부보다 주정부를 좀 더 수월히 다룰 수 있는 배경이 된다고 일침했습니다. 즉 이와 같은 진술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일견 보이는 대로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강박한 필요에 의해, 특히 기업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정치 전반이 시장과 경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례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처럼 촘스키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모두의 이익에 수렴하지 못하는 일종의 원리원칙과도 같은 견고한 시장주의와 그러한 철저하고 조직적인 이행이 전세계 민주주의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경고하는 것으로 글은 사살상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 대다수가 스스로 삶을 견실하게 영위하지 못한 채, 경제적 삶이 위협 받고, 본래의 공익에 기반한 사회 체제가 승자독식의 침해할 수 없는 원리에 잠식당하여,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장의 마지막 논증인 '자유시장 보수주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힐만한 내용이었는데요. 촘스키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선명성은 이처럼 명료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실망스러운 부분은 3장 후반부의 "일본은 점령군으로서 야만적 권력을 휘둘렀지만 서유럽국들과 달리 식민지들을 산업화시키고 발전시켰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본래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촘스키의 저런 문장은 일본 내의 극우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에게 다분히 이용 당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도덕적 행위자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 퀸시 애덤스도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정직한 삶을 살면서 "우리가 불운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씨를 말려 버렸다"고 식민지 개척 과정을 설명했다.

반세기 전,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의 서문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영국에 헌정하면서, 결과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억누르지 않으면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어 미래의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할 것이라 예언하며 말년에 그 위험성을 경고했던 ‘은행ㅇ과 돈 많은 기업들‘은 그후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은행과 기업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민중의 간섭과 공공의 감시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힘을 확대해나갔다.

국가 권력은 민주 사회에서 더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지만 국가 권력이 자유주의적 비전과 충돌하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에의 종속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 즉 자유의지에 따라 권력에 순종하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반미‘와 같은 개념들이 사용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현상이 아니다.

독자적으로 보유한 재산도 없고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은 ‘한 줌의 음식도 요구할 권리가 없고, 현재 몸담은 곳에 있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멜서스는 주장했다.

경제의 합리주의가 체계화되어 강요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중적인 면을 띠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시장법칙이 가차없이 적용 되었고, 필요할 때마다 부자와 특권계급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

과거에 항상 그랬듯이 우리는 제퍼슨적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귀족정치주의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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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2-03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지난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찾아 읽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게도 몇 군데 글에 인용만 하고 독후감은 쓰지 못했는데 확실히 저에게는
소장할 책이더군요. 이 책도 얼마전에 뜨길래 궁금했는데 역시 읽어야겠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늘 아쉬움과 의문 투성이었는데
(한국사회에서 그 목소리가 부재한 것 같아)‘가치 있는 대중‘이 필수적이라니 그도 그럴법 하네요.
앎이 짧은,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분야를 베터라이프님 이렇듯 글로 잘 풀어내 주시니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2-03 23:21   좋아요 2 | URL
촘스키의 비판적 화두인 ‘승자독식‘과 그에 따른 공익의 쇠퇴는 바우만도 오랫동안 동의했던 부분이죠. 그리고 바우만 역시 다독을 바탕으로 주장에 대한 많은 인용이 특징인 학자이죠. 아마 자본주의의 본질을 그만큼 꿰뚫어 본 사람은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도덕적 책무에 따라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에게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촘스키의 대략적인 주장입니다. 이 대중을 시민으로 치환하더도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위한 교육과 깊은 사색이 바탕이 된 겸허한 사람들이 정치의 바탕이 되어야 함은 자명한데요. 물론 이 부분도 매우 어려운 현실입니다.

사실 시장의 자유라든지 그러한 맥락의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 하면서 정치가 불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시스템이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악화되어 왔고 이제는 극단주의 정치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평에 다 담지 못한 부분 중에 촘스키가 기득권을 쥔 권력에 대한 본질을 논하면서 지배 권력 자체가 좌와 우를 논하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정부의 본질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미미님의 여러 글을 보면서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새삼 북플에는 내공이 상당한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모두가 이렇게 책으로 엮이고 말았으니 아마도 쉽게 헤어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끝으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댈러웨이 부인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5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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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런던 사우스 켄싱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1900년 경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9살 경에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던 울프에게 많은 여성들과 낭만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류하고, 또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갖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작금의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로부터 '여성주의 작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연유에,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대 명망있는 사람들을 모아 만든 블룸스버리 그룹이 당시 영국 문학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 울프의 문학적 기여와 더불어, 이 점이 오늘날 그녀가 크게 존중 받는 이유이기도 할 텐데요. 그런 울프와 유사하게 손수 자유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 그룹을 만든 에인 랜드가 오늘날 네오콘을 비롯한 보수주의 정치가들에게 숭배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성계를 선도한 소수의 여성이 있었다는 산증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제가 에인 랜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울프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사적 기법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현재의 이 의식의 흐름은 간혹 난삽한 서술로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댈러웨이라는 작품도 그렇지만, 서술 상의 논리나 근거가 뒷받침되고 극 전반을 일관되게 끌고 나가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하는 게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이는 마구잡이식 서사가 부여된 글쓰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큰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애 말에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와중에 직접 경험한 세계 제2차 대전의 아비규환과 지인들의 불행은 그녀를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20세기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울프의 여러 작품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의 주제와 그런 맥락들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1925년 처음 출간되었고, 뒤에 역자가 밝히는 대로 1965년판의 원서를 기반으로 1992년의 Macmillan 판의 주석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간은 2019년 5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모두가 책 제목으로 인지하고 있다시피 이 소설의 주된 인물이자 주인공은 댈러웨이 부인 즉, 클러리서 댈러웨이입니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그녀와 관계된 인물들의 풍부한 서사와 관계 전반의 관련성을 답보하면서 극의 중요 축인 참전 용사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의 죽음이 연관되어 진행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역자의 주를 통해 알게 된 영국 귀족 부유층의 파티가 안주인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중요한 바깥 일을 남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극 전반에서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클러리서가 간여한 댈러웨이 가家의 파티에서 영국 수상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자신의 신분에 대한 만족감과 이들 소수의 계급이 서로를 충족시켜 주는 속물적 욕구가 거의 극대화 되고 있었는데요. 약간 미심쩍었지만 이 델러웨이 부인에 대한 이 속물적 근성이 극 후반부에서야 드러나는 부분은 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극의 전환점으로 '돌아온 탕아'라고 볼 수 있는 피터 월쉬와 그녀와의 지난 관계를 약간 애매하게 묘사하는 가운데, 그녀가 남편인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결혼 생활에 대체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고 있다는 서술은 그것이 비록 서사에서 약간의 반전이라 할지라도 '여성의 제한적인 활동'과 이어지는 시대의 한계에 잘 맞물려 인식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울프가 언급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로서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역시 그러한 모순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손의 칼과 다른 한 손에 셰익스피어의 책을 들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실현한 이런 영국의 이중적인 태도는 버지니아 울프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1900년대의 영국 런던의 곳곳을 사진으로 생생히 보여주는 듯한 작가의 세심한 묘사는 인물의 서사와 맞닿아, 독자들이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문화적 금기라든지 영국 특유의 귀족 문화에 대해 마치 궁정 소설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당시 영국 제국주의적 영향을 받은 소수 부유층의 문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고, 이들과 같은 부유층의 문화가 대체로 각각의 '교양'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이는 극 초반에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고 읽히는 댈러웨이 부인이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스스로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은 뭔가 역설적이게 느껴졌는데요. 평범하지만 솔직한 남편 리처드와의 결혼 생활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뿌연 안개에 있는 것처럼 모호하게 그려지고, 그녀와 피터 월쉬와의 과거 얽혔던 감정들이 현재 리처드와의 결혼 생활과 상반된 관점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더욱이 남편인 리처드와 피터가 절친이라는 점에서 후반부에 어떤 반전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보기도 했는데요. 무엇보다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걸 좋아하는 월쉬에게 일반적인 교양과는 아주 거리가 있어 보이는'주머니 칼'을 장난감처럼 만지작 거리는 버릇은 마치 댈러웨이 부인 스스로가 '성性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동시에 부부간의 열정이 전무한 이들 부부의 상황과 묘하게 배치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다소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피터 월쉬에와 과거 댈러웨이 부인이 (이에 대한 서사가 다소 부족함에도) 젊은 날의 열정으로 얽힌 기억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샐리 시튼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샐리는 클러리서의 잘 드러나지 않는 속물적 면모를 일찍이 간파하고, 월쉬와 클러리서의 관계가 진정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임을 예측한 바가 있는데요. 또한 지금 언급한 샐리 시튼과 뒤이어 등장하는 도리스 킬먼은 그 시대에 소수의 여자들만 갖고 있었다는 학위 소유자로서, 킬먼이 클러리서의 딸 엘리자베스와 얽히면서 단순히 그녀에 대한 댈러웨이 부인의 못마땅한 심정을 넘어, 귀부인인 댈러웨이 부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요소로 깊이 작용하게 됩니다.

또 다른 서사의 주인공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자신과 밀접하게 가까웠던 에반스가 이탈리아에서 희생을 당하자 삶의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거의 충동적으로 자신의 아내인 루크레이지아에게 청혼을 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인 레지아는 자신의 남편을 전쟁 영웅으로 이해하고 있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보이고 있는 셉티머스에게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삶이 스스로에게 전혀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리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반쯤 도피처로 택한 이 결혼 생활과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여 괴롭히는 상사인 에반스의 환영은 당시의 의사들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한 투쟁은 그가 싸웠던 치열한 전쟁에서 만큼이나 중요한 과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실히 그러한 투쟁심을 그 전쟁 한 가운데서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극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이 영국 제국주의를 위해 전장에서 싸웠던 간에 아니면 개인의 사명감을 위해 싸웠던 간에 예나 지금이나 희생된 젊은이들에 대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감상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였는데요. 영국의 성세를 포장하는 듯한 퍼레이드만이 댈러웨이 부인을 비롯한 많은 영국인들에게 얄팍한 의미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모순으로 읽힙니다. 이처럼 임박한 그의 죽음과 부유층의 안사람이 주도하는 파티가 극단적인 삶과 죽음이라는 매개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파티에서 극적으로 극화되기에 이릅니다. 울프의 이 작품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댈러웨이 부인을 포함해,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부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도리스 킬먼을 통해 현실의 문제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여겨지는데요. 도리스 킬먼의 억눌린 자의식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깊은 감수성의 여성들을 대변하면서 노골적인 계급주의에 대한 폭로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댈러웨이 부인이 오십 줄이 넘어서 느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죽음의 실체라는 공포에 직면하여 진정으로 어떤 깨달음의 체화가 되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류층이 주도하는 영국 사회의 일면과 이들이 사회 전반에서 괴리 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요. 물론 개인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신중한 결혼이 주인공인 클러리서와 피터의 '한때의 얽힘'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합니다만 높은 교육을 통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여성이 현실의 가혹한 경제적 궁핍에서 좌절 당하고, 오히려 사랑과 열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은 결혼을 선택한 주인공을 극의 중심으로 삼아, 이러한 경제적 선택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울프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화적 금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진정한 탕아 기질을 갖고 있는 월쉬와 대체로 상반된 지점에 놓여 있는 리처드 댈러웨이와의 극명한 대비는 '얄팍한 교양의 부유층 부인'의 악어 눈물 만큼의 회한을 중심으로 맞물려, 그 서사는 꽤 치밀하여 어느 정도는 논리적 설득력과 소설적 과장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각 인물 간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묘사는 꽤 흥미진진하기도 했는데요. 전체적으로 왜 이 작품이 울프의 대표적 소설로 자리매김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가 삶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왜 삶을 그렇게 보는지, 구성하고, 하나를 중심으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 그리고 매순간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지 말이야.

만약에 늙은 아일랜드 여인의 충성심을 위축시키는 순경의 눈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맥주 한 단지 값어치의 장미 다발을 세인트 제임스 거리로 던졌으리라.

바로 그날 밤 파티를 여는 여인의 가냘퍼 보이는 핑크빛 도는 얼굴이 보였다. 클러리서 댈러웨이,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금 그들은 육체적 쾌락이나 나날의 삶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핀즈베리 보도에서 텅 빈 무덤에 이르기까지 들고 가는 화환 때문에 엄숙한 모습이었다.

위안, 구원을 향한 열망, 이 불행한 난쟁이 같은 존재 밖에 어떤 것, 이 연약하고 추하고, 비겁한 남자 여자들 밖 너머에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클러리서의 친구들, 친분이 오래된 모든 패거리들 -휘트브레드, 킨덜리, 컨닝햄, 킨로크존스 가족들 - 중 아마도 샐리가 최고였다.

이제 그녀는 지배와 권세를 누리려 그렇게 번득이는 남편의 눈에 켜진 열망을 재빨리 만족시키느라 속박하고, 강압하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도려냈으며, 주춤거리다, 몰래 엿보곤 했다.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좋은 혈통을 갖지 못해ㅐ 생긴 이런 비사회적인 충동들을 저 아래 서레이에서 억제하는 것을 맡으리라고 그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브래드쇼 부부가 그녀의 파티에 와서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이유가 뭐람? 한 젊은 청년이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파티에 와서 그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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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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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이해영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1996년부터는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한미 FTA를 반대할 정도로 진보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정치 철학에 눈을 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에 천착하게 됩니다. 특히 자리를 잡은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국제관계학을 교수하다 보니, 어느새 국제 외교와 정치 철학, 양 분야에서 강점을 갖는 학자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또한 해당 전문 분야의 학자로서 국제 외교 관련 TV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의 아내는 과거에 유명했던 방송인 허수경씨로,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는 소설가 공지영씨와 부부지간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과 그 국제 환경적 여파를 다룬 그의 이 책은 2023년 2월 3일 출간 예정으로 되어있으나,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해영 교수의 이 책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된 논점으로 다루면서 일방적인 러사아의 침공에 전쟁의 원인이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우크라이나의 국내 정치적 상황과 그 이전에 미국이 주도했던 NATO의 동진,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미국 패권의 '단극 체제'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요목조목 분석하는 국제 정치적 논저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저자의 이 글을 보면서 쉽사리 믿기 어려웠던 점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격이 그만큼 보기보다 복잡하다는 것이었고, 전반적인 전황에 대해 그 진실이 다수의 서구 언론이 외치고 있는 만큼 우크라이나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는 분석이었는데요. 물론 징집 된 러시아 군의 전반적인 무능과 부실한 무기는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러시아에 의한 소위 '특수 군사 작전'이 키이우를 굴복시켜 상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낭동부 지역의 친러시아 지방을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는 데 있다는 러시아 군과 푸틴의 숨은 의도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 군에 의한 다수의 민간인 공격에 대한 주장은 어쩌면 일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전시 프로파간다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물론 민간인 구역에 대한 러시아의 미사일 오폭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젤렌스키의 말처럼 공공연하게 러시아 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니고 있다는 언설은 현지의 숱한 정보 왜곡과 가짜 뉴스의 범람을 고려해 봤을 때, 좀 더 진실을 규명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전쟁을 보는 서방의 시각인 "민주주의 대 독재"의 대결 구도는 저자의 비판적 분석에 따라 그 표면적인 구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우크라이나 정부군에 의해 자행된 2014년 돈바스 침공도 그렇거니와 최근에 마리우풀에서 포위되어 항복한 '아조프 연대'의 존재는 단편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과연 건전한 민주주의 정권임인지 의심하게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아조프 연대는 네오 나치를 표방하는 무장 단체로 극우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집단입니다. 저자인 이해영 교수의 표현대로 전세계 극우 민족주의 운동 가운데 유일하게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군사 집단인 아조프 연대는 "군대가 아니라 갱단"이라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에 3장에서 놀라울 정도로 상세히 분석되는 이들의 행적은 극명하게 민주주의와는 전혀 공생할 수 없는 괴물 그 자체인 극단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해 고문하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성전으로 삼아 하켄 크로이츠와 같은 과거 나치의 상징을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표상으로 드러내는 등의 폭력적 극단주의에 경도 되어 있었습니다. 젤렌스키가 정권을 잡은 이후, 전 정권과는 달리 이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이들을 점차 인정하기 시작했는데요.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미화되고 있는 2014년의 유로마이단의 사례를 고려해 본다면 이 전쟁의 복잡한 성격은 단순히 앞선 대결 구도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목적은 가히 명확해 보입니다. 브레진스키가 과거 자신이 주도한 '브레진스크의 함정'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의 개입을 획책한 것과 같이, 이번 전쟁에서도 러시아의 극심한 전력 소모를 미국 정치권은 바라고 있을 텐데요. 저자에 의해 '민주당 네오콘'이라 규정되는 현재 로버트 케이건과 같은 부류의 실질적인 네오콘들은 확연하게 2개의 전쟁 (러시아와 중국)을 회피하기 위해 국제 정치를 입맛대로 요리하면서 그것의 일단계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확전 방지를 목표로 삼은 듯 한 데요. 물론 러사아에 대한 제재와 관련해,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멕시코 등의 거부는 그동안 미국의 외교적 패착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고, 이는 한국과 더불어 무조건 미국의 의사에 동조했던 이스라엘 역시 현 상황에 의문 부호를 갖게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더욱 근본적으로 과거 제임스 베이커가 고르바초프에게 장담했던 'NATO의 동진은 없다'는 확약을 폐기한 것에 있는데요.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승인된 나토의 동진은 특히,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과 NATO 가입 신청으로 이어져 사실상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데 이릅니다. 여기에 만약 우크라이나가 NATO에 더해진다면 러시아가 미처 대응도 할 수 없는 서방 측의 핵미사일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 배치될 수 있기에, UN 헌장과 국제 규약을 어기면서까지 감행한 푸틴의 대우크라이나 진공에는 이러한 숨은 맥락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러시아에 의한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진공은 국제법적 정당성이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다만 앞으로 있을 우크라이나의 불안한 정세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NATO측의 오판도 분명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코소보 사태를 떠올리면 이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글 후반부에 이어지는 미국의 달러 패권의 추락과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고 여기에 인도가 한 발을 걸치는 '다극 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질 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20년 전후로 세계 패권의 판도를 바꾸는 전쟁이 연이어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은 크게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는 서방으로부터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음에도 원래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국가로 자신들의 천연 자원은 중국이나 다른 국가로 판로를 충분히 바꿀 수 있고, 러시아와 중국의 협력은 상하이 협력 기구에 대한 이란의 가입 신청으로 어느 정도 전환점에 이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블록과 견고한 친미 동맹들간의 국제정치적 연대가 한순간에 무너지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네오콘이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의 실패를 초래하여, 러시아가 중국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동쪽으로의 국력 투사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타이완의 문제는 미국과 중국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러시아 또한 확전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겠는데요. 이만큼 우크라이나가 불러 일으킨 대전 大戰에 의한 전세계적 궤멸은 허무맹랑한 SF적 디스토피아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끝으로 이해영 교수는 자신의 이 책에서 러시아의 초음속 미사일인 지르콘의 존재를 군사적 상황에서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신무기로 보는 듯 했는데요. 미국의 저 견고한 항모전단을 지르콘의 먹잇감 정도로 여기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국제 해양 수송로와 많은 동맹국들의 안보를 책임진 이 항모전단이 초음속 미사일로 전부 무력화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심각한 군비 경쟁의 서막이 다시금 근래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의 군사적 패권이 급격하게 쇠락할 것이라는 예측은 좀 더 근거가 필요해 보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몇 가지 확실한 부분은 앞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젤렌스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승리한다 하더라도 우크라이나가 그대로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 있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회의적이며, 서구 국가들이 지원한 무기들로 인해 전후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무기 암시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다는 점일 텐데요. 지금도 우크라이나 군부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무기들이 과연 테러리스트들 손에 들어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측면에서도 대표적으로 브레진스키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실패 이후, 탈레반들의 교조화 및 무장 운동에 대해 별다른 가책조차 보이지 않는 점에서 지금의 미국 정권도 이 부분에 대해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더 본질적으로 미국이 과거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과 CIA에 의한 정치 개입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젤렌스키의 운명 역시 미국의 손아귀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미국이 원하는 정답은 우크라이나의 평화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인이 죽도록 싸워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보여주듯 대륙과 세계 공동체 운명을 워싱턴에서 전부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위험한 환상이다.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국무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나토, 유럽연합 협의기구로 전달된 전문은 "러시아는 나토에 의한 포위와 역내 영향력 축소 시도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안보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할지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21세기 미국 대전력의 최대 목표는 ‘2전선 전쟁‘, 즉 중국 및 러시아와 동시에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다.

젤렌스키가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은폐한 수단이 바로 이 진보적 현대화 담론이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진보 이념을 강조했지, 이를 사유화나 토지 매각, 긴축과 연결해 말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결코 민주국가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를 관찰하면 할수록 우크라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앙하는 칠레의 피노체트식 현대화를 생각하게 된다.

젤렌스키는 한편으로 나토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해야 나토 가입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네오나치가 우크라이나 제도권에서 과잉 대표되는 구조에 있다.

포스트트루스 post-truth의 진행 단계가 고속화,고도화되면서 이제 미디어는 사실이나 진실에 특화된 사회적 체계와 기능에서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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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1-2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린 책이 많지만 이 글을 보니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정치 경제적으로도 그 파장이 우리에게
미치고 있는 만큼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보입니다.

베터라이프 2023-01-29 23:23   좋아요 2 | URL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무장한 네오나치가 정치세력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 이 글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르겠어요. 흔히 이런 전쟁은 도덕적 선악론으로 흐르기 쉬운데, 알고보니 젤렌스키가 서구를 끌어들여 대 러시아 연합을 획책했던 것과 같이 이것만으로도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제가 극단주의자들을 지극히 혐오하는데 전세계에 민주국가라고 알려진 우크라이나가 극단주의와 나치즘의 소굴이었다니 쉬이 믿겨지지가 않더군요. 그 외에도 기존의 미국 패권에 긍정하는 소위 신자유주의 경제 패권에도 어느 정도 비판하고 있어서 그런 연유로 다극 체제는 어쩔 수 없는 시대 흐름일지도 모른다는 귀결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브레진스키와 케넌 등 국제정치학자들의 진면목을 얼마간 볼 수 있으니 그 나름대로는 일독의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러시아의 안보 불안과 입장을 좀 더 대변하고 있어서 이 점은 유념하셔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서방 전반이 거짓 정보와 조작 뉴스에 매우 취약하다는 저자의 인용과 평가에 절로 긍정할 수밖에 없었네요.

랑시에르 2023-02-08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논평에 감탄하고 갑니다 :)

베터라이프 2023-02-08 22:58   좋아요 0 | URL
너무나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부끄럽네요 ㅜㅜ 다시 글을 확인해보니까 곳곳에 오탈자가 보여서 내일 다시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귀한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NamGiKim 2023-02-16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읽어볼 생각입니다. 이해영 교수님이라면 신뢰할만하다고 봅니다.

베터라이프 2023-02-17 08:43   좋아요 1 | URL
확실히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이해영 교수의 통찰은 여럿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느 논저나 설득의 한계라든지 근거가 빈약한 부분이 있을 수가 있겠지요. ^^

NamGiKim 2023-02-17 08:49   좋아요 1 | URL
요즘 뉴스들을 보면 우크라이나쪽만 대변하는 입장들만 보이고 있어서, 진실을 알기 힘들죠.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가 노동자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는데, 한국에서 이거 보도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해영 교수님의 책이 중요하다 봐요.

베터라이프 2023-02-18 07:18   좋아요 1 | URL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서구 언론이
러시아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기사를 갖다 쓰는 우리 언론도 그렇고요
나토의 동진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쪽에서는 분명 심각한 안보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쟁은 해답이 될 수 없겠죠

NamGiKim 2023-02-18 08:53   좋아요 0 | URL
물론 저도 전쟁이 해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이라는 극단적 선택은 피해야하니까요. 하지만 이 큰 그림을 계획한건 서방이라는 사실에서 이 전쟁을 냉정히 볼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위축효과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이정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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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명대학교의 광고PR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인 이정기 교수는 같은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후 한양대에서 석,박사를 취득하여 2013년 12월까지 동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강의 교수로 일했으며, 2018년 3월이 되자 자신의 모교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이 교수의 이력은 사뭇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2022년 5월 기사에는 그가 120편의 논문과 함께 21권의 학술 저서를 발표했고, 심지어 그의 논문 피 인용수는 1,319회에 달한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교수의 이런 왕성한 연구 활동이 자리만 차지하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 상당한 귀감이 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주력으로 연구하는 분야에 매진하는 학자 적인 모습은 현재의 대학 분위기에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저자의 '표현의 자유' 3부작 가운데 마지막 논저인 이 책은 지난 2021년 6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시민들의 침해 받을 수 없는 권리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는 그들의 헌법에서 마땅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이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논의의 확장 가운데서 다수의 시민들에게서 통치의 위임을 받은 공인들 즉, 정치인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마땅히 비판과 견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맥락의 표현의 자유가 여러가지 원인들에 의해 위축되는 상황을 일컬어, 저자는 이를 명확히 위축효과 chiling effect 라고 논증 가운데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표현의 자유로 돌아와서, 우리가 익히 친근하게 인식하고 있는 이 표현의 자유는 글 1장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인권과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필수 기본권"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명백히 반대로 위축효과는 저자의 말마따나 '표현의 자유의 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사실 위축효과로 인한 가장 부정적인 도출은 바로 시민들에게서 '자기 검열'에 따른 표현의 위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든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헌법과 사회 제도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 받아야 할 텐데요. 결국 시민에 의해 구성된 의회의 의원들이 무엇보다 헌법을 통해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침해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많은 의무 중에 하나 일 겁니다. 뒤이어 비판적으로 논증되는 2장의 국가보안법 제7조에 대한 개정 논의도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4장의 사실적시의 명예훼손에 있어서도 국가보안법 7조 해석과 마찬가지로 공익에 대한 조건을 재판관이 어느 정도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2장의 논증 가운데, 등장하는 '종북 좌파'의 표현 자체는 그동안 소위 개발 독재 이데올로기에서 상당한 기득권을 누린 보수주의가 "자신들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을 부정적으로 프레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종북 좌파라는 단어 자체가 모멸적이고 특히나 논리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건전한 복지나 사회 부조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싸그리 종북 좌파로 몰고 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그 폐해는 심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부정적 프레임 씌우기' 자체가 카를 슈미트의 잔재라고 생각하는데요. 1980년대 이후에 슈미트의 "나 아니면 저쪽"이라는 일상적인 구분법이 사회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러한 인식적 차원에서 마누엘 카스텔이 정권이 휘두르는 권력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두려움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의 권리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 자체도 실상은 정치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명백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의 여느 논증들 가운데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5장의 '징벌적 손해 배상제도에서의 위축효과'였는데요. 일전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각 언론의 행태를 봤을 때,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개인에 대한 인권이 언론에 의해 거의 난도질 당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에 대한 사실이 아닌 기사들에 대한 구제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법원을 통한 구제가 전부일 듯 싶기도 한 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언론에 대해 징벌적 손해 배상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언론 자체가 권력과 정당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만 하고 무엇보다 기사를 제공하는 기자와 편집부 자체가 무엇보다 증거에 기반하는 기사를 몇 번이고 검증하여 내보내야 하지만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 송부 행위가 근절되지 않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다만, "비방할 목적이 있을 때, 정보통신법상 명예훼손에 해당하여 처벌"받을 수 있고, 그 처벌 역시 가볍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기자의 표현의 자유가 사실과 증거에 기반하지 않을 때의 부작용을 과연 어떻게 방지할 수 있겠느냐는 뒤이어 나오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발언과 관련 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물론 이 부분은 많은 토론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자의 이 글을 통해 그가 우려하고 있는 바는 대충 알 수가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나 많은 부를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자원들을 동원해, 공익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나서는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를 고용한 변호사들과 유리한 사법 제도로 입막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겁니다. 더욱이 힘을 가진 강고한 언론이 다수 시민들 편에 서지 않고 권력의 하수인노릇을 하는 가능성 자체는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연이어 터진 근래의 사태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요. 즉,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함의에서 뿐만 아니라 언론과 시민이 서로를 신뢰하며 소수 권력층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민주주의 질서로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닌 시민들은 각자가 경제 상황에 따라 파편화 되었고. 자본주의와 정치 권력에 순응한 언론은 그만큼 시민들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 당면한 현실일 겁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민들이 당연히 요구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시민 다수가 권력과 사법 제도에 불신을 갖게 되어, 순수하게 헌법과 제도 자체를 곧이 곧 대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연유로 근원적인 위축효과는 현실의 왜곡된 문제에서 더 기인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후반부에 논증의 결말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이 공적인 표현을 하더라도 권력에 의해 보복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로서는 복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요. 정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렇게나 어려운 과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 갑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시민들을 대표해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인(정치인,공직자)을 감시, 견제하기 위해 자유롭게 그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획일성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점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자율 규제와 차별금지법 등으로 제한함으로써 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고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위축효과란 공권력과 같은 권력, 특정 표현에 의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에 의해 정당한 의사표현이 어려워지는 이른바 자기검열의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예컨대 유럽식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도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종북좌파로 지칭될 수 있다.

종북좌파라는 표현은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이념을 달리하는 혹은 보수적인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을 부정적으로 프레임하는 방식의 표현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익성이라는 것은 정부의 성격에 따라 혹은 재판관의 성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시민들을 대표해 공적인 일을 하는 정치인과 같은 자발적이고 정치적인 공인들이 시민들의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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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쓰루 컴북스 이론총서
박동섭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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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쓰루(内田樹)는 일본 도쿄도 오타구 시모마루코에 출신으로, 프랑스 문학 연구자, 사회사상가, 번역가로서, 흥미롭게도 합기도 7단과 거합도 3단의 무도가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그는 고교를 중퇴했지만 대학 입학 자격 검정을 거쳐, 도쿄 대학 문학부에 입학합니다. 이후 1977년에 도쿄도립 대학 대학원의 인문과학연구과 석사 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일본 내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특히 우치다 다쓰루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큰 영향을 받아 일본 국내에서 고유한 레비나스 연구자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이런 우치다 다쓰루를 분석한 저자의 언급대로 현재 그는 일반 시민들을 위한 저변이 넓은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이런 '일반인'들을 위한 읽기 쉬운 여러 교양서를 끊임없이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우치다 다쓰루를 시라이 사토시와 함께 일본에서 몇 안되는 '리버럴 지식인'으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대체로 그의 진보적이고 고유한 사상들은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생각할 꺼리들을 전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컴북스 이론 총서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2022년 5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지식을 통해 일반 대중을 지향하는 지식인의 존재는 어느 사회나 단언컨대, 매우 귀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에드워드 사이드가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지식인이 권력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거의 암울해 보이는데요. 이를 토대로 우치다 다쓰루는 대중들을 향해 있으면서도 권력 비판에도 물러서지 않는 지식인으로 저에겐 읽히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독립연구자이자 번역가인 지은이 역시 스스로 우치다 다쓰루의 책을 거의 다 구해 읽고 그것도 모자라 다쓰루의 블로그 글과 각종 매체에 기고한 에세이도 다 찾아 있었다는 것을 1장 '마치바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스스로를 "다쓰루안"으로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마치 일본 내 독특한 사상가인 강상중에 대한 일부 국내 연구자들의 추종도 사뭇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우치다 다쓰루가 다른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과는 달리 앞선 분야를 선도하는 일부 전문가들의 어려운 글쓰기와 주제 의식에 대해 반대하면서 "사상이나 철학을 따로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료한 주제 의식을 담은 글을 여전히 쓰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뚜렷한 목적 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상반된 측면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대중 지식인에 대한 극명한 편견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상아탑에 있는 전문 학술 연구자들이 오늘날 여러 매체를 통해 오르락 내리는 '학위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눈에 마뜩잖은 기미가 있는 것은 학문에 대한 너무나 강고한 엘리트주의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자는 다시 한 번 마르셀 모스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학문과 지식에 대해 고찰합니다. 모스의 증여론을 통해 나타난 '증여 사이클'을 언급하면서 이를 학문과 지식의 소위 독특한 '증여관'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누군가의 귀중한 이론과 그에 따른 해석을 자기 안에서 잘 씹고 소화시켜 소위 '신체성'을 획득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나 사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비슷한 분야를 이미 '선행'한 선배들의 도움은 어떻게 보면 학술과 학문의 '증여 사이클'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이 부분에도 우치다 다쓰루의 학문에 대한 태도와 그런 맥락을 유사하게 대입해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저자가 따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다쓰루가 강조한 '민주제론'의 한 일각에서, "가능한 한 많은 국민이 적절한 판단력을 갖춘 어른일 때야 말로 잘 기능하는 제도"라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그가 왜 그토록 전문 학술 영역의 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지 대략 짐작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가 꽤 고절한 전문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전자와는 다른 부족하지만 아마추어리즘과 다방면의 지식을 보유한 다수의 지식인이 필요하다는 해석은 우리가 깊이 곱씹어 봐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되는데요. 이는 사회 발전을 위한 지식의 고도화는 물론 우리와 밀접한 일반 정치에 있어서도 '사려 깊은 시민들'을 길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내포하는 바가 꽤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어떠한 깊은 주제 의식을 담은 논저나 짧은 문장이라고 할 지라도 누구에게나 쉬운 언어, 평이한 문장으로 빠른 이해를 돕는 글쓰기가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인터넷 시대에 대한 여러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는 지식과 자극적인 정보의 범람은 단순히 고상한 학문이라 일컫는 철학과 사상에 대한 분야에 대한 스스로의 고립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쓸모 없는 신변잡기식의 언어로 된 주제들을 백안시하여, 기존의 고차원적이라 불리는 철학이 이들과 오랫동안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폭넓은 차원에서 존 듀이와 토크빌이 강조한 '준비가 된 시민'을 사회에 소위 공급할 의지와 의무를 무력화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치다 다쓰루와 같은 대중 지식인들의 귀중한 존재 이유가 증명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전문 학술 지식인들이 스스로 밥줄에 연연하면서 동시에 되지도 않는 권위주의에 갇혀, 사회와 정치의 발전에 대해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은 그만큼 좋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버틀란드 러셀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단순히 제도권 교육에 대한 맹신과 함께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를 재교육하지 않고 그저 방치된다면 아마도 그 사회의 미래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현실과 점차 괴리되어 가는 소위 '전문 지식'들이 과연 그것을 협소하게만 공유하는 일부 계층과 특권화 된 지식 계급이 우리 사회를 어떠한 식으로 몰고 갈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시민들이 절대 다수인 이런 사회에서 말이죠.    
     



-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나서지 않는 요즘 지식인들을 보았을 때, 권력과 첨예한 갈등 관계에 놓이더라도 할 말을 하는 지식인의 존재는 단순히 사회를 이익 창출이라는 기회의 장이라는 목적에 온갖 이유를 갖다 바치는 경우보다 매우 귀중하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규명한 지식인의 아마추어리즘은 이처럼 사회를 견실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건 저의 서투른 결론이기도 합니다만 이런 건전한 지식인들과 변별력과 깊은 사고력을 갖춘 시민들이 결합한다면 우리의 정치가 무엇보다 더 이상 극단주의에 놀아나지는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역시 기득권적 과두제에 휩쓸리지 않을테고요.  

내가 민주제를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한 많은 국민이 적절한 판단력을 갖춘 어른일 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도 더 잘 기능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제 국가는 일정 수의 국민이 어른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민주제의 공덕이다.

즉 자신이 새로운 ‘증여 사이클의 청시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절박한 부채감이 완화된다. 이렇게 해서 증여는 도미노가 넘어가듯이 최초의 한 명이 시작하면 그 다음은 무한으로 연쇄되는 프로세스다.

일상의 징그러울 정도로 복잡한 특성을 품으려고 무지 애를 쓰면서도 그것을 담아내려는 ‘글쓰기‘는 많은 사람의 귀에 닿을 수 있도록 가벼움을 유지할 것. 나는 우치다 다쓰루의 학술적 글쓰기에서 이 ‘가벼움과 무거움과 복잡함을 동시에 품는‘곡예의 글쓰기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사상이라는 무거움과 난해함으로 점철된 것을 아카데미즘이라는 공간에서 끌어 내 세속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로 바꾸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전문가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난삽한 말로 그들만의 리그에서 철학과 사상과 예술 등을 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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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1-25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치다 타쓰루의 책을 좀더 읽고 싶어서 하나하나 담아보니 대략 30만원이 넘더군요. 쉽고 잘 읽히도록 쓴 그의 글들에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도 담겨있어 더 좋았습니다. 요전에 읽은 책에도 언급되었는데 무도가로써 자신의 지식을 실천하는 삶도 교육자다워 보였습니다.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 베터라이프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남은 한 주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베터라이프 2023-01-25 22:14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우치다 다쓰루 이 분이 일본내에서도 보기 드문 평화헌법 개정 반대자였습니다. 또한 역사 문제에 있어서도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했던 사람이고 리버럴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유독 상식적인 사람이죠. 더군다나 일본 사회가 나아갈 바를 끊임없이 제언하기도 해서 인간 교양과 교육 전반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일본어가 능통했으면 원서라도 사볼텐데 외국어 문맹이라 아쉽습니다 ^^;: 미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일 많으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