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 프리즘
크리스 베일 지음, 서미나 옮김 / 상상스퀘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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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앤드류 베일은 하버드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소재한 듀크대 사회학 및 공공 정책 데이터 과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떠오르고 있는 컴퓨팅 사회 과학 분야의 선구자로 미디어 데이터와 봇과 같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사회 심리학 및 극단주의와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으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베일의 이 논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반향실 효과와 그에 따른 오늘날 극단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인데요. 사실 개인적인 의문이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희망대로 많은 개인들의 삶에 깊게 파고든 페이스 북과 같은 SNS들이 작금의 극단주의의 베드라는 오명을 불식시키고, 보다 현실 정치에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합니다. 글의 도입부인 1장과 2장의 반향실 효과에 대한 이 연구자의 실험은 오늘날 SNS가 어떻게 극단주의자들의 요람이 되었는지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일례라고 생각하는데요.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이성에 따라 각자가 정치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판단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을 근본적인 양심의 존재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양심이 위르겐 하버마스로부터 기인한 귀족 사회의 '살롱 대화'가 공론장의 단초가 되었듯,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시민들 간의 활발한 정치적 토론은 체제의 건전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히틀러에게 상당한 영감을 안겨 준, 사실상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정치로 깎아 내린 '우둔한 대중'에 대한 대중심리학적 이론 전반을 앵무새처럼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인터넷 기반의 기술이 과거보다 월등히 발전한 시대에서 각각의 올바른 정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요소들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점은 '반향실 효과'를 통한 저자의 연구에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미 2장에서,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설명할 때 전후 인과의 오류를 범하고 부정확하게 합리하화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진술 자체는 아마도 인간은 누구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전제와도 맞닿아 있는 듯 여겨집니다. 더욱이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철학적인 접근에서 인간이 종래에 견지하고 있던 주의나 학설들이 나중에 그것이 오류로 밝혀진다면 각각의 개인은 이를 복기하여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어쩌면 번스타인의 주장처럼 그것이 가능한 일반 시민은 아마도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4장에서 저자가 풀어내는 '비이성적인 대중'에 대한 주된 분석이 현재 우리의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 시대는 시민들이 오랜 시간을 기울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을 하기도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관되게 주지되고 있는 이 극단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사례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 당의 정치를 단순히 극단으로 놓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개인적으로 약간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요. 또한 미국에 '극단주의적 좌파'가 과연 존재하는지도 매우 의구심이 듭니다. 다만,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정치적 진정성이 고작 한 사람으로 인해 건전성을 답보하기가 어려워졌고, 이런 일종의 반동 정치를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극우화 된 공화당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물론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지지하는 각각의 시민들이 정당의 기본적인 정책이나 정치적 의견 등과 관련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5장에서 이미 이론과 다른 현실에서의 왜곡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극단주의라는 광신적 종교 집단'은 양 당의 극단주의자들이 정치적 적수를 공격하는 계획을 짜면서 유대감을 강화하는 한편, 현재의 극단주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반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한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왜곡된 프리즘은 "자기 정당의 극단주의는 정상으로 여기고 상대 정당의 극단주의는 과장하는 식"으로 작동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SNS상에서의 옹졸하고 비이성적인 언행과 행위들은 결국 무대에서 중도와 온건주의자들을 전부 퇴출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카를 슈미트는 자유주의가 소위 만연된 사회에 대해 일종의 허무감을 섞어 경멸한 인물입니다. 특히나 이를 위해 그가 어떻게 유대인 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 냈는지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데요. 트럼프의 참모라고 불렸던 스티브 배넌이 트럼프의 지지자들에게 대화가 아닌 총을 들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미국 내의 극우 포퓰리즘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슈미트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정치를 혼돈으로 이끌고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으로 온건한 시민들을 사실상 구축하게 되었는데요. 미국 역시 오래전부터 정치 불신이 심각했지만 정치적 분별력을 잃은 많은 시민들이 극단주의에 경도 되어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자연스레 도태가 되지 않고, SNS를 기반으로 나날이 저변을 확대하고 있으니 이것을 곧이곧대로 '어리석은 정치'로 시민 사회가 함께 산화 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반쯤 농담처럼 마크 저커버그가 하루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프리즘에 비춰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아무리 온라인 상이라고 할지라도 내 언행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 없는데요. 문제는 8장에서 이미 저자가 꼬집고 있듯이, "현재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는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논의할 만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지난 2차 대전에서 극단주의가 몰고 온 참혹한 전체주의의 교훈을 벌써 망각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키케로가 이미 비슷하게 언급한 '이성적이고 명민한 시민들'이 정치적 토론에 대한 무엇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지만 현실은 다수의 온건한 시민들을 더욱 현실 정치에서 쫓아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더 이상 활개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최소한 대화 상대로 여기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극단적인 '대결주의'가 주류 정치의 핵심 사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극우와 다름없는 인종주의와 종교적 다양성을 잃어버린 기독교 근본주의가 점차 미국 정치 무대에 우세한 세를 과시하면서 무엇보다 미국 민주주의에 위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노엄 촘스키는 이에 대해 그나마 미국 사회가 상당히 열려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희망을 엿볼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저자의 제언대로 미국 사회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현재의 정치를 위해 전혀 시스템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대중들의 거대한 중우 정치'를 목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처럼 극단주의자들을 손 끝으로 부리는 선동가들만 남지 않은 정치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될지 두려울 따름입니다.



-7장에서 저자가 재런 러니어를 직접 대면한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러니어도 역시 작금의 소셜미디어가 양극화를 더 강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근시안적 사고방식을 일으키는 반향실에 갇힌다고들 말한다. 우리 편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노출될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념이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하다고 굳게 믿게 된다.

페이스북, 구글을 비롯한 거대 기업은 유저의 구미에 마즌ㄴ 정보를 더욱 많이 노출함으로써, 기존 가치관과 일치하는 정보를 찾는 유저의 본성을 부추긴다.

소셜 미디어 프리즘은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극단주의자들을 부추기는 동시에 정치 논쟁을 해 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도주의자의 입을 다물린다.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설명할 때 전후 인과의 오류를 범하고 부정확하게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가 나은 사회를 낯는다는 믿음은 유구하다. 개인이 다양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정립할 때 사회가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이 생각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페이스 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유저들이 실제로 가짜 뉴스를 분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가짜 뉴스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 논쟁의 불씨인데도 말이다.

유능하지 못하고 부정직하고 비도덕적인 타인과 우리 편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과정에서 자아 존중감은 자주 얻어진다.

우리가 페이스북의 플랫폼을 조금 수정함으로써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의 무례한 논쟁을 7.5 퍼센트 줄이는 대신 광고를 클릭하는 횟수를 5퍼센트 줄이는 방법을 안다고 가정하자. 과연 기업가들과 이사회가 이 방법에 찬성할까?

소셜 미디어에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극단적인 관점을 지닌 경우가 많으므로 그들에게 노출될수록 우리는 그들이 온건한 다수라고 착각하기 쉬워진다.

5장에서 설명한 극단주의자들은 광신교 집단 같은 공동체에서 상대방을 도발함으로써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대화가 역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플랫폼에서 얻는 지위가 고결한 목적과 연결된 소셜 미디어를 상상해 보자. 정치적 적수를 교묘하게 쓰러뜨려서 지위를 얻는 공간이 아니라, 양당 지지자 모두에게 호소력 있는 콘텐치를 만들어서 지위를 얻는 플랫폼을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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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다 - 촘스키, 다극세계의 길목에서 미국의 실패한 전쟁을 돌아보다
놈 촘스키.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유강은 옮김 / 시대의창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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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미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 사회철학자, 언어학자이면서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공공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언어학을 비롯 전쟁과 정치와 같은 주제로 대략 1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는데요. 그의 논저 대부분이 과거 베트남 전쟁 부터 미국 정부가 벌인 불법적인 전쟁을 포함하여, 주권 국가들에 대한 정치 개입까지 불사했던 역사, 기업 자본주의의 실체, 미국의 이중적인 자유주의에 관한 폭로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은 스스로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은 절대 지나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해왔던 일들인 네오콘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 기득권 세력들에게 그를 눈엣 가시처럼 여기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도 지식인의 책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요즘 자주 고민해 보게 되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제가 촘스키를 통해, 미국이 니카라과와 파나마, 그레나다에 벌인 추악한 짓거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저의 사소한 경험은 정부가 옳지 못한 일을 벌이거나 국민을 상대로 거짓을 유포할 때, 누구보다 지식인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인데요. 사실 많은 지식인 계층에서 자신들의 이익적 관점이 진실과 양심보다도 우선시 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범한 사회에 대한 배신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모쪼록 노엄 촘스키가 전세계 시민들을 위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열심히 하면서 보다 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은 원제, "Iraq, Libya, Afghanista, and the Fragility of U.S. Power"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23년 2월에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한가지만 언급하고 싶은데요. 많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저는 구입하는 모든 책을 알라딘을 통해 구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1만 5천원 이하 도서의 무료배송이 사라지면서 진짜 오랜만에 이 책은 다른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배송료와 관련해 과거와 달리 유료 배송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알라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한 달에 구입하는 도서가 그저 1~2권이 아닌 관계로 앞으로 구매시 배송비 부담이 있을 것 같아, '구매자 서평'에 얼마간 제 이름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촘스키와 함께 대담을 진행한 비제이 프라샤드는 인도 콜카타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평론가입니다. 특히 그도 역시 미국의 전세계 헤게모니에 대한 열망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책의 번역이 잘 된 부분도 있겠지만 프라샤드의 매끄러운 진행은 미국 정부의 전쟁 개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제기에 있어 촘스키에게서 자연스런 대답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 부분은 충분히 인상적었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나왔던 촘스키의 일관된 비판적 논증 가운데 하나로 특히, 미국이 벌인 정의롭지 못한 전쟁 개입에 대해 그것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 논저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지식인의 책무'라는 촘스키의 글에서 나온 내용이지만,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대의와 동기, 그리고 종종 감추는 의도에 따른 정부의 행동을 분석하는 위치에 있다"는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한창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해 전쟁중이었던 당시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철군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쟁 내각의 권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언급됩니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미군의 굴욕적인 철군으로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베트남화'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여기서 충격적으로 느낀 부분은 미국이 이미 "북베트남 폭격을 지휘하기 위해 라오스 북부에 전진 기지를 두고 있었다"는 진술이었습니다. 미국이 2차대전 당시 유럽에 쏟아부은 폭탄보다 3배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떨어뜨렸다는 사실은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뒤이어 나올 이라크 전쟁에서 이런 '폭탄 투하'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전혀 집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언급하자면 민간인 학살을 초래한 소위 '부수적 피해'에 대해 여기에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한 '미군판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이 필요하다는 부분에서 일정 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현재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뒤이어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 의해 진행된 제1차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초기 전쟁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폭격에 의해 이라크 민간인들이 거의 수십만이나 희생을 당했다고 글에서 언급됩니다. 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이라크 전쟁이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절대적인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알카에다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워싱턴의 비호를 가장 많이 받은 중동 정치인으로, 이란을 직접적으로 손보기 어려웠던 미국이 당시 후세인의 이라크를 통해 이란에 대한 전쟁을 획책했던 것인데요. CIA가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9.11 테러에 대해 일종의 '역류'라고 이해했던 것처럼 후에 브레진스키의 함정이라 불리는 소련을 고사시키기 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헤딘이 당시 펜타곤과 CIA에 의해 군사 집단으로 양성된 점은 이들이 나중에 '알카에다'의 전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앞선 맥락으로 미국이 키운 인물로, 워싱턴의 신호를 오판해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담이 몇 차례의 외교적 회신를 중심으로 끝내 '무조건 철수'를 워싱턴에 제의했지만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가 "이라크를 손 봐주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후세인에게는 전혀 퇴로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후세인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의 민간인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한 중대한 전쟁 범죄를 일삼은 전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이 독가스의 출처가 서구 국가들이라고 못 박고 있었는데요. 사실상 2번에 걸친 이라크 전쟁의 실체는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의 석유 패권 유지와 함께, 미국의 월등한 군사력을 아주 확실하고 단호하게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워싱턴을 막후에서 쥐고 흔드는 네오콘이 내심 전세계에 주장하고 싶은 내용과 다름없는 럼스펠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미국의 예외주의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복을 교섭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 모든 이들을 겁먹게 만들고, 더 많은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는 발언도 다소 충격적이지만, 9.11 이후 미국 정부가 지목하여 대대적으로 이뤄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 사령관에게 저쪽 마을에 탈레반을 지지하는 놈이 있다고 귀띔만 하면 미국이 보낸 특수부대가 한밤중에 주민들의 집에 쳐들어가서 모욕을 주고는 남자들을 데려와서 고문실로 보내고, 멀리 쿠바 관타나모까지 보낼 것"이라는 폭로도 왜 미군에게 '뉘른베르크 재판'이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의 개입은 무엇보다 해당 지역의 '민주주의적 재건'을 위해서라고 그것의 명분을 미국의 관료들이 밝히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촘스키는 "다른 나라의 자유란 그 나라의 정치 지도부가 미국의 전반적인 의제를 충실히 따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다"고 일침합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 있어서 만큼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과 다소 일맥상통합니다. 일전에 브루스 커밍스는 아시아 지역 내에 국제 회의에 미국 국무부 장관이 양쪽에 한국과 일본의 외무 장관을 대동하고 나타나 한국과 일본이 어느 정도까지 미국에게 종속되어 있는지 잘 드러낸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와는 약간 상이한 내용이겠지만 "미국이 뒤를 봐주는 세력이 이웃 나라를 침공하는 것이 별로 대단치 않는 일이라고 세계를 설득하는 것"의 남모를 섬뜩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저 대목에서 아마 거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국의 영향력에서 우리가 벗어나려고 한다면 아마도 미국은 일본을 통해 우리를 손 보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처럼 촘스키는 대대적인 전쟁 수행을 통한 미국의 패권 추구가 일종의 '대부'식의 폭력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소위 마피아 식의 미국이 각 국가들에게 명령을 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과거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에 사실상 전세계에 정착된 '주권 존중'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무시하는 체계입니다.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 민주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사건은 이러한 체제의 변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콜롬비아에는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감행하고, 남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노골적으로 반대한 베네수엘라의 좌파 정권에는 철퇴를 내리는 그런 마피아 식의 외교는 단순한 희화화라고 할지언정 그것의 설득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미소 간의 냉전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력 역시 소련에 의해 제한을 받은 것인데요. 이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체제에 반대하는 중국과 이란의 존재는 앞으로 촘스키의 예언대로 다극 체제의 시발점이 될 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대해서는 실제로 반대하는 편인데요.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서로 상극인 것을 감안한다면 중국 주도의 국제 체제는 우리에게 지옥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촘스키가 현재 중국의 입장에 대해 다소 온건한 입장으로 글을 쓰고 있는 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화웨이를 비롯한 사실상 중국 정부에 의한 스파이 활동에 대해 이것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조금 의아하기도 했는데요. 미국과 중국 모두 전세계를 절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핵보유 국가들로 이들의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은 아마도 과거 미소 간의 냉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일 겁니다. 더욱이 과거 냉전하에서는 거의 성공적으로 소련과 중국을 갈라 놓았다면 글에서 촘스키가 비관적으로 예상하는 것처럼 어쩌면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워싱턴에서 암약하고 있는 네오콘들이 러시아와 중국 모두와 싸우기를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핵무기에 의한 군사적 우위를 이들 핵보유국들이 전혀 철회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아주 좋지 만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촘스키는 만약 이란이 자국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기 위해 국제적인 테러 작전을 실행한다고 했을 때, 미국 정부는 아무런 화답도 없이, 그냥 이란을 핵무기로 쓸어버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점이 바로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주도한 불법적인 개입의 진면목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촘스키는 조지 W. 부시를 가리켜 '미치광이'라고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여러 평론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시 네오콘들에 의해 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당최 알 수가 없습니다. 



탈레반은 이미 1998년에 호스트 Khost의 표적을 겨냥한 미국의 소규모 공격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군의 어마어마한 힘을 익히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힘의 원천 - 금융,군사,외교,문화 - 을 보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런 힘을 휘두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상대적 약화 때문에 중국이 중요한 세계적 강대국으로 등장할 여지가 생겼다.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대의와 동기, 그리고 종종 감추는 의도에 따른 정부의 행동을 분석하는 위치에 있다."

선생님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다며 해외 군사 개입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썼는데, 사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근거로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란이 자국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기 위해 국제적인 테러 작전을 실행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미국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주요 인사와 우연히 그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이 이 작전의 부수적 피해자로 간주될 겁니다. 이란이 그렇게 했다면, 미국이 뭐라고 할까요? 우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핵무기로 쓸어버릴 테니까요.

영국은 미국의 조치에 반대했지만,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준수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대로 따랐지요. 유럽 나라들은 유엔에서 과감하게 미국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지만 미국의 제재를 준수합니다.

이런 목적에 펜타곤 시스템이 안성맞춤으로 여겨졌지요. 이 시스템은 국민에게 많은 비용 부담 (연구개발R&D)를 안기면서 과잉 생산에 보장된 시장을 제공해서 경영진의 결정을 유용하게 받쳐줍니다.

미국의 이데올로기에는 미국 예외주의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국은 자애롭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는 개념이지요. 이 개념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된 실제 역사적 기록이지요. 또 하나는 예외주의가 미국의 독특한 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사상 강대국들은 대개 자국이 이례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미국도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기본 구상은 미국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미국의 세계 설계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주권 표명도 용인하지 않는 이른바 대권역 Grand Area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미국은 어떤 경쟁자도 허용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설령 이라크가 아스파라거스를 생산하고 원유 생산 중심지가 남태평양에 있다 하더라도 미국은 어쨌든 민주주의를 안겨주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게 언론과 학계를 가로질러 거의 한목소리로 말하는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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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2-24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님 잘 아시겠지만 지금처럼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한혐을 부추기고 역사를 왜곡하는데에 미국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얼마전 한 방송에서 731부대 주동자들이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후 한 자리씩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나 싶었습니다. 미국은 부시 부자의 악행도 그렇고 권력을 악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도 일단 찜해두어야겠어요!!

책값도 계속 오르고 무료 배송 기준이 올라 가성비 좋던 독서도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실감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2-24 15:23   좋아요 1 | URL
이 지역 내에 중국의 대두가 아무래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 꽤 오래전부터 워싱턴은 일본의 재무장을 거의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일본의 평화 헌법이 걸림돌이었으나 이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된 셈이지요. 사실 731부대와 관련해서는 한가지 음모론을 알고 있는데요. 2차대전에서의 일본 패망 당시, 소련군이 만주에 있던 일본이 세운 기간 시설들을 전부 다 일일이 해체해서 소련으로 이송하고 있었는데, (이 점은 거의 팩트입니다) 731부대 고위 관련자들이 수많은 인체 실험 자료를 소련에 넘기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미국에 제공했다는 썰(?)이 있습니다. 물론 진위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지요 ^^;;

이번 우리 정부가 이 시점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물타기를 아주 잘해야 하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일본이 이미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우리가 미국에게 일본 정도의 배려를 받을 수 있을지 이 점도 어려운 부분인데요. 중국 봉쇄를 위해 일본이 주도하는 소위 동맹 체제에 우리가 하위 그룹으로 참여하는 것은 앞으로 정말 큰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진짜 1만원 이상 무료 배송이 사라져서 정말 큰일이네요. 저는 가급적 구입 도서는 알라딘을 통해서 구매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만5천 이상 무료배송으로 바뀌니 이게 정말 난감해졌습니다. 사비 들여 독서하는 독서인들에게는 이런 문제는 제법 예민해지거든요 ㅜㅜ 저는 또 밑줄과 메모 대마왕이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수도 없습니다. ㅠㅠ 하여튼 미미님도 좋은 하루 되시고 다가오는 주말 행복하게 맞이하세요 ^^



미미 2023-02-24 15:51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본 방송에서도 731부대 자료들이 미국으로 상당부분 넘어갔다고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부대 주요 직책들이 한 자리씩 차지할 수 있었겠죠. 메모 대마왕이시라니 베터님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돕는 설명의 비결이 그거 였군요! ㅎㅎㅎ 불금과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

베터라이프 2023-02-24 16:01   좋아요 1 | URL
약간 주객전도 같은데 좀 더 정확한 서평을 쓰고자 책에 메모와 중요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되었죠. 예전에는 책이 혹여 구겨질까봐 애지중지 신주단지 모시듯 읽었는데 이렇게 밑줄을 팍팍 그으면서 읽으니까 과거에 그런 행동이 정말 부질없게 느껴지네요 ^^;; 너무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서평을 엉망으로 쓰고 있어서 수많은 독서인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닌가 매번 잠들 때 마다 걱정합니다 ㅠㅠ 미미님께도 해당되는 내용이지만 책 좋아하는 분들과 나누는 대화는 항상 즐겁습니다. 미미님도 즐건 하루 되시길요 ^^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시민 교양 신서 1
제러미 벤담.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홍섭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2월
평점 :
일시품절


우리에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와 판옵티콘으로 잘 알려진 제레미 벤담은 현대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는 진보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유주의의 첫 단추를 꿰맸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벤담은 부유하지만 보수당을 지지했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신동으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지금 나이로 갓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에 그는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해, 이후 영국의 유구한 공립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들어가는데요. 1760년, 12세가 되던 해에, 옥스포드의 퀸스 칼리지에 들어갔고, 1764년에 학사 학위를, 1767년에 석사를 마치게 됩니다. 바로 학업을 마치고 1769년에 부친과 마찬가지로 변호사로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변호사 생활과 당시 영국 법에 크게 실망한 벤담은 1776년부터 논쟁적인 글쓰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날까지 공리주의와 관련해, 그로부터 수많은 '벤담주의자'들을 양성했고 '판옵티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후에 미셸 푸코에 큰 영감을 안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으로 1879년 출간되었고, 여기에 '런던 앤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실린 존 스튜어트 밀의 1838년 '벤담론'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 뒤이어 옮긴이의 해제가 담긴 마지막 장(章)으로 책의 구성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국내 번역은 2018년 2월에 이뤄졌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들이 어느 정도는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공리주의에 대한 복잡한 단상을 차치하더라도 이제 흔들리지 않는 체제로서 자리매김한 자본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이 무엇보다 이기적 존재이기에 '권력을 가지지 못한 다수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사회가 실패한 것은 거의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벤담을 제법 분석한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자면, 사실상 벤담이 반쪽 정도의 진실 만을 수용하여, 온전한 철학적 추론이 아닌 상태에서 공리성을 도출한 것은 사뭇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는 고통과 쾌락이 인간 본성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주인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고통과 쾌락이 인간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추동하기에 이른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리성에서 개인의 행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다수의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 일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밀의 벤담론에서 도출된 벤담의 도덕성과 도덕론이 자신이 제시한 도덕 감정 moral sense에 비추어 본다면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나 싶은데요. 인간에게 존재하는 도덕 감정에 대한 벤담의 빈약한 설명은 밀의 말마따나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이는 벤담이 '금욕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고려해 봤을 때, 소위 도덕주의자 그룹에 대한 일종의 벤담의 분류가 공리성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추론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밀의 근거있는 주장처럼 인간에게 있어 도덕이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제가 많이 언급했던 존 듀이의 입장과도 동일합니다. 반대로 벤담의 논증에 따르면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지식을 넓히지 못하여 편협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통렬한 평가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후천적인 교육 자체가 어느 정도 개인에 따라 능사가 아님을 강조하는 점도 한편으론 근거가 부족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참고로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밀의 '벤담론'은 영국 사법 제도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기존 제도에 대한 그의 개혁적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그가 당시 사회 각 분야와 더불어 학계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전반적으로 벤담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밀의 가감 없는 평론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제가 벤담에 대한 밀의 신랄한 비판 중 가장 눈에 들었던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벤담이 어느 정도 인간 관계가 협소한 소위 우물 안의 지식인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과 희노애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공리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행복'을 언급한 것이고, 두번째로는 벤담론에서 수차례나 언급되고 있는 '인간 본성의 부족한 이해였다"는 평가입니다. 따라서 밀이 벤담에 대해 말하는, "그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의 위대한 개혁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일견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이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벤담은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사상가였지만, 그의 독특하고 현실 비판의 여러 중요한 주장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상반된 생각을 갖고 철학자들 혹은 사상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자신의 주장에서 보다 오류를 줄이는 과정이 벤담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그가 구조적으로 모순이 있는 사회 체제에서 개혁가의 입장으로 자신의 철학적 사고에서 추론한 인간 문제들을 그런 식으로 주장을 펼쳤던 점은 어느 정도는 센세이셔널한 평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밀의 이런 직접적인 평가는 아마도 지근거리에서 벤담을 지켜봤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요. 어떤 주장에 대한 의견 차이는 서로 간의 토론을 통해서, 나와 상대방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닌 것을 규명하는 것은 단순히 말의 오고 감이 아니면서 그저 상대방을 구슬리기 위한 방편도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벤담의 철학적 추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행위의 철학에 세부 분석의 방법, 즉 부분으로 분해하고 나서 전체를 추론하고 실제 사실들로 해석하고 나서 추상적인 것으로 추론하는 방법"은 벤담의 소위 학문적 탐구 방법의 요체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쾌락과 고통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과 상당한 분류법은 그만큼 벤담의 주제를 탐구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독착정이라는 점을 다분히 반증하다고 여겨집니다. 

밀이 자신의 비평을 통해 벤담의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인식적 한계를 비판한 부분에서, "다양한 인간 성격을 인식하지 못했던" 벤담이 과연 공리성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본성의 차원에서, 오로지 '행복 추구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논증을 강화한 것은 개인에 따라 너무 단순한 논리적 전개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밀의 약간의 도발적인 언급대로 공리성이 일전에 키케로에게서 언급된 개념임을 차치하더라도 공리성에 근거한 벤담의 세계관이 "세속의 이해타산과 겉으로 드러나는 정식성과 선행 가운데 더욱 명백한 몇몇 규칙을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는 개인 행위에 아는 바가 없다"는 비판 역시 밀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벤담이 강하게 주장하는 공리성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한 충분한 사례가 분석되어 기록되어야 했지만 독자들이 보기에도 그런 과정이 사뭇 부족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밀은 바로 이런 한계점에서 공리성에 기반한 벤담의 사상의 대부분의 맥락이 당시 법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소위 '개혁가'로서의 체제의 비판자라는 날선 평가가 어쩌면 그에 대한 분석의 전부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벤담의 공리를 있게 한 '도덕성의 토대'와 그것의 근거들이 어느 정도는 철학의 역사, 일반적 문학 등에 기반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행복과 공리성이라는 자신의 논증에서 종교적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상당히 높이 살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밀은 "벤담에게서 도덕적 올바름 moral rectitude나 도덕적 의무 moral duty 등의 부족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들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찬성 또는 반대라는 감정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듯하다"고 판단합니다. 더욱이 인간 본성의 도덕적 측면이 다른 어떤 이상이나 그 자체를 목적 삼아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인간 본성의 하나의 사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벤담은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끌어 내는 이러한 깊은 감정들을 또한 애써 무시했거나 취급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이를테면 명예와 개인의 위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행동에 대한 사랑, 편안함에 대한 사랑과 같은 우습지만 인간 내면에 침잠해 있는 본질적 욕망 같은 감정들을 말합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철학적 진실에서 반쯤은 결여되어 있는 벤담의 사상들이 후세에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결핍을 반면 교사로 삼을 수 있다는 점과 "과연 벤담 정치철학의 이 근본 원리가 법에 대한 이해를 제외한다면 과연 보편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뭔가 고민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인간이 다수파의 절대적 권위 아래 있는 것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그것이 좋은 걸까?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주제가 된다고 여겨지는데요. 인간은 마땅히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의 이익과 행복으로 귀결되는 공리성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성을 답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도 과연 통하는 질문인가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벤담이 추동한 이 특별한 공리주의는 시민들이 기반이 되는 법의 지배와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의 정당성에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을 접한 고상한 사람들의 인식과 반대로 일반 대중이 쉽게 지식을 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에 지성이 편협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전반적인 금욕주의의 원천에 대한 분석은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일반 대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소위 다양한 지식을 접해 본 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마땅히 나서서 통치할 수 있다는 벤담의 근거 역시, 단순히 일개 개인이 바라보는 일종의 계급적 인식 따위에 국한된 감정은 아닐겁니다. 어쩌면 뒤에 출현할 대다수 평균적인 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득권 계층의 당연한 화답일수도 있겠는데요. 이것은 다소 불쾌하지만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만일 그 당사자가 일반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행복이 될 것이고, 그 당사자가 특정 개인이라면 그 개인의 행복이 될 것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존재 중 10분의 1만이라도 금욕주의 원칙을 일관되게 따르게 해보라. 그러면 그들은 하루 만에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너무 사소하고 전혀 해가 없는 것이어서 이 원칙으로도 처벌할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은 상상해 볼 수가 없다. 어떤 취향의 차이이든, 아무리 사소한 불일치라 할지라도 인내를 힘들게 하고 언쟁을 심각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는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신의 의지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철저히 확신할 수 있다.

만일 반감과 같은 감정을 무조건 따르면, 그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실제로 아주 자주 그런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행위의 유일하게 올바른 근거는 결국 공리성에 대한 고려일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인류가 자기 자신의 이익에 관해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이 모든 이론에는 인류의 관행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만이 들어 있다.

위법행위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런 쾌락 가운데 어떤 것을 틀림없이 파괴하거나 이런 고통 가운데 어떤 것을 틀림없이 낳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헤롭기도 하고 처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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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에서 극우로 - 공화당의 추락과 미국 정치의 위기
김평호 지음 / 삼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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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언론 기사에서 '싸움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어울릴 것 같다는 김평호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는 현재 저술 활동과 활발한 언론 기고를 통해 대중을 만나고 있는 늦깎이 학자입니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MBC PD로 10년 넘게 재직했는데요. 특히나 김평호 교수는 언론 노조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이후 1994년, 영국 사우스햄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6년 8월에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정보통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4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요. 김평호 교수를 뭔가 만학도라고 언급하기는 그렇지만 언론계에 있다가 늦은 학업을 시작하여 끝내 대학 교단에서 학자로 자리매김한 이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연히 언론계에 몸담았던 인물이니 만큼 앞으로도 우리 언론에 대한 쓴소리들을 가감 없이 해줬으면 합니다. 그의 이 책은 같은 제목으로 2022년 8월 출간되었습니다.

2021년 1월 6일에 있었던 '무장한 괴한들의 의회 난입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의 묵인과 지원하에 그의 지지자들이 불법적으로 의사당에 난입한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였습니다. 이들의 명분은 '미국 대선의 부정 선거'였는데요. 만약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면 아마도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미국 연방 정부가 직접적인 테러에 노출되어 양자 사이에 총격전을 비롯,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을 겁니다. 이처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많은 미국 백인 남성들 내면의 저열한 본성을 자극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은 극단주의자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심성의 가장 사악한 면"에 호소했다는 식으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 문구를 보자니 전에 서평을 썼던 벤저민 카터 헷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의 한 인용문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나치의 선동은 인간 내면의 저열한 부분에 끊임없이 호소한다"는 문장이었습니다. 실로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은 이처럼 인간의 추악한 면을 자극해 어떠한 정치적 양심 없이 다수 시민들의 폭력적인 본성에 기반한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이용한다는 점에서 극히 파멸적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인간의 극단주의적 본성이 원래 타고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끝없이 자극하여 사회를 분단시키고 시민들이 진실과 더욱 멀어지는 이런 상황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김평호 교수의 이 글은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극단주의 정치가 단순히 공화당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이와 같은 정치인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1980년대부터 왜곡된 싹이 미국 정치 무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약간의 개론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저자가 논증하는 내용들 자체가 크게 새로울 것이 없겠는데요. 다만 신자유주의와 관련해, 기존의 판에 박힌 주장인 "신자유주의는 실체도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점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분들께는 이 책의 내용이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미국의 정치, 그러니까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역사와 토대로 봤을 때, 그러한 정치적 건전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있는 분들께도 적잖이 반감을 살 수 있는 내용들일 텐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사회에 역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이행과 관련해, (어쩌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하는 현실 자체도 다소 웃기는 일이긴 합니다만.

저자는 오늘날 미국 정치 경제적 사회 담론을 아우르며, 주도적으로 이행되어 소위 권력을 갖고 있는 체제를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의 맥락이 글의 주된 출간 목적이라 여겨집니다. 더불어, 섣부른 제 추측일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미국 정치를 통해 우리의 보수 정치를 가늠해 보려는 시도로도 읽혔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저자의 이 글은 우리에게 충분히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행정부 이후로 미국의 국익과 세계 패권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규정했던 신보수와 "신자유주의적 탈규제가 초래한 미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 결국은 기존 기득권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갔으며, 과거에도 지금에도 제대로 된 정치적 진보 세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미국 정치가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의 삶과 다인종 사회 상황에서 극단적인 인종주의를 강화시켜 왔는지 저자는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데요. 단순히 아메리칸 드림을 떠나서, 종래의 이민 정책에 대한 저학력의 백인 남성들의 극단적인 인종적 혐오는 현재 삶의 어려움을 그 주범인 신자유주의 때문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 탓으로 돌리며 사실상 사회를 분열 시키게 됩니다. 이것을 아주 극적으로 조장하고 자신의 이익으로 삼은 정치인은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였습니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만들어 놓은 정부와 사회의 협력 체제인 소위 '뉴 딜 체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공화당과 그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에 의해 무력화 되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 삶의 안전망을 위해 각종 제안을 숙고하는 것이 미국인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자유'라는 가치에 어떠한 불법적인 양태가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신보수와 신자유주자들의 결합 자체는 '작은 정부론'에 입각해, 중요한 사회 부조를 사회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에 데이빗 코츠의 요약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모순은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정부의 지출을 저어하면서도 군사비 지출에 있어서는 방산 업체를 위해 지속적인 정부 지출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가증스런) 논리를 강화한 것인데요. 여전히 정부의 보호가 필요한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서 정부 지원을 끊어내고, 이와는 반대로 방산 업체에게는 막대한 정부 자금을 투입하게 하는 이런 모순적인 입장에 대해 후에 자신들은 잘 모른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1980년대 이후 도정된 이런 신보수-신자유주의의 양대 체제가 결국에는 미국인들의 민주주의에는 하등 이득이 되지 않았는데요. 작금의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 극우에 경도 되었고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만큼에 비례해 다수 시민들의 삶에 사실상 '자유 지상주의'를 강요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란, 모두에게 균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회적 자원을 보유한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의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미국 정치 자체는 현재의 유럽 정치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여기에는 많은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교육계에 '기독교적 창조론'에 막대한 로비자금을 투하하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지금의 사태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는 전혀 시들지 않고 있는 '티파티 운동'을 적잖이 소급해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티파티 운동 자체가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비롯된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과 같은 정교 분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정치권에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더 나아가 정치 자체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를 백번 양보해서 이들의 양심이나 선명성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본질상 사회 매커니즘에는 좋은 영향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신앙의 자유 자체는 어느 국가에서든 스스로의 양심에 맡겨야 하며, 이를 사회적 영향력을 재고하고자 코크 형제와 같은 막대한 부를 가진 자본가들과 결합해서 직접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이것이 미국과 같은 대규모 로비국가와 만났을 때, 건전한 공론장이 아니라 사회적 쟁점이 되는 부분에서 여론 몰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하하는 것은 그것이 어찌됐든 종교의 견실한 역할은 아닐 겁니다. 더욱이 종교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연방 정부와 사법부에 영향력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도 실로 금권 정치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에는 앞선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무런 성찰 없이 결합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를 서서히 말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를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신보수-신자유주의-기독교 근본주의'로 그려지는 소위 삼각 체제는 미국에 있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일전에 코리 로빈의 글에서도 현재 미국 사회에 있어 중요한 단초를 얻기도 했는데요. 2008년 이후 미국 중산층들 대부분이 기성 정치에 눈과 귀를 닫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 헤지스의 미국 정치의 정치 경제적 양극화라는 측면의 언급은 미국 정치가 더 이상 건전하지 않다는 증거일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오래된 공리주의적 전통이 미국 정치에서는 사실상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미국의 연방주의는 표면적일지라도 견고하고 동시에 얼마간의 분권주의적 관념 역시 많은 계층에서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미국에 의한 '자유주의적 패권'이 전세계에 불협화음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고, 현재 중국의 대두로 미국의 패권이 위협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자유주의적 개입이 과연 전쟁을 방지할 수 있을지는 대체로 불명확해 보입니다. 앞선 부분에서 저자가 약간 의구심을 갖고 있던 신보수-신자유주의의 결합은 이미 미국 정치가 리버럴을 포함한 우파 대부분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해 보면 양자 간의 결합은 의심할 바가 없어 보입니다. 2008년 이후에도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 혹은 "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듦련 안된다."는 식의 자유 지상주의가 미국 사회에서 불식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


-1933년에 시도되었다고 알려진 '월가의 반란'에 대해 이 책에서 상세히 서술된 점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뉴 딜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 또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화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자유 지상주의자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더 줄여 말하면 극우 행동대원들은 현장에서 소란을 벌이고, 부통령과 의원들은 그사이 2020년 선거를 뒤집어 트럼프의 집권 연장을 꾀했던 것이다.

전체 271명의 공화당 상하 의원 중 과반이 넘는 무려 145명이 2020 대선은 부정 선거라며 추인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쿠데타의 주범임에도 전혀 부끄럼 없이 여전히 선거 부정을 외치는 트럼프, 그를 따라 ‘도둑맞은 선거‘라는 거짓말을 소리 높여 합창하는 공화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의 행태는 미국의 정치, 미국이 상징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낸다.

그러나 트럼프가 중요한 이유는 무자격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백인들의 분노가 상징하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흐름 때문이다.

그(트럼프)는 주류 보수주의가 감추고 싶어 했던 권위주의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태도 그리고 백인종주의를 오히려 공개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아들 중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 조직의 규모, 실질적 영향력 등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단체들은 흔히 ‘우익 삼두마차 (Right Troika)‘라고 불리는 ‘미국 입법연대(ALEN : American Lesgislative Exchange Network)‘,‘주청책연대(SPN : State Policy Network)‘그리고 ‘미국번영재단(APF : American For Prosperity)‘이다.

안보 강경론의 핵심은, 미국이 제국적 지위를 갖는 것이 자신은 물론 세계 질서에도 긍정적이기 때문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강경한 대외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모순의 집약체이고,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는 수미일관한 이론적 틀을 갖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보수를 표방하는 여러 사회,정치 운동의 모자이크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들면 안 된다‘,‘뉴딜은 사회주의 정책이다‘,‘공산 제국을 확대하려는 소련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등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쟁의 명분도 거짓이었고, 참혹한 전쟁의 실상과 추악한 미군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미국이 취해 온 반공주의의 정당성, 나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도 훼손되었다.

골드워터는 이후 미국 보수의 정책 노선이자 공화당이 취한 선거 전략의 첫선을 보였다. 그는 흑백 차별 문제는 각 주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연방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민주당이 추진한 1964년 흑인 민권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본래 공화당은 북부의 개신교, 노동자, 화이트칼라 전문가, 기업, 농민, 흑인들까지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2차 산업혁명 이후 점차 상층부 지배 엘리트와 자본가들의 정당으로 변하게 된다.

이들이 보기에 여성 운동, 동성애자, 낙태, 포르노 등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거의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죄악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극우 미디어, 백인종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극우 테러 등은 차별과 배제를 기본으로 하는 매우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즉, 자유는 상호 지향적이며 개인의 차원을 넘는 공동의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자유는 강자의 것이 되고 사회는 억압의 틀로 기능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요구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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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새 번역) - 불평등과 능력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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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남부 솔즈베리 출신의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내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치 경제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불평등으로 심화된 현재의 자본주의에 있어, 경제학에 대한 그의 철학적 접근도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짐바브웨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에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비롯, 그것의 산파가 되어버린 민주주의 전반의 사회비판적인 논저들을 왕성하게 출판합니다. 참고로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문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으로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Equaility"로 지난 200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초도 번역이 2006년에 있었으나 최근에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가치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두 가치에 대한 표면적이 이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진실에 근접한 설명이라면 자유 못지 않게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가 평등이며, 현재로서는 평등의 실현이 매우 요원한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인 내면화에 원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노엄 촘스키는 "경제의 합리주의가 체계화되어 강요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가 있다고 강조했고, 버틀란드 러셀 역시, "시민들이 자본주의를 영속적인 체제로 여기는 것을 다소간 지양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요. 이 부분과는 약간 상이할 수 있지만 캘리니코스의 이 '평등'이라는 소책자는 정의와 밀접히 관련된 평등에 대한 질문으로, 3장에서 존 롤스, 로널드 드워킨, 아르마티아 센, G. A. 코헨, 데이비드 밀러 등의 이론과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 길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도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의 초도 번역인 2006 번역판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이번에 새로 번역해 출간한 책을 구해 읽어보니, 새삼 역자의 노력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과 관련된 캘리니코스의 날카로운 분석이 담긴 3장 전체는 저같이 평범한 독자가 보기에도 일독이 대체로 수월했는데요. 아마도 이점은 역자의 온전한 노고라고 여겨집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의 원인은 앞서 언급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내면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사회 체제 전반을 그러한 (모든) 거래에 아주 딱 들어맞게끔 소위 사회 개조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데요. 여기에는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막대한 자본가들에 의해 현재의 착취와 다름없는 시민의 파편화를 오랫동안 유인해 왔습니다. 이는 2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고 강조하는 데서 오늘날의 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랫동안 사회를 좀먹었던 18세기 이전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등장한 자유주의가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등으로 계급화 되어 현재의 자본주의적 계급주의 시대로 왜 변질될 수밖에 없는지, 그에 대한 추론도 이 논저가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런 연유로 더이상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에 화답하지 않는 소위 분절된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시장 자유만을 강조하며, 그것을 통한 일종의 거의 근거 없는 유토피아를 시민들에게 세뇌시켜 왔습니다. 즉,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시장에서의 개인과 개인간의 상품 거래가 서로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든다는 그들만의 사회경제적 맥락을 끊임없이 사회에 주입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4장에서도 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과 같은 자유주의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서로 화해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는 당면한 문제 해결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수입의 문제는 어느 정도 사활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단순한 소득 향상을 통한 부의 축적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남들과 구별되는 부의 존재는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많은 부를 보유한 사람을 그저 돈이 많다는 이유 만으로 숭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터무니 없게도) 인격적으로 혹은 내면적으로 갖춰진 인물로 사회는 그리 이해한다는 것인데요. 결국 이러한 사회 인식적 메커니즘은 더욱더 개인과 개인을 경쟁하게 만들고 최후의 승자가 더 많은 돈을 따게 만드는 일종의 약육강식과 같은 체제의 견고화로 이어진다는 부분입니다. 이는 무덤에 있는 허버트 스펜서가 이와 같은 현실을 '과학의 치밀한 입증' 정도로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겠지요. 바로 이러한 현실 가운데 전반적인 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전방위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되는 부분은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많은 시민들은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고, 그런 측면에서 캘리니코스가 인용한 리처드 헨리 토니의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의 금전적 소득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잉여 자원을 아껴 써서, 사람들의 소득 차이가 하찮은 문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상의 사회 변혁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평등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좌파라고 말하는 자들의 모순과 오로지 시장이 전부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해는 양자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는 것에 동의하거나 혹은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양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적 이행을 비롯해, 평등에 이데올로기적 색깔을 입혀, 사회에서 마땅히 터부시 하게 만드는 것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이는 결국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과 난잡하면서도 매우 순진한 생각을 가졌던 존 롤스와 같은 낭만적인 이론가가 서로 공존하게 된 연유이기도 할 텐데요. 뿐만 아니라 샹탈 무페가 비판했던 1980년대 이후, 진보주의 좌파가 몰락할 수밖에 없던 이유와 그로인한 파급이 시민들에게 어떠한 파국을 초래했는지 이젠 모두가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프리드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완벽한 시장 관념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비합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거의 증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인데요. 과거 공리주의를 포함한 많은 학설들은 "개인은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전제를 거의 의구심없이 맹신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능력주의 meritocracy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에 있는 것인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평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배격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캘리니코스가 분석하는 롤스의 근본적인 사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보다 '기회의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더불어 사회적 복리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행이 선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장에서 기여와 시장의 보상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인 기업 실적이 악화되는 경우에도 오히려 경영인의 봉급과 스톡 옵션이 올라가는 상황은 단순히 '시장의 배신'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와 실질적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의 거부를 넘어, 이것은 체제 전반을 흔드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의 욕망이 그저 선하고 순수하다는 앵무새 같은 발언을 이제는 무슨 사조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시장 전반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들 전반이 무엇보다 시민의 감시하에 있어야 한다는 점은 민주주의의 대의와도 연결됩니다. 이는 확실히 2008의 대위기를 초래한 수많은 경제 엘리트들이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자금 잔치를 벌였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이 더욱 규제를 받아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초반 캘리니코스의 논증대로 많은 자유주의 이론가들도 이러한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에 대한 담론을 그저 단순한 구호로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평등을 위한 사회적 담론과 그에 따른 여러 실천 방안들이 종래의 신자유주의의 광범위한 양보를 이끌어내야 하고, 신자유주의가 더이상 민주주의를 좌지우지 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와 시민들이 그러한 공감대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평등에 대해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고를 보이고 있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약점이 자본주의 시정경제 틀 안에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과신하는 점일 겁니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캘리니코스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적으로 다룬 것은 많은 사회가 시민의 실질적인 평등을 위해 좀 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잉여 노동을 통한 이익 전반을 손에 쥐고 있는 자본가들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정상화로서, 이들에게 정당한 세금을 부여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적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편도 민주주의가 스스로 평등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분석되고 있는 캘리니코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비판과 역간 별개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이 신봉하는 이념에 밑에 두고 그저 민주주의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그저 '베드'로 여기는 등의 오랫동안 수단으로만 삼아온 점에 더 많은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콜린 크라우치나 데이빗 코츠를 통해 접해온 자유주의(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겠지만)에 의한 민주주의를 옭아맨 종속적 이행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함께 공유하고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좀 더 시장 자유주의로부터 독립시키고, 더 나아가 시장이 민주주의적 통제에 놓이게 하여, 이것이 더 이상 구호에 그치지 않게 하는 데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지 파파차리시가 자신의 논저를 통해 도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개념이 이처럼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로지 자유 만을 위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는가에 있어 앞으로 그러한 이행 과정이 다음 세대, 그리고 더 다음 세대의 삶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접한 자칭 보수 우파 이론가인 변희재씨가 유튜브 모 정치 대담 영상에서 이언주 전 의원을 사실상 '자유주의 우파'로 통칭한 것에 대한 일정 부분의 맥락을 캘리니코스의 이 책을 통해 다소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변씨의 본래의 여러 주장들을 다 같이 수용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은 귀담아 들을 만 했는데요.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본래 의미에서 상당히 왜곡된 점은 아마도 사회에 내면화 된 자본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마스 네이글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난한 사람이 더는 다수가 아닌 곳에서 민주주의는 포괄적 평등의 적이다."

즉, 부유층의 소득이 빈곤층보다 훨씬 빨리 증가한 나라에서는 다수의 상대적 가치가 반드시 향상되지 않더라도 평균 소득은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선진국에서 발견되는 불평등은 대체로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시장경제에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보비오는 근본적으로 옳다. 만약 좌파가 평등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도 좌파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도 사회정의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고 시장을 규제하는 것을 지지한다(그러나 시장을 폐지하는 것은 지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

즉 도덕적 담론은 지배적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을 반영할 뿐이라는 견해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함의는 모든 사회형태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 원칙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계급 분열이 초래한 주된 해악은 부와 소득에 따라 개인을 평가하는 경향을 낳은 것이다.

즉, 모든 사회적 [기본] 가치(자유, 기회, 소득, 재산, 자존감의 기반)는 이 가치들의 전부나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최소 수혜자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돼야 한다.

불평등과 빈곤이 극심한 상황에서 최소 수혜자들의 선호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성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요구는 저마다 소유한 자원이나 기본적 재화를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고,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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