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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효과 ㅣ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이정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1년 6월
평점 :
현재 동명대학교의 광고PR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인 이정기 교수는 같은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후 한양대에서 석,박사를 취득하여 2013년 12월까지 동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강의 교수로 일했으며, 2018년 3월이 되자 자신의 모교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이 교수의 이력은 사뭇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2022년 5월 기사에는 그가 120편의 논문과 함께 21권의 학술 저서를 발표했고, 심지어 그의 논문 피 인용수는 1,319회에 달한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교수의 이런 왕성한 연구 활동이 자리만 차지하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 상당한 귀감이 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주력으로 연구하는 분야에 매진하는 학자 적인 모습은 현재의 대학 분위기에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저자의 '표현의 자유' 3부작 가운데 마지막 논저인 이 책은 지난 2021년 6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시민들의 침해 받을 수 없는 권리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는 그들의 헌법에서 마땅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이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논의의 확장 가운데서 다수의 시민들에게서 통치의 위임을 받은 공인들 즉, 정치인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마땅히 비판과 견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맥락의 표현의 자유가 여러가지 원인들에 의해 위축되는 상황을 일컬어, 저자는 이를 명확히 위축효과 chiling effect 라고 논증 가운데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표현의 자유로 돌아와서, 우리가 익히 친근하게 인식하고 있는 이 표현의 자유는 글 1장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인권과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필수 기본권"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명백히 반대로 위축효과는 저자의 말마따나 '표현의 자유의 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사실 위축효과로 인한 가장 부정적인 도출은 바로 시민들에게서 '자기 검열'에 따른 표현의 위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든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헌법과 사회 제도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 받아야 할 텐데요. 결국 시민에 의해 구성된 의회의 의원들이 무엇보다 헌법을 통해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침해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많은 의무 중에 하나 일 겁니다. 뒤이어 비판적으로 논증되는 2장의 국가보안법 제7조에 대한 개정 논의도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4장의 사실적시의 명예훼손에 있어서도 국가보안법 7조 해석과 마찬가지로 공익에 대한 조건을 재판관이 어느 정도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2장의 논증 가운데, 등장하는 '종북 좌파'의 표현 자체는 그동안 소위 개발 독재 이데올로기에서 상당한 기득권을 누린 보수주의가 "자신들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을 부정적으로 프레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종북 좌파라는 단어 자체가 모멸적이고 특히나 논리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건전한 복지나 사회 부조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싸그리 종북 좌파로 몰고 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그 폐해는 심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부정적 프레임 씌우기' 자체가 카를 슈미트의 잔재라고 생각하는데요. 1980년대 이후에 슈미트의 "나 아니면 저쪽"이라는 일상적인 구분법이 사회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러한 인식적 차원에서 마누엘 카스텔이 정권이 휘두르는 권력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두려움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의 권리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 자체도 실상은 정치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명백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의 여느 논증들 가운데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5장의 '징벌적 손해 배상제도에서의 위축효과'였는데요. 일전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각 언론의 행태를 봤을 때,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개인에 대한 인권이 언론에 의해 거의 난도질 당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에 대한 사실이 아닌 기사들에 대한 구제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법원을 통한 구제가 전부일 듯 싶기도 한 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언론에 대해 징벌적 손해 배상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언론 자체가 권력과 정당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만 하고 무엇보다 기사를 제공하는 기자와 편집부 자체가 무엇보다 증거에 기반하는 기사를 몇 번이고 검증하여 내보내야 하지만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 송부 행위가 근절되지 않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다만, "비방할 목적이 있을 때, 정보통신법상 명예훼손에 해당하여 처벌"받을 수 있고, 그 처벌 역시 가볍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기자의 표현의 자유가 사실과 증거에 기반하지 않을 때의 부작용을 과연 어떻게 방지할 수 있겠느냐는 뒤이어 나오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발언과 관련 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물론 이 부분은 많은 토론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자의 이 글을 통해 그가 우려하고 있는 바는 대충 알 수가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나 많은 부를 가진 자들이 갖고 있는 자원들을 동원해, 공익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나서는 시민들의 마땅한 권리를 고용한 변호사들과 유리한 사법 제도로 입막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겁니다. 더욱이 힘을 가진 강고한 언론이 다수 시민들 편에 서지 않고 권력의 하수인노릇을 하는 가능성 자체는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연이어 터진 근래의 사태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요. 즉,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함의에서 뿐만 아니라 언론과 시민이 서로를 신뢰하며 소수 권력층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민주주의 질서로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닌 시민들은 각자가 경제 상황에 따라 파편화 되었고. 자본주의와 정치 권력에 순응한 언론은 그만큼 시민들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 당면한 현실일 겁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민들이 당연히 요구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시민 다수가 권력과 사법 제도에 불신을 갖게 되어, 순수하게 헌법과 제도 자체를 곧이 곧 대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연유로 근원적인 위축효과는 현실의 왜곡된 문제에서 더 기인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후반부에 논증의 결말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이 공적인 표현을 하더라도 권력에 의해 보복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로서는 복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요. 정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렇게나 어려운 과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 갑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시민들을 대표해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인(정치인,공직자)을 감시, 견제하기 위해 자유롭게 그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획일성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점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자율 규제와 차별금지법 등으로 제한함으로써 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고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위축효과란 공권력과 같은 권력, 특정 표현에 의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에 의해 정당한 의사표현이 어려워지는 이른바 자기검열의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예컨대 유럽식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도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종북좌파로 지칭될 수 있다.
종북좌파라는 표현은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이념을 달리하는 혹은 보수적인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을 부정적으로 프레임하는 방식의 표현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익성이라는 것은 정부의 성격에 따라 혹은 재판관의 성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시민들을 대표해 공적인 일을 하는 정치인과 같은 자발적이고 정치적인 공인들이 시민들의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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