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책무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황소걸음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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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이라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 철학, 인지 과학, 역사학, 사회정치학 등의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오늘날 대표적인 공공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928년 유대인 이민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학부는 물론 석,박사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후 MIT에서의 대부분의 연구 활동을 비롯, 컬럼비아 대학,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등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합니다. 촘스키가 단순히 해당 학문의 연구에 매진하는 평범한 학자였다면 그를 향한 '세계의 양심'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1962년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1967년에 나온 소책자 '지식인의 책임'를 통해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로 자리매김합니다. 특히 과거 그에 대한 네오콘들의 증오는 정말 상당한 것이었는데요. 그는 냉전 시기에 콜롬비아, 니카라과, 파나마 등지에서 있었던 CIA에 의한 '더러운 개입'을 폭로하고, 그러한 왜곡된 미국 정치와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정치적 술수를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미국 사회에 가감 없이 알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쥘리앵 방다가 외쳤던 '지식인의 책임'과 관련해 이것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노엄 촘스키의 양심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촘스키는 현재 매우 고령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모쪼록 그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Writers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로 지난 1996년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번역은 강주헌씨가 맡았습니다.

이 글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인의 책무"와 관련해, 촘스키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함의를 기억한다면 소위 배운자들의 도덕적 의무는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뒤에 나오는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토크빌과 존 듀이가 강조한 실천적 시민에 대한 의미로도 읽히는데요. 과거 존 듀이가 귀스타브 르봉을 일독했는지 모르겠지만 듀이가 지속적으로 탐구한 '시민'과 '교육'에 대한 정체성은 실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전자의 르 봉처럼 대중 다수에 대한 반쯤은 추정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인식'을 뒤이어 등장하는 권력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감을 제공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듀이와 비교될 만한 일화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논증 가운데, 촘스키는 지식인이 양심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알려야 하는 도덕의 사투와 관련되어 있는 사건으로 캄보디아와 동티모르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학살이야 이미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방조되어 인도네시아 군이 자행한 동티모르에서의 무고한 학살은 실로 국제 윤리와 최소한의 도덕성을 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코소보에서의 살육과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조차 구축된 처리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미국과 인도네시아와의 중요한 정치 외교적 관계를 국익의 관점을 무시하고 일개 지식인이 이 학살 과정을 폭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에 대해 아마도 의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대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실천하는 지식인에게는 무조건 이를 전할만한 '가치 있는 대중'이 중간의 매개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뒤이어 진술되는 2장은 흔히 애덤 스미스의 오독으로 비롯해, 더욱 체제 전반에 낱낱이 적용된 시장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뿐만 아니라 도덕감정론의 저자임을 망각하고 지냅니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의 화신으로 꾸며 배타적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오랫동안 그를 왜곡해 온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데요. 더욱이 촘스키가 멜서스를 인용하며 입증하고자 하는 바는 경제적 합리주의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간접적으로 파괴하는지 밝히는 것에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돈을 향한 탐욕이 우리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고 있다"는 인식마저도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인데요. 사실 지그문트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촘스키도 역시, 이런 시장주의가 우선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에 수렴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는 '참된 자유주의'라는 의미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단되어 과거 전통적인 의미를 상실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지배계급으로터 자유로울 권리, 권력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그만큼 현 시대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기존의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인 정치학 수준에서의 교리를 뛰어넘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을 우리가 자각하고 있다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원래의 자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버틀란드 러셀과 존 듀이의 사상적 행적은 그만큼 많은 시민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이들이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시대의 선구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촘스키의 설득력은 그만큼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3장은 로버트 커트너와 대니 로드릭의 민주주의에 관한 종래의 논증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미국 정부의 중요한 국제 무대에서의 원칙, 시장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세계 각지에 이식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정치적 명분이자 세계 패권의 정당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기업과 은행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취하면서도 공공의 감시를 제대로 받지 않는 그림은 자본주의의 이행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는 촘스키도 진술하듯, 시장에서의 광범위한 영리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기업들이 내부의 의사 결정이 민주적인 부분과는 동떨어진 채로, 거의 전체주의식의 상명하달의 위계는 마치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이익 앞에서 충분히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평등과 모두의 이익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적 논리나 더 나아가 금융 자본주의의 이행으로 인한 더욱더 강화된 자본의 축적은 그야말로 배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칠레의 피노체트의 사례를 고려해 봤을 때, 미국 정부가 과거 냉전 시기나 작금의 시기까지 신자유주의의 개혁을 남아메리카를 비롯, 여러 국가들에 밀어붙인 정치경제적 행위는 과거 영국이 자국의 시장을 위해 인도의 산업 전반을 항복시킨 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또한 실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정부를 미국이 CIA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원한 역사적 과오는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질서'와 매우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국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위대한 제임스 매디슨은 새로운 국가가 사적 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지주들을 비롯한 부자들의 권리가 다수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인 인물입니다. 재산권에 대한 위협이라는 매디슨의 사회에 대한 우려는 그동안 미국의 헌법을 통해 면밀히 계산되어 적용되어 왔습니다. 아마도 미국 시민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에 대한 함의는 이와 같은 맥락을 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상 기득권 보수주의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자유'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되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더 많은 자유는 아마도 '과두제'로 나아가는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이와 관련해 촘스키는 사법제도를 떠받들고 있는 판사들이 시장의 자율권을 위해 사법적 조치를 공공연하게 한 점을 끄집어 내고, 기존의 연방이 갖고 있는 권력이 각 주로 이행되는 과정에는 권력을 가진 기업이 연방 정부보다 주정부를 좀 더 수월히 다룰 수 있는 배경이 된다고 일침했습니다. 즉 이와 같은 진술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일견 보이는 대로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강박한 필요에 의해, 특히 기업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정치 전반이 시장과 경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례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처럼 촘스키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모두의 이익에 수렴하지 못하는 일종의 원리원칙과도 같은 견고한 시장주의와 그러한 철저하고 조직적인 이행이 전세계 민주주의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경고하는 것으로 글은 사살상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 대다수가 스스로 삶을 견실하게 영위하지 못한 채, 경제적 삶이 위협 받고, 본래의 공익에 기반한 사회 체제가 승자독식의 침해할 수 없는 원리에 잠식당하여,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장의 마지막 논증인 '자유시장 보수주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힐만한 내용이었는데요. 촘스키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선명성은 이처럼 명료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실망스러운 부분은 3장 후반부의 "일본은 점령군으로서 야만적 권력을 휘둘렀지만 서유럽국들과 달리 식민지들을 산업화시키고 발전시켰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본래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촘스키의 저런 문장은 일본 내의 극우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에게 다분히 이용 당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도덕적 행위자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 퀸시 애덤스도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정직한 삶을 살면서 "우리가 불운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씨를 말려 버렸다"고 식민지 개척 과정을 설명했다.

반세기 전,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의 서문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영국에 헌정하면서, 결과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억누르지 않으면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어 미래의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할 것이라 예언하며 말년에 그 위험성을 경고했던 ‘은행ㅇ과 돈 많은 기업들‘은 그후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은행과 기업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민중의 간섭과 공공의 감시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힘을 확대해나갔다.

국가 권력은 민주 사회에서 더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지만 국가 권력이 자유주의적 비전과 충돌하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에의 종속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 즉 자유의지에 따라 권력에 순종하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반미‘와 같은 개념들이 사용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현상이 아니다.

독자적으로 보유한 재산도 없고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은 ‘한 줌의 음식도 요구할 권리가 없고, 현재 몸담은 곳에 있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멜서스는 주장했다.

경제의 합리주의가 체계화되어 강요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중적인 면을 띠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시장법칙이 가차없이 적용 되었고, 필요할 때마다 부자와 특권계급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

과거에 항상 그랬듯이 우리는 제퍼슨적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귀족정치주의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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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2-03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지난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찾아 읽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게도 몇 군데 글에 인용만 하고 독후감은 쓰지 못했는데 확실히 저에게는
소장할 책이더군요. 이 책도 얼마전에 뜨길래 궁금했는데 역시 읽어야겠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늘 아쉬움과 의문 투성이었는데
(한국사회에서 그 목소리가 부재한 것 같아)‘가치 있는 대중‘이 필수적이라니 그도 그럴법 하네요.
앎이 짧은,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분야를 베터라이프님 이렇듯 글로 잘 풀어내 주시니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2-03 23:21   좋아요 2 | URL
촘스키의 비판적 화두인 ‘승자독식‘과 그에 따른 공익의 쇠퇴는 바우만도 오랫동안 동의했던 부분이죠. 그리고 바우만 역시 다독을 바탕으로 주장에 대한 많은 인용이 특징인 학자이죠. 아마 자본주의의 본질을 그만큼 꿰뚫어 본 사람은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도덕적 책무에 따라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에게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촘스키의 대략적인 주장입니다. 이 대중을 시민으로 치환하더도 민주주의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위한 교육과 깊은 사색이 바탕이 된 겸허한 사람들이 정치의 바탕이 되어야 함은 자명한데요. 물론 이 부분도 매우 어려운 현실입니다.

사실 시장의 자유라든지 그러한 맥락의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 하면서 정치가 불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시스템이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악화되어 왔고 이제는 극단주의 정치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평에 다 담지 못한 부분 중에 촘스키가 기득권을 쥔 권력에 대한 본질을 논하면서 지배 권력 자체가 좌와 우를 논하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정부의 본질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미미님의 여러 글을 보면서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새삼 북플에는 내공이 상당한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모두가 이렇게 책으로 엮이고 말았으니 아마도 쉽게 헤어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끝으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