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적 지배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의 사회학자, 역사가, 법학자, 정치경제학자였던 막스 베버는 에밀 뒤르켐, 오귀스트 콩트와 더불어 인류에게 사회학의 서막을 연 위대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 왕국의 작센 주, 에르푸르트 출신으로 괴팅겐 대학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사회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고찰과 함께 경제사회학과 종교사회학을 결합한 특유의 사상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처럼 숙련된 종교학과 사회학을 각자 취합하여 관료제에 대한 분석으로도 명성을 쌓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자유주의 독일 민주당의 창당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그가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반대한 것으로 보아 민족주의적 보수 정치인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사회민주당과 적잖이 협력한 이력도 갖고 있어 그의 정치 이력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1922년에 출간된,'경제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카리스마적 지배, 카리스마적 일상화 등을 발췌해 편집한 것으로 1985년판의 원서를 이상률씨가 번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국내 출간은 2020년 11월에 있었습니다.

사회학의 다른 논저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되듯,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처음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것이 바로 막스 베버였습니다. 여기에서 카리스마는 한 개인의 비일상적인 자질이나 특질로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인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받거나 혹은 신이 보냈다고 인정 받는 일종의 특수한 리더십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는 거의 확실시 되는 추종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 관련해, 베버는 이들을 '행정 직원'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데요. 이것의 국문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지는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카리스마적 지배에 복종하는 추종자 집단이라는 보충 설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단 의미는 전달된다고 보겠습니다.

베버가 분류하고 분석하는 이 카리스마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합리적 지배, 특히 관료제 지배와 대비되고 전통적 지배에서 가부장제 지배나 가산제 또는 신분제 지배와도 첨예하게 대비된다고 글에서 주요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소명과 사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고 특히 많은 이들이 이 카리스마적 지배를 용인하고 추종하는 것으로 그 형태가 드러난다고 베버는 보고 있는데요. 이런 차원에서 합리주의 시대 이전에는 전통과 카리스마가 행위의 지향 방향 전체를 거의 양분했다고 그는 다시금 분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편적인 이해에서 이 카리스마는 이성이라든지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는 약간의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요. 다음 2장에서 예시로 나오지만 전체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나 국가의 위기에서 기발한 해결책과 나아갈 길을 개척한 많은 봉건 군주에서 카리스마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2장의 '카리스마적 일상화'와 관련해, 카리스마가 기존의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꽤 변질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족벌 국가화에 따른 전통주의적 통치로 나아가는 카리스마는 세습적 메커니즘과 함께 이를 지지하고 추종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의 정치로 규정되는 듯 보였습니다. 즉, 카리스마 지도자를 추종하는 다수의 추종자들은 합리주의와는 크게 상관없이 경제적 이익 또는 다수의 복리를 이 지도자에게 기대하고 단순히 이 지도자의 특출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제도화된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베버는 처음과는 달리 카리스마적 일상화가 진행되면 이 모든 지배 단체가 신분제 형태 또는 관료제 형태로 발전한다고 분석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13세기 이후의 신성로마제국과 로마의 분할된 종교-세속 권력 체계가 떠올랐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손이라고 여겨지는 로마 교황이 유럽 가톨릭을 보호하고 번영하는 의무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카리스마에서 변형되어 일종의 세속화 혹은 일상화가 아주 성공적으로 이뤄진 사례로 여겨졌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는 이러한 비슷한 사례를 적잖이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배와 그 일상화와 관련된 분석과 논증 가운데 제가 주목한 것은 두 부분인데요. 종교적 카리스마와 관련해 이들이 세습과 선출을 함께 아우르며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나, 근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도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베버는 이와 관련해, 1912년 미국에서 나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였던 강한 카리스마적 지도 유형을 그 예시로 들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을 주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민주주의적 카리스마 지도자의 전형으로 생각되는데요. 대공황을 극복할 당시 그가 의회를 휘어 잡은 것이나 반대의 의견들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헤쳐나간 것은 꽤 유명하고 그런 연유로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의 순위에 항상 수위를 놏치지 않는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의 뒷부분에서 베버가 우려한 대로 민주주의 혹은 민주 정체 하에서 과도하게 경제 권력이라든지 사법 권력이 사회와 국가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 과두제 상황의 카리스마적 지배도 민주주의의 토양 아래서 시작되어 체제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베버는 금욕과 남들과 우월한 도덕적인 선명성을 위해 보다 '객관화된 카리스마적 교육'을 통해 사실상 이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가나 종교가 주도하는 카리스마 교육이 전문성을 떠나 창의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면 그것이 사회 체제에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종교가 과거와는 달리 엄격하게 정치 영역에서 분리되어 있듯이 지금의 종교가 가히 초월적인 지도자를 배출하여 사실상 지금의 '정교분리'에 위해를 가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단순히 정치적 의견이나 이데올로기보다 순수한 기독교 자체가 정치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종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종교적 관용과 더불어 다수의 의견은 물론 정치적 주장을 할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에 과연 그 '종교적 카리스마' 다수의 이익이 될지는 큰 의구심이 듭니다.

끝으로 전통적인 카리스마적 지배가 본질적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하의 정당 정치나 혹은 특출난 지도력을 보이는 정치 지도자에게 대입해보면 베버의 분석들을 과도한 해석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데요. 저는 앞선 1장에서 베버가 '추종자들의 복리'라는 부분과 관련해,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아예 이를 눈 감을 수 없다는 논증에서 우려 섞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미 앞선 진술에서 카리스마가 일상화를 통해 거의 전통적인 관료제에 준하는 체제로 변화되고 이식되는 것을 보았는데요. 그래서 베버의 논증대로 민주 체제 하에서 특출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타협과 대화라는 민주적 가치에 위배될 수 있는 환경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과거에 히틀러가 어떤 식으로 권력을 쟁취하여 그러한 권력을 사유화 했는지는 역사가 명확하게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베버가 언급하는 '윤번제 원리'와 직접 민주주의 체제의 언급은 그래서 뭔가 기시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합니다. 결국 고결함과 도덕적 책무 그리고 겸허함을 결여한 카리스마와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몰개성적 추종자들의 존재는 카리스마의 양가적 측면을 여실이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드러낼 게 없는 자가 그러한 카리스마를 연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의미로 경계해야 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카리스마적 지배 단체는 점점 더 일상적인 지배 형태(가산제 형태, 특히 신분제 형태 또는 관료제 형태)로 발전한다

국왕의 경우에는 후계자 지명이 전통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역사시대에는 독재관,공동 통치자, 초기의 후계자 재정 임명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카리스마 힘으로 정당한 수장이 된 자는 복종자들 덕분에 수장이 된 것이다

반면에 진정한 카리스마적 지배에서는 ‘올바른‘법에 대한 논쟁이 사실상 종종 추종자 집단의 판단에 의해 해결되는데, 이 판단은 단 하나의 올바른 결정만 있고 이러한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 의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이루어진다

전통적인 정통성은 형식적인 합법성과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독재에 의해 똑같이 무시된다

카리스마의 혁명적인 역할과는 달리, 정치 영역과 종교 영역에서 전통적이며 친숙한 일상적인 요구는 관습, 전통 존중,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심, 하인의 개인적인 충성에 근거한 가부장제 조직에 의헤 충족된다

반면에 카리스마 복종자들은 정기적으로 지대를 받는 ‘신민‘, 세금을 내는 교회, 종파, 정당, 조합 등의 회원, 규칙과 명령에 따라 복무를 강요받고 훈련받아 규율이 잡힌 군인이나 준법정신이 투철한 ‘국민‘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각각의 혈족이 지닌 권리의 ‘정당성‘ 근거는 재산이나 관직을 주는 것에 따른 개인적인 충성 관계가 아니라 각각가의 가문에 내재하는 특별한 카리스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일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성한 힘으로서의 바로 그 성질이 일상화 이후에도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의 후계자들에게는 지배권을 정당하게 획득할 수 있는 적절한 원천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과 일상생활 - 사랑, 결혼, 그리고 페미니즘 현대의 지성 119
크리스토퍼 래쉬 지음, 엘리자베스 래쉬 퀸 엮음, 오정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버트 크리스토퍼 래쉬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진보주의자이면서 역사가, 도덕주의자 그리고 사회비평가였습니다. 흔히 미국의 진보주의 역사에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크리스토퍼 래쉬이기도 한데요. 이와 더불어 C. 라이트 밀스와 하워드 진과도 같이 회자되는 지식인입니다. 그는 미국 네브레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박사를 수여 받습니다. 특히 래쉬는 헨리 조지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테오도어 아도르노 등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래쉬의 치열한 사상적 행로 가운데에서 그가 비판한 '냉전적 자유주의'에 절로 관심이 갔는데요. 미국내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대한 래쉬의 비판을 접하고 나니 참으로 외로운 길을 자청해서 걸었던 지식인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지식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자유주의 자체가 인류에게 있어 과거의 억압으로부터 역사의 진보를 이루게 한 원동력이었지만 그렇다고 오직 자유주의만이 비판을 받지 말아야 하는 절대지고의 가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자유주의가 오도한 적지 않은 병폐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이 눈을 감고 있는 실정에서 유독 래쉬의 도덕적 양심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엘리트 지배 계층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본래적 의미가 퇴색되고 결국 이러한 파국적 이행이 시민들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여러 논저들이 제대로 국내에 번역되지 않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쪼록 래쉬의 다른 글들도 우리 독자들이 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래봅니다. 여기 이 책은 원제, "Women and the Common Life : Love. Marriage and Feminism"으로 지난 199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4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의 책머리에는 크리스토퍼 래쉬의 딸인 엘리자베스 레쉬 퀸의 이 책에 대한 소개와 아버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가 본문에 앞서 수록되어 있습니다. 래쉬가 죽기 10일전에 완성한 이 소중한 글은 그가 죽음의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 글을 탈고하기 위해 얼마나 귀중한 시간들을 사용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사회에 적잖은 이정표를 남긴 한 지식인의 마지막이 담담하게 쓰여져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래쉬의 이 책은 유럽에서 계몽주의가 정착하기 이전의 시기부터 이후 1980년대까지 우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처했던 비이성적인 상황, 그리고 일반적인 여성들의 삶을 고찰해 보고, 최근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어떻게 '여성의 권리'가 정치적 편의로 인해, 주류에서 소외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논증 작업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에 1장부터 3장은 계몽이 일부 유산계층의 남성들에게 집중된 시기에 이들과 사회 전반이 여성들을 어떤 식으로 취급했는지에 대해 여러 사료들과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살펴보는데요. 이미 탁월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저자의 사료 분석은 꽤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도 드러나지만 당시 사회의 중간 계급조차도 남녀 간의 결혼은 동등한 남녀의 결합이라기 보다는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안온한 인생을 위한 일종의 사회적 안전 장치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요. 래쉬의 의견 역시 이에 부합하는 측면에서, "여성의 성을 남성에게 제공한다"는 의미가 그 시대의 뿌리 박힌 관습이었다고 분석합니다. 따라서 일부 귀족 계급의 여성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이러한 사회적 인식 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거의 타당한 분석일 겁니다. 남성에게 교태를 부리고, 남자들에게 성적인 만족을 자신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 매혹과 이러한 메커니즘 전반이 여성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의라는 고정관념이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었는데요. 이러한 현실을 처음 비판한 여성은 바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문제 제기 이후에도 현실에서 노동 계급에 속한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4장에서 울스턴 크래프트는 "경제적 자립성을 결여한 여성을 아름다움에 바쳐지는 감각적인 경의"를 통해 남성들에게 힘을 행사하고자 했다고 평가하는데요. 아마도 경제적 자립성의 중요성을 여성에게 연계해 자신의 외모를 통해, 스스로 '생활의 고단함'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죠. 여성의 성이 남성에게 단순히 섹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하층 여성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숙고해보는 것이 이 글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미 중세사와 관련해 어느 정도 당시의 사회상을 어렴풋이 나마 인식하고 있듯이, 가장의 권위가 중심이 된 오래된 가부장제의 틀이나 소위 '가정성'에 대한 여성의 의무가 16세기 이후에도 고착화 된 것이 여성 자체를 사실상 남성의 소유로 여겼던 배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자신의 성에 대한 통제는 남녀가 결코 이성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한데요. 래쉬에 의해 이미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여성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사실상 인정하는 문호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에도 일부 지식인들도 사회적 관습으로 강요하고 있던 여성의 이 같은 굴레들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귀족 문화를 비롯 상류 계급의 결혼 문화라든지 상류 여성들이 항유하는 문화가 시대적 관습의 과오에 머물러 있었으며, 1장에서 비판적으로 진술 되듯이 부르주아 집단에서 시골 귀족층의 계몽되지 못한 성의 왜곡 상황을 이 즈음부터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꽤 고무적인 일이라 볼 수 있었는데요. 사실 인간을 모두를 위한 '이성의 불빛'은 오로지 하나의 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성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이를 모든 세대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여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진보 자체가 더디고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나 에릭 홉스봄의 과거 언급대로 과거 역사를 거스르는 진보의 힘은 분명 아주 조그만 단초로부터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과는 상이한 차이를 보이는 당시 남녀 간의 사랑은 다분히 여성들이 남성들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해야 하며, 그런 와중에 자신의 아내들을 쉴 새 없이 '임신 상태'로 만드는 일종의 윤리적인 무계획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요. 래쉬가 언급하는 당시 '여성 재사들'이 아직도 강고한 '여성들의 정절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현존한 결혼 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성 재사들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이성에 눈을 뜬, 각성한 여성들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은 초기 활동 시기에 남성 위주의 사회 제도와 관습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가했으며, 그로 인해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주의(초기 전통적인) 자체가 이성의 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서 본격적으로 개화한 부류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사회의 강고한 관습에 반해 저항한 계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남성 위주의 기득권들을 위한 사회적 제도를 이성적 측면에서 다시 돌아보고 개선해야 된다는 흐름이기도 한 데요. 이러한 진보는 그저 당대에 국한된 여성들 뿐만이 아니라 후에 이런 사회적 관습 하에 태어나게 될 다른 여성들과 더불어 사회 제도가 기본적인 '도덕적 양심'에 의해 재구축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남녀 평등은 바로 이러한 인식 하에 공통된 사회적 저변를 대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가 표출했던 단순한 사회상으로 여길 수 없는 '충동적인 결혼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루고 있는 3장은, 앞서 서술한 결혼 제도가 전반적으로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린 나이의 소년 소녀들이 충동적으로 결정한 결혼에 대한 결정을 단순히 돈과 명예를 위해 교회가 비이성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실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젋은 여자들이 본질상 너무나 쉽게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절개를 믿게 되고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남자의 진지한 약속을 잠자리로 받아들이고 보답하려는 경향"에서 기존의 교회가 갖고 있던 결혼 예식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사회적 명령은 일종의 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이 사실상 결혼하지 못하게 막는 교구 관리인들 혹은 교구 정치인들의 폐단은 대단한 것이었는데요. 단순히 종교 자체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나열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강화시키는 여러 논의들 가운데서 당시 유럽의 종교 권력 자체가 예전과는 다른 '이성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었으며 그런 계몽주의가 종교를 마땅히 '대단한 권력'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폐단과 더불어 18세기 영국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이십대 중반에 결혼을 한다면, 십대나 이십대 초반에 결혼한 임산부는 우발적이고 비정상적인 만남의 과정에서 임신을 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여성들 스스로의 통제가 이 시기에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본격적인 산업 발전이 이뤄지면서 여성 노동에 대한 정치권과 부르주아 계층의 함의가 드러나게 되고, 본격적으로 가계 경제에 여성이 기여할 수 있게 되는데요. 그동안 전통적인 가부장제도 하에 본래적인 가정성에 대한 지지와 결속이 당시까지도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겁니다. 다만 신대륙이었던 미국은 구대륙의 유럽과는 다른 경향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신대륙에서도 남성들이 오로지 상업 거래와 자신의 경제적 성취에 모든 걸 투입하게 됩니다. 여기에 가정의 희생도 포함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신대륙의 많은 여성들은 래쉬에 의하면, 여성의 공적 세계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는 폭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진보적 시기라 불리는 1890년부터 1920년 사이에는 오늘 기업 세계와 비견될 정도로 조직된 연계망을 구축합니다. 이 여성들은 노동자들과 흑인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돈을 받지 않는 자발적인 자원 봉사'로 운동을 구축하고 이러한 활동들이 미국 사회의 진보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자아 성취에 빠져 있는 동안 여성들은 이렇게 큰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제가 보기에도 역사의 기적으로도 여겨지는데요. 이러한 큰 공동체적 기여와 책임 의식이 신자유주의 이행 상황에서 오로지 개인주의화되는 미국 사회의 단편을 래쉬 역시 크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약간 다른 접근이지만 이런 개인주의화는 사실상 사회의 진보와 시민들의 건전한 활동을 사실상 저해하는 요소로 이해되는데요.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와 아주 밀접한 만큼 일반적인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적 의무와는 완전 별개의 생명체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래쉬는 글 초입에서 "현대 페미니즘이 결혼과 남녀 평등을 화해 시키려 노력했다고 강조합니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과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대다수의 남성들이 "위선자이며 사기꾼"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처럼,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와 가정성에 대한 강고한 의문을 페미니스트들은 파헤쳐 왔습니다. 현대 의사들과 정치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저출산 문제와 같은 현대 사회의 고민들을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저들이 결탁해 "어디 즈음에 여성의 책임"있다는 식으로 치부해 왔다는 것을 공격하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인식의 최종 책임은 남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의 경시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관련해, 1950년대 미국에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민주주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1960년대에 서구 사회에서 여성 참정권이라는 정치적 권리를 여성계가 획득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당시 미국 사회는 앞으로 이어질 진정한 남녀 평등이라는 의제를 뒤로 물리고 '당면한 흑백 간의 차별과 흑인의 권리'에 대해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도 역시 민주화 과정에서 여성주의 운동과 관련해, 먼저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먼저 나서게 됨으로써, 폐미니스트들의 불만을 초래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조정이 필요한 시기에서 우리가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고 공격하여 좀 더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함과 동시에 뒷짐 지고 있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결함이자 축복이라고 볼 수 있는 갈등과 대결을 아무런 불안감 없이 그저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래쉬가 토로한 '일상 생활의 강등'은 이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요. 또한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오늘날 심대되고 있는 과학 기술과 전문 영역이 사회에 끼치는 오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가 우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착화 된 논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스펙트럼이 다양하다고 볼 수 있기에 이들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하는 래쉬와 함께 우리 시민들도 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반적인 성에 대한 솔직성을 강조하는 의사들의 권유를 단순히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기여라고 전부 치부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역사사회적 발전에서 근대성이 갖는 의미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변혁과 개변이 이뤄지기도 하는데요. 물론 남녀 평등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일각의 의견도 많을 겁니다. 이것을 어떠한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한 다양한 여러 의견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남녀 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마땅히 보장해 주었던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점은 분명하고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막말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여성의 권리나 남녀 평등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며, 다수의 시민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인식과 배경을 바탕으로 여러 정치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문제도 다룰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여성의 권리라든지 남녀 평등 문제가 오로지 페미니스트들만이 다룰 수 있는 고결한 분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앞으로도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들도 우리의 민주주의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71페이지 문장 한 곳에 조사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문에 래시와 래쉬와 같이 저자의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문장들이 보였습니다. 


래쉬는 여기에서 보편적으로 인간의 힘과 평등 그리고 자존감의 본질은 우리가 삶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오랜 시간 헌신하며 정면으로 도전에 맞서는 것으로부터 얻어진다는 사상을 추구한다

이와 같이 구시대의 전통인 가부장제가 자유주의 국가라는 새로운 헤게모니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대국적인 그림이다

그들은 성간의 평등에 기초한 사랑과 부인이 남편의 권위에 복종할 것이 당연시되는 계층적 타협인 결혼 사이의 모순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결혼으로 인한 결합이 토지 재산의 강화와 상속, 그리고 귀족 가문과 혈통의 유지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낭만적인 열정이나 당사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결혼은 이루어졌다

여성 정절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험담가들에 대항하여 여자를 지키기 위해 말을 달리는 기사들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풀랭 드 라 바르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로 시작한 여성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차원의 원칙에 따라 사회 제도들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기조로 하고 있다

성실한 부모들은, 그들의 딸들이 교회의 묵인 하에 낚아채이고 꼬임을 당해 결혼으로 이끌어질 때 무능력하게 방관해야만 한다

물론 그들 역시 사랑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결혼을 일찍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사랑을 성숙한 사고와 오랜 사귐의 산물로 여기기보다 성적 매력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대부분의 여성이 18세기 영국에서 대부분 그러했듯이 이십대 중반에 결혼을 한다면, 십대나 이십대 초반에 결혼한 임산부는 우발적이고 비정상적인 만남의 과정에서 임신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경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글에서는 결혼이 본질상 여성에 대한 감옥이라는 어떠한 의견도 없다. 그녀는 대신 결혼을 우정의 최고 형태로 보았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결합으로 보았으며 여성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는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했다

비록 우리 시대에 와서 여성을 부엌에 머무르게 하려고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로 곡해하기는 하지만, 가정성에 대한 예찬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꼭 생각하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페미니즘적 사고를 형성해내었다

이에 따라 잘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폐미니즘에 대한 반대가 나오게 되었다. 더 이상 시민적 평등권에 대한 이의로 만족할 수 없게 된 운동에 대한 반대였다

성간의 전쟁은 강연장을 떠나 침실로 그 자리를 옮겼다. 성적 쾌락에 대한 여성의 평등권 주장은 이전에 사회 개혁과 시민 문화 향상에 집중되던 에너지를 흡수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소득 법률가, 광고업계 중역, 방송 언론인, 대학 교수 같은 직업이 "조직적 체계"를 유지하는 데에만 봉사한다면, 이러한 직업이 자동차 수리공같이 스스로 유용한 척 꾸미지도 않는 직업보다는 더욱 부도덕하다

여성이 기업과 로펌, 신문, 출판사, 텔레비전 방송국, 대학, 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기관들을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고결성은 최소의 저항선에 굴복하는 것, 군중을 따르는 것, 정직과 자기 존중의 대가로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것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는 페미니즘이 가사일과 자녀 양육을 집단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과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10-16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토퍼 래쉬!!!
하워드 진과 함께 거론된다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이책 내용도 그랗구요

베터라이프 2022-10-16 00:23   좋아요 2 | URL
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비문하고 오타가 많네요. 게으른 저는 내일에나 손을 보려고 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게되신다면 따님이 남긴 첫머리글을 꼭 읽어보세요. 부친에 대한 따님의 속정이 엿보이더군요. ^^ 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블랙아웃
마크 엘스베르크 지음, 백종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마크 엘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은 수백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이 '블랙아웃'은 독일어권에서 180여만부나 팔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몇 년 간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랫동안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이력으로 그는 비엔나 응용예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 업계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도 했는데요.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일간지 데어 스탄다드에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Black Out"으로 201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다만 국내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가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각 국의 발전소와 발전 설비가 해킹 공격으로부터 과연 안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사회에 대한 기여와 능력을 어느 정도는 신뢰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죠. 병원에서 담당 의사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작가인 엘스베르크가 가진 의문과도 동일해 보이는 발전소의 설비들의 아키텍처가 독립적이고 고유한 것으로서 자연재해나 혹은 불특정한 해커들의 공격에서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엘스베르크도 글 한 자락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일본의 후쿠시마도 그 문제가 터졌을 때, 원자력 전문가들은 일관되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란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공격도 짧게 언급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유럽이 천연가스에 한해서는 파이프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전 유럽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요. 그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이 경고하는 유럽 전력망에 대한 공격은 꽤 신빙성이 있는 소재였습니다. 더욱이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사는 크게 공감이 되기도 했는데요. 송전선이나 변전소와 같은 곳의 직접적인 공격도 위험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 시대에서 해킹의 존재는 참으로 불안한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엘스베르크의 이 소설에 대해 서평들을 남겨주셨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토리 라인 자체의 특별한 매력이 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인 만자노와 그와 엮이게 되는 몇몇 인물들의 개성, 그리고 유럽의 주요 도시를 넘나드는 서사는 매력이 될 수도 있겠으나 특별한 반전 없이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 자체는 크게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극좌라든지 무정부주의를 언뜻 끄집어내며, 자본주의에 반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테러리스트들의 명분도 현실적으로는 크게 설득력은 없었는데요. 다만, 저들이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유층을 공격해서 자금 마련에 나서는 것과 일종의 발전소에 쓰이는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독점 기업에 해킹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일반적인 전문 해커들의 소재는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럽 연합 차원에서 아무런 해결 방안도 꺼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황을 어두운 과거를 가진 일개 시민이 유럽 전체를 거의 석기시대로 몰아가는 심각한 위기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은 카타르시스 보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기자의 조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설 곳곳에 작위적인 설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했고요. 

끝으로 이 작품은 대체로 무난한 스토리 라인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사건 전개가 대체로 수월하게 읽히는 글이기도 했는데요.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색다른 소재에 비해서 중후반의 긴장감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블랙아웃이 전유럽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유럽 정치와 전형적인 기업 이기주의에 대한 꽤 흥미로운 서술이 인상적이기도 했는데요, 더불어 다수의 독자들도 느끼셨겠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그런 심대한 위기에 처하면 국가가 과연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는데요. 이렇게 유사시에 원자로의 냉각을 위해 가동되어야만 하는 디젤 발전기가 만약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이와 비슷한 우려를 담은 기사 하나가 어느 언론사를 통해 올라온 기사도 이런 우려를 자아내게 하더군요.



- 본문 535페이지에 등장하는 1986년 학생운동은 아마도 1968년의 68운동을 오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소설 속의 고유한 장치로서 68운동을 오마주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치가, 은행가 그리고 경영자라는 칭호를 달았지만 사실은 소수에 불과한 범죄 집단이 인간을 지배하고, 기만하고, 약탈을 자행하고 있잖아, 그런 현실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인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언제라도 또다시 기회가 주어질거야,

"안전을 영구히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일 현 상황에서 유럽의 원자력 발전소에 디젤유가 추가로 공급되지 않으면 며칠 후에는 비상 발전 시스템이 멈출 것이고, 이는 원자로 냉각 시스템 가동 중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전면 중단시켰다가 신속하게 곧바로 재가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항 주식회사 -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
피터 도베르뉴 외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국제관계학과 교수인 피터 도베르뉴는 작가 이자 환경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특히, 1997년에 그의 저서에서 동남아시아에서의 무분별한 삼림 벌채에서 일본 기업이 자행하고 있는 '파괴적인 수단'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지구적 경제 상황에 있어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소비지상주의가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다른 공저자인 제네비브 르바론은 영국 셰필드대학의 선임 연구원이자 셰필드 정치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계 경제의 노동과 고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특히, 강제 노동 및 현대 노예와 인신 매매가 관련된 불법적인 비즈니스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유엔과 정부 기관과 연계하여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적법한 노동 기준을 각 기업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도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간단한 서지 정보는 원제, "Prostest, INC"로 지난 2014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3월 도서출판 동녘에 의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역된 글의 제목인 '저항 주식회사'는 본래 원제보다 저자들이 밝히고자 하는 오늘날 압도적인 세계 경제와 그것에 마땅히 저항해야 할 글로벌 시민 단체 혹은 진보주의자들의 진면목을 아주 여실히 드러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소위 많은 NGO들이 이제는 다국적 기업들의 직접적인 현금 지원 없이는 자신들의 꽤 특별한 활동이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거대 기업의 기부와 같은 사회 사업과 마찬가지로 더 강력하게 자본주의적 논리를 사회 전반에 강화시키는 역할 만을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상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린피스'와 같은 단체는 다국적 기업들의 막대한 지원이 자신들의 목적과 활동을 위해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단체들을 이끄는 수뇌부들은 자신들을 위한 막대한 활동비 내지 소위 '특별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여지없이 수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반적인 기업의 임금 지급 상황과 거의 동일한 것인데요. 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이들 단체들이 이 글의 4장에서도 도출되고 있듯, '1980년 이후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비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은 선명한 도덕적 원칙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들이 지원금과 관련해서는 거의 '친기업적인 모습'이라는 부분은 뭔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과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저들 단체가 과연 거침없는 신자유주의화에 도덕적 제동을 걸 수 있을지는 확언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 책에 오해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은 두 공저자가 단순히 앞선 진보적 단체들이 선연한 원칙을 견지하면서 세계 평화와 자연 보호 혹은 인권을 위해 노력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강화시켜 나가는 첨병이 되고 있다는 점, 오직 그 점만을 부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오로지 안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반대의 세력을 '테러리즘'으로 몰아간 3장의 진술과 거침없는 자본주의가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쌍두마차로 사회를 피폐화 시키고, 많은 시민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쉬이 인정하고 있던 '사회적 삶'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만으로 전가시켜 버린 4장의 진술과, 이렇게 '분명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다국적 기업들과 결탁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 논리를 강화시키는 등의 6장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분들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미 이곳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토마스 프리드먼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결코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는데요. 1980년 이후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주요한 국가 경영의 논리이자, 자유 진영의 강화된 자본주의적 요구였던 신자유주의가 사실상 인위적이고 공격적인 정부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에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로 보고 있지만 실상은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손끝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 지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은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 노니는 연못을 콘크리트로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든 특별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동일한 맥락으로 4장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더 강화한 '개인주의'에 대해 꽤 면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시민성이 위축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등장하자 노동자와 약자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리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진술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누군가의 삶을 떠받치게 되는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조건과 마찬가지로 개인은 스스로의 경제적 조건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개인주의적 담론과 함께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책임이며, 개인의 여타 불행한 상황에 대해 정부와 사회에 결코 채근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극단적인 개인주의화'는 좀 더 과격한 표현을 빌어, 마땅한 사회 부조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를 지구에서 퇴출시켜 버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여기 공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저항이 실제로 전무했고 이것을 거의 조종했다고 봐도 무방한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각 시민들에게 내면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진보 세력의 몰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지구와 전세계의 지속적인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저 수많은 진보주의적 단체들의 '영리화'도 이에 한 몫을 했는데요. 특히, 1장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들 진보주의 운동들이 자본에 아주 이상할 정도로 '순응'한 것은 전반적인 사회적 책임의 후퇴와 동시에 시민 대다수의 각박한 삶은 기본으로 삶을 전혀 통제할 수 없고, 반대로 '특별한 계층'의 자유 만을 강화시켜 버린 현재의 극단주의적 메커니즘을 잉태했습니다. 여기에는 이러한 '사적 이익화'가 자연스레 공공선을 위한 지점으로 함께 나아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맹종과 함께 말이죠.

사실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단순히 어떤 시민 사회의 단편을 변화시키거나 자본주의적 논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단순히 소수의 몇몇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주류가 되었던 것은 3장의 일관된 진술에서 정부가 사회의 반대 세력을 공권력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무력화 시킨 것에 있기도 한 데요. 일찍이 마누엘 카스텔은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투쟁하게 될 때, 먼저 중무장한 경찰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자의 단순한 언설이 아니라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진보주의적 시민 운동을 사실상 탄압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3장에서 아주 상세히 보여지는 캐나다의 사례는 의미 더욱 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에게는 평범한 민주 국가로 알려져 있는 캐나다가 실로 견고한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는데요. 이미 캐나다 당국은 각 시민 운동 조직에 '프락치'까지 투입할 정도로 경찰 조직 전반이 잘 갖춰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를 무턱대고 나무랄 부분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정부가 건전한 사회의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하지 않고, 듣기 싫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을 '반사회적인 주장'으로 몰아가며 민주주의의 아주 기본 원칙인 다원주의를 옥죄는 데 있는 것인데요. 더욱이 근래 주요한 정상회담이 된 G20 회의에서 단순한 피켓 시위도 거부하는 각국 정부의 일관된 태도는 뭔가 시민들을 '예비 폭도들'로 싸잡아 인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도 범람하고 있는 여러 서적이나 양심적인 방송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철지난 음모론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분명 꽤 많을 겁니다. 우리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전세계적 경제화'가 1980년대 이전보다 극적이고 차별적인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인식적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데요. 이에 단적으로 경제적 자유화에 따른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을 기득권으로 놓고 본다면 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원과 수많은 인맥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그것보다 극단적으로 불균형적인 상황인 것은 자명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소득을 비롯한 경제 체제 자체로 불균등한 이행이 있는 것인데요. 18세기 이후 축적된 마땅한 시민의 권리 그리고 시민 불복종 운동 등을 사실상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가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체는 우리가 신봉하는 민주주의적 원리에 크게 위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전부 다 차치하고 지금까지는 신자유주의적 이행 자체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시녀로 만들어 소위 자유 진영의 금기로 만들기까지 했는데요. 따라서 이 글에서의 공저자들이 도출한 논증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이비 민주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주의가 지금에서는 진정성이 없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목도할 미래에는 헌팅턴 류의 터무니 없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그야말로 과두제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전사회에 일으킬 난장은 덤으로 말이죠. 



-극단주의자들 혹은 극단주의 정치가 주류 정치에 점차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이익이 될만한 것에 마땅히 베팅을 하게 될 텐 데요. 이 책의 중요한 통찰로서 2001년 이후 미국을 비롯한 민주 국가들이 시민 연대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공권력으로, 더욱이 중무장한 병력을 사용해 이를 막아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뮤얼 헌팅턴이 '민주주의의 과잉'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입과 얼굴로는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좀 더 강력한 공존을 원하는 기득권 정치가 강화된다면 말이죠.
   



하지만 인권,성평등,사회정의,동물권,환경운동 조직들의 의제와 담론, 그리고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와 제시하는 해법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군대와 민간 경찰을 갈라 놓았던 구분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희망과 분노, 그리고 참혹함의 사유화는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 놓아 사회 조직을 지탱하기 어렵게 만든다

가령 여성운동 조직들은 나이키, 골드만삭스 같은 기업들과 협력하여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위한 사회경제적 기회 마련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왔다

유명 브랜드 회사들은 젠더와 여성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비정부기구와 공동의 기구를 꾸리고 재정을 지원하며 이를 관리하기도 한다

좀 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무역을 위한 이런 노력들은 이윤 극대화를 우선시하는 사업 모델에 대해서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공동선을 창출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내놓았던 다음 주장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일각에서 말하는 대중 시위에 대한 ‘준準군사적인 경찰 활동‘이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모두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국가가 무역을 자유화하고, 자원을 사유화하며, 외국 기업을 달래 가면서 세계화와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해 여전히 폭력을 사용한다

2012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인에게는 최소 9,000달러, 조직에는 최고 3만 달러까지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경한 처벌로 시위를 범죄화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의 득세는 사회적 삶의 사유화를 심화시켰고, 사회적 삶의 사유화는 다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담론은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그리고 국가정책으로 공동의 책임을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잠재워 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울도 담도 없는 세상 1
하워드 진 지음, 김민웅 옮김 / 일상이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 내에서 '실천하는 양심'으로 불렸던 하워드 진은 매우 진보적인 역사가이자 사회사상가였습니다. 본인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을 즐겼던 그는 가난한 이민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나, 소위 '계급적 인식'을 여러 독서와 사색을 통해 수용하게 됩니다. 일생을 외로운 진보주의자로 살아온 그는 뉴욕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박사를 취득하고,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 있는 사립 흑인 여성 대학에서 첫 교편을 잡게 됩니다. 이곳 스펠만 대학에서의 여러 기억은 하워드 진에게 깊게 각인되는데요. 당시 미국의 혼란한 정치와 그로 인해 사회가 실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가 '지식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그와는 완전 다른 길을 가고 있던 보스턴 대학의 총장 존 실버와의 일화는 선선한 인연은 아니었는데요. 여러 구설수에 휘말린 존 실버는 하워드 진에게 엄청난 비판을 당하게 되자 그와 노엄 촘스키를 빗대어 "이미 미국 대학이라는 우물에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라는 독이 풀어져 있다." 고 개탄스럽다 밝히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이 글에서 서술되는 바와 같이 하워드 진이 거쳐온 1950년대는 그저 '좌파'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매카시즘을 이 정도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은 세상에 아마 존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하워드 진이 2010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노엄 촘스키가 그리 애석하게 여긴 것은 평생에 걸친 두 동지의 치열한 삶과 생생한 그들의 양심이 동시대를 함께 관통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략 짐작들을 하시겠지만 하워드 진의 삶은 단순히 지식인 그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가 진정한 시대의 지성인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Historic Unfullfilled Promise"로 2012년 6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10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워드 진의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여기의 이 글은 하워드 진이 요즘의 시민들을 위해 특별히 기획한 것으로 자체가 일종의 논설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미국 내의 대표적인 진보 잡지 '프로그레시브'에 실린 그의 여러 논설을 펴낸 것으로 1980년부터 2009년까지의 기간에 실린 글들을 모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글들은 시대를 설명하는 시론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하워드 진 특유의 사회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의 가감 없는 문장들이 단연 저의 시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그의 글들 가운데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새뮤얼 헌팅턴의 소위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한 하워드 진의 면밀한 해석을 접할 수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헌팅턴이 밝힌 소위 '민주주의의 과잉'은 그 본질이 일반인들이 여러 사회적 권위에 잘 복종하게 만들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진은 "헌팅턴을 비롯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라고 냉정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민주 사회 내부의 많은 시민들이 겉으로만 민주주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속으로는 자신들의 이익 혹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에 걸 맞는 정치를 추종하게 마련이라는 콜린 크라우치 식의 논법에 상당히 긍정하는 편이기도 한 데요. 이것을 사회 내부의 분열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당연한 의견 개진 일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다는 점일 겁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특별한 엘리트 계급이 일반 시민들이 주도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를 마땅히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단한 통찰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하워드 진의 이 글에서는 선출된 권력에 대한 기득권과 자본 계층이 보이는 일종의 적대감에 대해 앞선 논법과 비견될 정도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는 사법 당국이 스스로의 권위 의식에 취해, 조지 W. 부시의 연임을 거의 불법적으로 이끌어 내었다고 봐도 무방한 일전의 사례는 이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이러한 과정을 오로지 사법 관료의 문제로만 전부 치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미국이라는 나라는 금권 정치와 로비의 힘이 지대한 상황이어서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려한 다수(일종의 일반 시민)에 의한 소수(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의 핍박이라는 우려가 이미 무의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트럼프 정권이 시민들에게 보인 반민주적인 행태는 누구나 봐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자에 있는 자들은 동원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인맥과 강력한 법적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자원, 원하는 모든 것들을 거의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존 듀이가 "시민 대다수가 좀 더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라는 점을 언급한 것은 실로 우울한 현실을 대변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가감 없이 지난 미국 현대사를 비평하고 있는 하워드 진의 양심은 그래서 더욱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미국 시민들에게 몇 번의 시대적 격변기에서 자신들의 정치가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자신의 양심이 시키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언급한 진정한 지식인의 범주에 하워드 진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날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이라크에 즉각적으로 개입해 벌인 일들과 그에 반해 코소보의 인종 청소에 시일을 끌며 머뭇거린 점은 가히 대비되는 사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라크 개입에 대한 명분이 되었던 독재자 후세인의 대량 살상 무기는 날조로 밝혀졌고,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인종 청소는 소위 자유 리더의 정치적 무능력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는데요. 하워드 진은 이를 미국이 돈이 되지 않는 전쟁이나 개입에는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정의로운 미국'의 진면목이라 글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을 제일가는 가치로 매번 부르짖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국가가 강력한 명분을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최소한의 UN을 통한 개입도 스스로 주저한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라크에서는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와 같은 자들이 더한 이득을 위해 조지 W, 부시를 좌지우지하면서 이라크를 초토화 시킵니다. 이미 영화화 된 바 있는 '거물' 딕 체니에 대한 일대기는 실로 돈과 권력의 결정체라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작품이었습니다. 막강한 전직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와 권력과의 유착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의 리더이자 스스로 자신들이 쌓아올린 민주 정체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저런 '과두제'의 극명한 속성이 도출되게 된 것인지 지금으로선 사뭇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에 하워드 진은 모든 정치가 가져야만 하는 '도덕적 책무'에 대해 새삼 강조하고 있기도 한데요. 지난 2차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 지역의 민간인들에 대한 '부수적 희생'이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는 점이 미국이 주도한 전쟁의 암울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로 온 가족을 잃은 어느 가장의 피 끓는 일화를 하워드 진이 소개하면서 어떻게 미국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가 하나도 없는지 개탄해 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전쟁 상황에서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완전히 방지하기란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컨트롤 하는 것은 거의 무리라고 주장할 텐데요. 하지만 "어떤 행동이 무고한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죽게 한다면, 이는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만큼 비도덕적인 것이다."는 저자는 하워드 진의 비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저 도덕론적인 이상주의라고 최소한의 견제 장치를 제거해 버린다면 아마도 현실의 이익이라는 유일주의에 심하게 경도된 이 세계에 거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또한 하워드 진의 이 책에는 베트남 전쟁부터 로널드 레이건이 CIA를 동원해 벌인 '더러운 개입 작전'과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정치적이고 근본적인 분석이 담겨 있습니다. 소위 평화를 사랑한다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 어떻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는지는 어쩌면 꽤 많은 학문적 조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군사적 이익이나 전쟁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모두가 인정하는 '국익'으로 치환하고 싶어 하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역사 전부가 모두 도덕적으로 '옳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워드 진 역시 참전한 2차 대전이 지난 세대들에 의해 어느 정도 '좋은 전쟁'이라는 평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후 냉전 시기의 CIA식 개입을 비롯한 얼마간의 제한 작전들이 군사적 복수와 날조, 거짓 선동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와 관련해, 국제 정치를 비롯한 정치 대부분이 현실 세계에서 이상주의적 목적에 부합하는 노력들이 이미 실종된 지 오래이기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 도덕적 책임, 양심, 정의 등도 역시 책에서나 등장하는 사전적 의미로 전락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났습니다. 아마 오스카 와일드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전에서나 언급되는 귀중한 단어들 대부분이 우리가 스스로 버린 것과 다름없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사회를 엄정하게 감시하는 언론의 무능에 대해 여러 분량을 할애해 비판하고 있는 점은 여러 맥락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8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은 이 위원회에서, "1960년대 미국에서 민주주의 열풍이 극적으로 상승했다."면서 이런 현실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중략) 결국 1960년대 민주주의 열풍의 본질은 기존의 공적 사적 권위 체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도전에 있다

물론 여전히 많은 미해결의 과제들이 있다. 그 어떤 장애도 없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자유를 비롯한 무수한 주제들에 대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뒤집어엎는 혁명 대신에 자본주의 연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의료보험과 주택, 일자리와 먹을 것, 그리고 교육을 비롯해 이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주어져야 하며 그것은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체첸 사태에 대해 어느 기자가 질문하자, 클린턴은 남북전쟁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면서 링컨 대통령이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맥락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미국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의 희생, 세계 도처에서 인종청소라는 학살극이 벌어졌을 때 이것을 무시하거나 부추켜온 미국 정부의 그간의 행적, 제3자가 유고 사태에 대해 미국과 나토에게 합리적이고 협상 가능한 제안을 내놓았을 때 그것을 거부해 버린 일 등이다

미국과 세계 도처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식량 또는 직업이 없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언젠가 교황 바오로 2세가 말한 적이 있는)"야만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수적인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창문으로 전쟁이 날아 들어오면, 민주주의는 그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워싱턴의 정부 관료들은 이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가려 할 때, 이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의 민주주의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들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

정부의 권력이란 결국 시민, 군인, 공무원, 언론인, 작가, 교사 그리고 예술가들이 정부에 복종해야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9-26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7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